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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의 교훈

한-중 간 분위기는 일단 좋아지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니 그렇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 구도가 바뀐 것은 없다. 다만 수면 아래로 조금 더 들어갈 뿐이다. 근본적은 해결은 먼 일이지만, 치받고 보복하는 악순환은 끊길 것으로 보인다.

자, 이쯤 해서 생각해보자.
모든 문제가 해결돼 양국 관계가 사드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치자. 그렇다면 두 나라의 경제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노(no)! 턱도 없는 소리다. 우리는 절대로 이전과 같은 '윈-윈'식 한-중 산업 협력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중국에 먹히는 한국 기업도 나올 것이고, 중국의 하청 업체로 전락하는 회사도 부지기수로 나올 것이고, 중국 라오반(사장)에게 월급 올려달라고 떼 쓰는 한국인 사원도 나올 것이다. 우리의 대응에 따라서는 그냥 농담으로 나 얘기했던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 발 안마하는 시대'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설마'라고?
하나하나 보자.

이번 사드 사태의 기저에는 아주 무서운 요소가 깔려있었다. '양국 간 산업 역학의 역전'이 바로 그것이다. 한-중 수교 25주년, 전대미문의 양국 관계 발전의 힘은 경제에서 나놨다. 더 구체적으로는 중국이 우리나라의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해야 했고, 그 제품을 만들 부품이나 반제품을 한국에서 사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도 수출이 늘었고, 양국 경협은 말 그대로 윈-윈 할 수 있었다.

중국은 그렇게 한국이 필요했다. 우리가 가끔 중국에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힘이었다. 경제협력이야말로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끌어갈 수 있는 최고의 레버리지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 레버리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 중국의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미국 유럽이나 만들던 상용 비행기를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속철도도 만든다. 생산량 규모로 볼 때 중국은 자동차 세계 1위, 조선 1위, 철강 1위, 기계 1위, 섬유 1위, 가전 1위, 통신기기 1위... 모두 우리를 추월한 제품(산업)이다. 반도체(3위)와 디스플레이(4위)에서 우리가 우위를 보이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이, 많이 만 만들면 뭐 해, 품질이 문제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객관적으로 봐도 현대자동차가 지리(吉利)보단 잘 만들 것 같고, 삼성 핸드폰이 샤오미 것보다는 훨씬 좋고, 고가 TV시장은 여전히 삼성과 LG가 꽉 잡고 있으니 말이다.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새로운 메카 '선전' 에서는 모바일 경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알아야 한다. 지리는 볼보(Volvo)를 인수해서 엔진을 바꾸고 있고, 삼성 핸드폰은 샤오미가 아닌 화웨이(華爲)라는 강자와 품질 경쟁을 벌여야 할 처지다. 중국 가전업체들이 글로벌 소싱을 늘려가면서 고가TV시장의 기술 수준은 점점 더 평평해지고 있다. 중국 기업은 기술으로도 한국 기업을 위협한다는 얘기다.

중국 기업의 기술 비약은 놀랍다. 인터넷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싶더니 금방 모바일로 넘어간다. 지금 세계에서 모바일 산업이 가장 발전한 나라가 중국이다. 4세대 통신 LTE에서는 휘청거리더니 곧바로 5세대(5G)로 달려간다. 화웨이가 국제 표준을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다. 가솔린엔진 자동차로는 늦었지만 전기자동차 쪽으로는 질주한다. 우리는 지금 한국과 중국, 누가 더 차세대 먹거리 싸움에서 이길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중국 정부는 더 무섭다. '중국 제조 2025'라는 4차 산업혁명 맞춤형 산업정책을 만들어내고, '인터넷+'라는 기치를 들어 젊은이들을 창업과 혁신의 장으로 몰아간다. 우리가 4대강 만든다고 땅 파고 있을 때, 창조경제혁신센터 만든다고 정치놀음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다.
스스로 비하하는 게 아니다. 중국을 우러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중국을 봐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의 유일한 대 중국 레버리지가 사라지고 있다. 경제 분야 레버리지가 약해지니가 사드에 심하게 당하는 것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반한 열풍이 확~ 퍼진 이유이기도 하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변화하는 산업환경에 맞춰 서플라이 체인(공급 사슬)을 다시 짜야 한다. 산업 전반의 양국 협력 모델을 확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기존 모델은 아주 간단했다. 많은 기업이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고, 그 현지 공장에 중간재(부품, 반제품)을 공급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공장에서 만들어 중국 소비자에게 수출했다. 그 모델은 생명력을 다한 것으로 판명 난지 오래다.

