중국 노동자들에게 다시 피어오르는 문혁의 기억
“룽메이(龙煤)그룹 산하 광부들의 월급이 밀리거나 수입이 감소한 일이 없다.” 지난 3월 헤이룽장(黑龙江)성 성장으로 차세대 중국 리더 그룹에 포함돼 있다는 루하오(陆昊)가 중국 양회(两会, 전인대·정협 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격이라고나 할까. 룽메이 소속 탄광 광부들이 들고일어났다. “지난 6개월간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절규하는 시위대는 ‘살고 싶다. 밥 좀 먹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중국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경기 하락과 함께 주요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대규모 석탄, 철강 기업이 밀집한 동북3성의 경우 경제 성장률이 전국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헤이룽장성의 경우 2015년 GDP가 -0.29%로 이미 경제 경착륙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노동자 임금과 연금 등 각종 사회 보험 체불 현상은 일상이 되었다. 룽젠 광산 기업의 경우 노동자 임금이 이미 40% 삭감되었고 6개월간의 임금과 2년간의 사회 보험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최근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항의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지역 주민들의 민심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헤이룽장 쐉야산시 룽메이그룹 (黑龙江 双鸭山市 龙煤集团)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이다.
룽메이 그룹은 헤이룽장성 4개 지역에서 25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석탄 기업이지만 2011년부터 지금까지 석탄 가격이 60% 하락하면서 2015년 9월 구조조정과 함께 10만 명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감원 계획을 발표하기 전인 2015년 4월 이미 수천 명의 노동자가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고 구금했다. 이러한 성난 민심에 불을 붙인 것은 루하오 성장이다. 루성장은 올 3월 6일 룽메이 노동자들의 월급체불은 한푼도 발생하지않았다는 발언을 했고, 이러한 루성장의 발언에 분노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3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루하오는 노동자 시위 대책 회의를 주관하면서 보고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고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2014년부터 임금이 체납돼 현재까지 거의 반년 치 임금을 받지 못했고 매달 800위안의 생활 보조금만 받는 실정이다. 이들은 ‘루하오가 눈 뜨고 거짓말을 한다’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사실 국유 기업 개혁은 20년 전인 1997~2002년 사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이루어진 바 있고, 당시 4천만 명의 국유 기업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특히 동북 지역에서는 2002~2003년 노동자들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잠시 독립 노조도 설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당국에 의해 진압되고 주동자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쐉야산 지역 노동자 시위에서는 “우리는 살고 싶다, 밥을 먹고 싶다”라는 구호 외에도 “부패 범죄 분자를 타도하자”, “공산당은 돈을 돌려 달라”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거의 모든 노동자가 분노해서 거리로 나가 항의하며 공산당에 책임을 물었고, 과거와 달리 관료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도 대부분 이번 시위를 지지했다. 이 지역에서 공산당은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최근 중국 당국은 기존의 투자, 소비, 수출 중심의 수요 촉진 정책만으로는 더 이상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했다. 중국은 작년부터 과잉 생산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 중심 개혁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주축으로 강력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공급측 개혁 ‘이 노동에 주는 의미는 기업의 혁신과 구조조정에 따른 대대적인 해고다. 시진핑판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중국은 향후 기업의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석탄 부문 노동자 130만 명, 철강 부문 노동자 50만 명을 감원할 예정이며, 정리 해고자 당수가 석탄, 방직, 기계, 군수 시설 분야 종사자이다. 앞으로 2~3년 안에 중국에서 약 500만~600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직면한 문제는 구조조정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이에 반발하는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가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며 공산당의 집권을 위협할 우려마저 낳는다는 데 있다.
과거 중국의 노동자 시위는 산발적이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우선 시위대의 합리적인 요구를 들어주는 식으로 달래는 것이었다. 이어 시위가 수그러지면 시위 주동자를 붙잡아 처벌한다. 또 다른 시위 발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나라에는 법이 있으니 법을 위반한 것에 대해서는 엄벌을 받아야 한다.” 지난 3월 쓰촨(四川)성에서 시위를 주도한 노동자 8명을 처벌하면서 밝힌 중국 당국의 말이다.
2011년 중국에서 벌어진 노동자의 파업이나 시위 건수는 185건. 이틀에 한 번꼴이었다. 그러던 게 불과 4년 만인 지난해엔 무려 15배 가까운 2726건으로 껑충 뛰었다. 이젠 하루에 7~8건의 시위가 터진다. 올해도 그 증가세는 멈출 줄 모른다. 지난달 1일 노동절까지 이미 1000건을 돌파했다. 최근 몇 년간 계속된 경기 둔화에 이어 지난해 말부터는 중국 당국의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 작업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국 내륙 지역의 노동자들은 ‘문화대혁명(文革)’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시장화 개혁 이후 중국 당국은 효율 우선과 경영자 중심의 개혁을 추진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권리도 축소해 왔다.
