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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余

인생 후반기 역사에 이름남긴 사람


기다림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있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보장만 있다면 설령 오랜 시간이라도 참아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 앞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지치고, 포기하고, 결국엔 다른 길을 찾게 된다.

그런데, 여기 무려 72년이나 기다렸던 사람이 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아내가 집을 나가고, 배를 곯은 날이 허다한 속에서 실력을 키우며 미래를 준비한 사람이 있다. 평균수명의 두 배를 넘길 정도로 늙어갔지만, 마음속에 품은 큰 꿈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오늘날 낚시꾼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이름, 강태공(姜太公)의 이야기다.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선조가 여(呂)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하여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린다. 주나라 문왕이 강태공을 초빙하며 선왕 태공이 바라던(望)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 극진(棘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잘 잡은 것은 아니다. 그가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다. 바늘이 있었지만 곧게 펴져 있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의 목적은 물고기를 낚는 데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강태공이 낚시터에서 기다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시간. 강태공은 그 ‘때’를 낚기 위해 무려 72년의 세월을 기다린 것이다.

더욱이, 강태공이 평생을 숨어 살았다고 하여 무명의 은둔 선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은나라 조정에 잠시 출사했었다는 설도 있고, 맹자는 그가 당시 ‘천하의 큰 어른(大老)’이었다고 설명한다. 강태공의 능력과 인망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았던 상황이었을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영달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했기에 곤궁함을 감내하며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주 문왕과 강태공의 첫 만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날 문왕이 사냥을 가기 전에 점쟁이가 이런 점괘를 주었다고 한다. “이번 사냥에서 사로잡을 것은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닙니다. 임금을 보좌할 신하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냥길에 나선 문왕이 도중에 강태공을 만났다는 것이다.

강태공과의 조우를 초월적인 계시에 의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상 강태공의 소문을 들은 문왕이 그를 찾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두 사람은 깊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의기투합했는데, 문왕은 “나의 선왕 태공께서는 ‘성인(聖人)이 주나라에 나타나게 되면, 주나라가 그로 인해 크게 흥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정녕 그 성인이 아니십니까? 선생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튼 강태공은 그길로 문왕의 신하가 되었고,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무왕까지 계속 섬기며 뛰어난 용병술과 기묘한 계책을 발휘했다. 나이가 여든을 넘긴 뒤에도 임금과 신하들을 독려하며,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당시 인구로 봤을 때 신빙성은 약하지만, 4만 5000명의 병력으로 은나라 72만 대군을 격파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는 그 공로로 동쪽 땅 제(齊)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에 봉해졌는데, 길쌈을 장려하고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켰으며, 인적·물적 교류를 활성화하여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관중과 안영 등 명재상을 배출하며 중국 문명에 큰 영향을 끼친 제나라의 시작이다.

만약 강태공이 중도에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계를 꾸리기 위해 다른 삶을 선택했다면 언제 올지 모를 ‘자신의 시간’을 끝내 기다리지 못한 채 섣불리 세상으로 나아갔다면, 역사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리고, 준비했기에 ‘강태공’, ‘태공망’이라는 불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도망간 강태공의 아내는 그가 재상이 된 후 다시 찾아왔다. 말없이 전 부인을 바라보던 강태공은 옆에 있던 물그릇을 바닥에 엎었다.

“이 물을 다시 담을 수 있겠소?”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강태공은 말했다.
“한번 쏟은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법이오. 마찬가지요. 그대도 한번 떠났으니 다시 돌아올 수 없소.”

한번 저지른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고사가 바로 강태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유표의 아들 유기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계모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던 유기가 어찌해야 좋을지를 묻자, 제갈량은 중이(重耳)의 행적을 참고하라고 했다. 마수를 피해 도망친 중이처럼 멀리 떠나 살길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이는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霸者)이자, 진(晉)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군주 문공(文公)의 이름이다. 중이는 43세에 망명길에 올랐다. 후처 여희의 모략에 빠진 아버지 헌공이 세자 신생을 죽이고, 중이와 그의 동생 이오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소식을 들은 중이는 포성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외가인 적(狄)나라로 피신한다.

중이의 망명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를 제거하려 한 데 이어 동생도 그에게 자객을 보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한 날도 있었다. 그러길 19년, 8개 나라를 거치며 방랑하는 동안 그는 어느새 환갑을 넘긴 노인이 되었다.

이 고단한 세월을 중이는 어떻게 견뎠을까. 떠도는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심지어 결말이 좋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우선 그에게는 좋은 동지들이 있었다. 조최, 호언, 가타, 위무자, 개자추 등 뛰어난 인재들이 내내 중이의 곁을 지켰다.

이들은 중이의 벗이자 스승이었고,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중이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자 꾸짖어준 사람도, 중이가 포기하려 하자 다독여준 사람도 바로 이들이었다. 중이는 항상 이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바로잡아갔다.

다음으로 중이는 현명한 아내를 만났다. 제나라 군주의 딸이었던 그의 아내는 중이가 편안함에 젖어 꿈을 잊어가자 조용히 그를 설득했다. “당신을 따라온 선비들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루빨리 진나라로 복귀해 저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수고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당신께서 떠나온 이래 진나라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진나라 군주가 무도하여 백성이나 이웃 나라나 모두가 그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늘이 당신께 기회를 주시려는 겁니다. 그러니 떠나십시오. 안락함과 게으름은 대장부의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이는 거절했다. “인생이란 일장춘몽과도 같소. 나도 이제 늙었으니 그대와 함께 이곳에서 생을 마치려 하오.” 중이는 지쳤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와 편안한 삶을 얻었으니 기약 없는 망명자 생활은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자 아내는 중이를 취해 잠들게 한 후 그의 신하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중이를 마차에 실어 제나라를 떠나게 했다. 남편의 장래를 위해 정을 끊어내는 결단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아내의 진심이 닿았기 때문일까? 정신을 차린 중이는 크게 화를 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 같은 아내와 신하들의 헌신 속에서 중이는 19년을 버텼다. 그는 천하를 방랑하며 열국의 상황을 직접 체험한다. 각 나라의 내부사정과 인재현황, 나라 간에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파악했다. 풍찬노숙하며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이해했다. 이 경험이 후일 군주가 돼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자산이 된다. 이는 다른 나라의 군주들은 갖지 못했다.

“진나라 군주는 19년이나 천하를 방랑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해본 사람이다. 그리하여 백성의 사정에 통달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초나라 성왕의 말이 잘 보여준다. 만약 중이가 인내하지 못하고 섣부르게 움직였다면, 혹은 반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았다면 어땠을까. 최소한 ‘춘추시대의 패자 진 문공’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든 끝을 알 수 없는 도전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젊었을 때도 아니고, 장년을 넘어 노년에 이른 나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성공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이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런데 중이는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다. 덕분에 후반전 막바지에 지울 수 없는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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