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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秦

시안 그리고 창안의 회민가

당나라는 명실상부한 ‘제국’이었고, 수도 장안은 이를 온전히 구현하고 있었다. 너무나 다양한 민족과 그 민족이 만들어 낸 다양한 문화가 장안에 공존했다. 이런 제국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북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北狄)의 진압을 잘 막아내야했다. 그래서 당나라는 북쪽의 외적을 막기 위해 현종 때부터 삭방절도사를 설치했다. 당나라 때 약 70명의 삭방절도사가 있었고 그 중에서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가 무려 16명이나 된다. 삭방절도사가 관할한 범위는 오늘날 닝샤(宁夏),내몽고 하투(河套) 지역, 산시(陕西) 북부 및 간쑤(甘肃) 일부 지역이다. 역대로 삭방절도사는 돌궐·토번 등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군공을 세웠다. 또한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삭방절도사 곽자의는 몽골 고원의 위구르제국(744~840)에 도움을 청했다. 위구르제국의 구성원은 당나라 때 회흘·회골(回纥·回鹘)이라 칭해지던 투르크계 민족이다. 곽자의를 도와 안사의 난을 진압한 회흘 가운데 200여명이 장안에 남게 된다. 이들이 거주했던 곳이 바로 ‘대학습항'(大学习巷)이라고 한다.


'항(巷)’은 거리를 뜻하는데, 시안 서대가(西大街)의 성황묘(城隍庙) 남쪽 입구에서 서쪽으로 100m쯤 되는 지점에서 남북으로 뻗은 400m의 거리가 바로 대학습항이다. 이곳은 당나라 때 외교업무를 관장하던 예부(礼部)의 주객사(主客司)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던 홍려시(鸿胪寺,hóng lú sì)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외국인이 한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도록 이곳에 학관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거리에 ‘학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다.

이곳을 중심으로 현재 회민가(回民街) 즉 회족거리가 형성된다. 현재 이곳 거주민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키고 있는 회족이다. 이들은 주로 원나라 때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색목인(色目人)의 후손이다. 또한 지금의 시안 회족거리는 야시장으로 변해 고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아무튼 회족거리와 이슬람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는데, 청진사(淸眞寺)라고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 그 증거다. 시안의 대표적인 청진사 두 곳이 바로 회족거리의 대학습항과 화각항(化觉巷)에 있다. 서쪽의 대학습항 청진사는 서대사(西大寺)라고도 하고, 동쪽의 화각항 청진대사(清真大寺)는 동대사(東大寺)라고도 한다. 각각 중종(中宗)과 현종 때 처음 세워졌으니, 회족거리의 이슬람 역사는 무려 1300년이 넘는다. ​

이렇게 회족이든, 이슬람교든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할 수 있었던 당 제국의 자신감 뒤에는 그 어떤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장안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나뉜 직사각형의 방(坊)에 ‘갇혀’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안성 내의 108개 방은 각각 2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소리에 맞춰서 아침저녁으로 방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문이 닫힌 다음에는 금위군의 기병이 순찰하면서 철저히 통행을 금지했다. 주민들의 거주지역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구조였으므로, 세금 징수와 병력 관리라는 통치 목적을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치안의 측면에서 불안요소인 외국인 역시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도시였던 장안, 그곳은 완벽한 도시계획에 따라 세워졌다. 동서 9.7㎞, 남북 8.6㎞에 달하는 장안은 성 전체가 바둑판처럼 구획돼 있었다. 바둑판에 그어진 평행선처럼 동서남북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는데, 그 폭은 대부분 50~90m였다. 그 중에서도 남북 중심축에 뻗어 있는 주작대가(朱雀大街)의 폭은 150m나 됐다. 그리고 당 고종 때 세워진 대명궁(大明宮) 앞에 뻗어 있는 단봉대가(丹凤大街)는 그 폭이 무려 180m에 달했다. 주작대가와 단봉대가, 그토록 넓은 길은 오로지 황제를 위한 것이었다. 황제의 행차에는 수많은 군사와 의장대가 동원됐다. 일본 승려 엔닌(园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廵礼行记)’의 기록에 따르면, 회창(会昌) 원년(841) 정월 8일에 그가 목도한 무종의 행차에는 무려 20만명이 황제를 수행했다. 황제가 아주 가끔 행차하는 용도로만 사용된 황제 전용도로는, 그야말로 공간의 독점이자 낭비였다. 무려 100만 인구가 살고 있던 곳이 아닌가!​



높은 집값 때문에 집 없이 세 들어 사는 사람이 훨씬 많았던 장안, 물론 부와 신분에 따라 사는 곳도 달랐다. 궁전이 북쪽에 있었던 만큼 그 근처가 다들 선망의 대상이었고 인구밀도 역시 높았다. 남쪽으로 갈수록 인구밀도는 희박했다. 사람들이 가장 살기 꺼렸던 서남쪽 장수방(长寿坊)은 심지어 호랑이까지 출몰하는 곳이었다. 반면에 동북쪽에는 유력인사들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입원방(入苑坊)과 승업방(胜业坊)에는 왕부(王府)가 들어서 있었고, 숭인방(崇仁坊)에는 공주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으며, 안인방(安仁坊)에는 왕실의 외척이 몰려 있었다. 익선방(翊善坊)과 내정방(来庭坊)은 고역사(高力士) 같은 환관들의 거주지였다.

장안성의 동쪽이 권세가들의 공간이라면, 서쪽은 상인들의 공간이었다. 중앙아시아·서아시아를 비롯해 신라·일본 등지에서 온 상인들이 서시(西市) 근처에 거주했다. 주작대가를 사이에 두고 동시(东市)와 서시 양대 시장이 각각 동서 양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권세가들이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던 만큼 동시가 주로 고관을 타깃으로 삼은 곳이었다면 서시는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옛날 서시가 있던 자리에 현재 대당서시(大唐西市)란 이름의 복합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그 입구에는 무라야마총리가 기증한 견당선(遣唐船)이 서있다. 금시(金市) 광장, 대당서시박물관, 실크로드 관련 중국·한국·일본 거리, 국제여행기념품 교역센터 등이 이미 조성됐다.​



서시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역의 이국 문화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로 성황을 이뤘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온 페르시아 계통의 호희(胡姬)가 있는 술집은 장안 사내들의 혼을 빼놓았다. 대갓집 자제들이 호희를 보기 위해 백마 타고 서시로 내달렸다. 서역의 상품과 패션과 오락과 음악과 음식, 소위 호풍(胡風)이 장안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