문혁 시기 조반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던 노동자들도 1990년대가 되면 대부분 석방되는데, 이들은 출옥 뒤 과거 마오쩌둥이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낀다.
문혁이 끝나자 개혁파는 “문혁 중 조반을 일으켜 출세한 자, 파벌 의식이 심각한 자, 문혁 중 파괴하고 약탈한 자”를 일컬어 ‘삼종인’이라고 지칭하며, 이들에 대한 정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자는 문혁 삼종인”이라는 지침과 함께 덩샤오핑은 “노간부들이 문혁 중에 한 발언은 본심에서 한 말과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삼종인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발언하며, 새로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즉 문혁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주도한 조직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고 탄압한 반면, 노간부나 문화 엘리트에 대해서는 대부분 복권이 이루어진다. 이렇듯 삼종인 정리는 당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지만, 당권파의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조반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당권파에 의한 일종의 정치적인 계급 보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50년대 출생자이자 문혁을 직접 체험한 도시 노동자들로, 1990년대 중후반 국유 기업 구조조정으로 해고되고 도시의 빈곤 계층으로 전락해 연금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중요한 자원은 문혁 담론이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문혁 시기를 그리워하고 현 정세 논의를 위한 모임을 한다. 이들의 목표는 한마디로 “자본주의 반대, 사회주의 복귀”이다. 이들의 주요 이론과 경험은 마오쩌둥의 ‘무산 계급 독재 아래 계속 혁명 이론’과 문혁의 실천에서 나오며, 이러한 임무를 실현하는 주력군은 사회주의 노동 계급이고 혁명의 대상은 관료 자본가 혹은 자산 계급이라는 것이다. 마침 이들이 활동을 넓혀 가던 시기는 국유 공장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라 임금과 연금 지급, 국유 기업 민영화 등의 쟁점을 두고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이들은 노동자 해고나 관료 부패 등과 같은 사회 문제의 원인을 개혁 개방 그 자체에서 찾았으며, 문혁 당시 주자파와 특권층 비판이라는 계급적 관점과 정서를 가지고 단결된 행동으로 결집했다. 문혁의 기억은 이들에게 사회주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노동 계급의 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가 기억하는 문혁은 어떤 문혁일까? 노동자들은 정책 노선의 변화를 가장 먼저 자신의 삶과 일터에서 민감하게 감지하는 사람들로, 이들에게 문혁은 단순히 권력자에 대한 우상 숭배나 홍위병 투쟁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남아 있고 이러한 기억은 현재의 현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이들이 기억하는 문혁은 당내 주자파로 상징되는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허용되고, 공장 관리자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통해 일종의 해방감과 주인으로서의 민주적 의식을 체험한 시기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혁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둘째, 공장 관리 측면에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 간의 괴리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시도되었고, 이론과 현실을 유기적으로 접목하려는 ‘생산과 교육의 결합’이 시도되었다. 이는 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상당 부분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주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심리적, 정신적 충족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개혁 이후 당 관료와 기업 경영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상실감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셋째, 노동자라는 직업과 신분, 지위에 대한 자부심이다. 사회주의 시기 노동자는 단순히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영도 계급이라는 정치적 지위와 공장의 주인이라는 상징적 신분이 함께 부여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피와 땀으로 국가 공업화와 건설을 위해 부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공장에 대해 상당히 강한 귀속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공평한지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평가했다. 사회주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은 개혁 이후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급변하는 경제 구조 변화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의 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문혁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억은 권력층에 대한 비판, 민주적인 생산 체제의 경험, 노동 계급으로서의 정체성 및 자부심과 관련이 있다. 물론 문혁이 질서의 단계로 들어선 이후(1969년 이후) 공장 관리의 혁명적 실험은 주로 당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급박하게 종결짓게 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문혁은 사회주의 체제를 환기시키고 공산당에게 이러한 방향으로의 매진을 끊임없이 촉구하는 하나의 역사적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체득해 온 경험을 통해 문혁의 경험을 사회주의와 잇고 있다. 문제는 문혁에서 이루고자 했던 민주적 의사 결정과 복지 제도, 평등한 관계 실현의 시도가 하나의 대안적인 사회주의적 가치로 얼마나 일반 대중에게 확장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혁 역사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기억의 투쟁 ‘이자 현재 조건에 기반한 ‘계급 투쟁 ‘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 위기가 오자 다시 권력의 압박과 자본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러우지웨이 재정부장은 최근 중국 경제 성장 하락의 원인 중 하나로 높은 임금 수준을 지적하며 <노동계약법> 수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동 보호를 발전 지체의 주범으로 몰고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경제를 구하려는 구태도 다시 반복하고 있다. 2016년 강력한 구조조정을 앞두고 중국 노동자들은 20년 전의 상황과 다른 해법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이러한 과정에서 문혁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억은 어떠한 자산으로 결합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