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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상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3월 3일 베이징에서는 중국 최대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两会)가 시작됐다. 전국에서 5천 명 이상의 당 지도자들과 직능별 대표들이 몰리면서 요즘 베이징은 호텔방이 부족하고 교통통제구간도 늘고 있다.


‘양회’ 란 ‘두 개의 회의’라는 뜻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격)’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정협)’를 말한다. 중국 헌법 제3장은 전인대가 최고국가권력기관임을 명시하고 있다. 현재 전인대는 전국에서 선발된 2987명의 인민대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중 2157명은 공산당원이고 830명은 공산당과 통일전선을 구축한 무당파 혹은 타 당파 출신이다.

정협은 전인대와는 사뭇 성격이 다른 국가기관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정협의 성격을 파악하면 중국공산혁명의 구조와 역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장제스(蒋介石)의 국민당정부가 중국을 대표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936년 12월 장제스의 휘하에 있던 군벌인 장쉐량(张学良)은 시안(西安)에서 자신의 상관인 장제스를 감금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요구했다. 이른바 서안 사건이다. 장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는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힘을 합쳐 항일 투쟁을 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갈라질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동족 간의 전쟁을 막아보자는 명분 하에 두 당파는 대화에 합의했고, 4일 간의 기나긴 협상 끝에 1945년 10월 10일 양측은 ‘쌍십협정(双十协定)’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당을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했다. 또 국민당은 공산당을 합법적인 야당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 협정에 근거해서 정치개혁을 위한 당파 간의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협의 태동이다. 정협의 첫 번째 회의는 1946년 1월 10일부터 31일까지 충칭(重庆)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중국민주동맹과 개인적으로 참가한 민주인사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고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거의 지배하게 되자 그 해 9월 공산당은 정협을 새로 조직했다.


이 회의에서는 참가정파의 범위를 확대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대한 광범위한 의제를 논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칭에도 ‘인민’이라는 말을 새로 넣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로 바꿨다.

첫 번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새로운 국가와 국기, 수도, 국가의 명칭이다. 또 새로이 건설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부를 선출했다. 이에 따라 정협은 일종의 제헌의회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이 결정한 사항은 그 후 5년 간 중국의 실질적인 헌법이 되었다.

정협은 1954년 헌법이 제정되는 순간까지 중국의 최고권력기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헌법제정에 따라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이 전인대로 규정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헌법은 그 전문에서 정협의 존재와 그 위상을 명확히 규정하면서 정협이 광범위한 대표성을 가진 통일전선조직이며 (广泛代表性的统一战线组织), 이전에는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过去发挥了重要的历史作用), 향후 국가정치생활, 사회생활, 대외우호활동, 사회주의현대화건설, 국가통일과 단결을 위한 투쟁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 (今后在国家政治生活、社会生活和对外友好活动中,在进行社会主义现代化建设、维护国家的统一和团结的斗争中,将进一步发挥它的重要作用)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다당합작과 정치협상제도(中国共产党领导的多党合作和政治协商制度)’ 라는 말 또한 명문화하여 국가의 근간은 공산당임을 잊지 않고 있다.

현재 중국의 정협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혁명위원회 (이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입당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중국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치공당’ ‘93학사’ ‘대만민주자치동맹’ 등 총 12개의 정파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각각의 정파들은 치열했던 중국혁명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협은 각종 사안에 대한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국정 전반에 대한 자문과 비판기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상원’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또한 타이완과 관련한 양안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한 발언권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