그렇다면 어떤 모델을 짜야 하나.

우선 주목해야 할 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기 완결형 공급구조'다. 누차 얘기하지만, 중국기업은 이제 어지간한 부품은 자국 내에서 다 조달한다. 한국에서 수입하지 않는다. 중국 전역에 업종별, 제품별 클러스터가 형성되고 있다.

중국의 산업 클러스터는 강력하다. 주변 국가의 기업들을 모두 빨아들인다. 심지어 한국의 대표 상품이라는 삼성 반도체도, LG 디스플레이도 그곳으로 갔다.


우리는 모두 빼앗기기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도 국내에 중국을 이길 수 있는 보다 강력한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수원/평택 반도체 클러스터, 울산/거제 조선 클러스터, 여천 화공 클러스터... 클러스터의 생명은 자기 완결형 서플라인 체인이다. 보다 고도화된 서플라이 체인을 확보하고, 글로벌 체인과 연결하면 이길 수 있다. 핵심 산업, 제품을 선정하고 최강의 산업집적지를 조성해야 한다. 그게 산업정책 아니던가.

클러스터가 강력해지면 그렇게 주변의 관련 기업과 산업을 빨아들인다. 블랙홀처럼 말이다. 변두리에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폭망’하기 십상이다. PC 관련 업체라면 쑤저우로 가고, 에틸렌을 만드는 화공관련 업체라면 이창 곁으로 가야 한다. 글로벌 주문이 점점 그 클러스터로 몰려드는데 어찌 견디겠는가?

클러스터 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지면 산업 전체가 ‘폭망’할 수도 있다.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클러스터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설마 '폭망'까지야…" 그렇게 생각했다면, 너무 안일하다. 우리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아래 사진 말이다.


"결국은 클러스터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서 지면 기업을 빼앗기고, 또 일자리를 빼앗기고 맙니다. 방법, 있지요. 중국의 클러스터를 이길 수 있는 우리 클러스터를 조성하던가, 중국 클러스터를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는 것입니다. 기술력있는 부품으로 서플라이 체인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 아들딸들에게 물려줄 일자리는 없습니다." -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


그래야 기업은 행복해진다. 이웃 중국에 형성된 서플라이 체인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한국 클러스터에 뛰어들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하면 되니까 말이다. 한국과 중국을 넘나드는 공급망을 스스로 만들어 제품을 팔 수도 있다. 우리가 제품을 만들면 중국 기업이 우르르 몰려와 사 가던, 그런 시대는 갔다. 싸구려 노동자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그런 중국은 없다. 부풀어 오르는 중국의 중산층 시장은 새로운 제품을 요구하고 있다.

당신이 사장이라면 이제 결정해야 한다. 공장을 계속 중국에 둬야 할 것인지, 기존 거래선과 계속 거래해야 할 지, R&D센터는 어디에 둬야 하는지, 제품개발부에 중국인을 채용할 것인지, 중국에서 어떤 유통라인을 탈 것인지... 중국 비즈니스의 기본 구도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라는 얘기다. 정부 산업정책은 그런 기업을 어떻게 도울지를 연구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한-중 분위기 좋다. 그러나 사드가 해결된다고 모든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다. 경제 레버리지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사드 사태는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정부는 산업정책을 촘촘하게 짜야하고, 기업은 중국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그게 사드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