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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권운동가 '빈의자' 류샤오보 사망




​2010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조국’은 그에게 가혹했다. 공산당 일당체제를 끝내자고 외쳐온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刘晓波)​는 8년간의 투옥과 암 투병 끝에 13일 61세로 고단한 삶을 마쳤다. 역설적이지만 그를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체제 변화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지식인을 가두고 탄압한 중국 당국이었다.

랴오닝(辽宁省)성 선양(沈阳)시 사법국은 선양의 중국의대 부속 제1병원에서 간암 치료를 받아온 류샤오보가 13일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류샤오보는 전날 병세가 악화돼 호흡 곤란이 시작됐으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삽관을 거부했다.

그는 지난 5월 수감 중이던 랴오닝성 진저우(锦州) 교도소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지난달 23일 8년 만에 가석방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미국, 독일 의료진까지 투입돼 치료에 나섰으나 최근 신장과 간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패혈성 쇼크와 복부 감염,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고통을 겪었다. 류샤오보는 서방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독일 정부 등도 인도주의적 조치를 요구했으나 중국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고, 가혹한 탄압 속에 살았던 지식인은 끝내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학자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류샤오보는 수십년 동안 계속된 탄압 속에서도 끊임 없이 민주화를 희망하고 요구했다. 그에게는 여러차례 해외로 망명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끝까지 중국에 남아 민주화를 염원하며 분투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나 감옥에서 고통받다가 간암에 걸린 뒤에도 감시 속에서 비극적으로 숨졌다. 류샤오보의 죽음은 중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체제 내에서 민주화 개혁을 꿈꿨던 희망의 종말로 여겨질 것이다.

류샤오보는 빼어난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날리던 문학도였다. 1955년 12월 지린(吉林)성 창춘(长春)에서 태어나 지린대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1982년 베이징사범대에서 문학 석사를 받은 후 강단에 섰다. 그러나 1989년 6월4일 일어난 톈안먼 사태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시 방문 학자로 미국에 머물던 류샤오보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미국 명문대에서 일할 기회까지 포기했다. 그는 시위대 유혈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도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사태 후 시위 지도부는 대부분 미국 등 외국으로 건너갔지만 그는 중국에 남았다. 고초가 시작됐다. 반체제 활동을 이어가는 사이 네 차례 체포·구금됐다. 당국에 억류돼 감시를 당하고, 노동교화형으로 탄압받으면서도 ‘심미와 인간의 자유’ ‘알몸으로 하느님에게’와 같은 비판적인 글들을 발표했다. 그에게 결정적 시련을 안겨준 것은 2008년 12월 공산당 일당 독재 개혁과 삼권 분립, 언론의 자유 보장 등의 내용에 공감하는 지식인 303명의 서명을 받은 ‘08헌장’ 을 작성하여 발표한 사건이었다. 류샤오보는 이듬해 국가전복선동 혐의로 체포돼 징역 11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에서 그는 "나에게는 적이 없다"는 글을 발표해 이렇게 말했다. “증오는 지혜와 양심이 아니다, 적대적인 감정은 국가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만적인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관용과 인간성을 파괴한다. 또, 국가가 자유와 민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2010년 10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중국의 인권을 위한 오랜 비폭력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며 그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시상식은 ‘빈 의자’로 치러졌다. 중국은 수감 중인 류샤오보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중국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미국, 캐나다, 독일, 스위스 등이 중국 정부에 류샤오보의 석방을 요구했고 학자, 변호사, 인권운동가들의 서명운동도 이어졌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철저한 검열과 언론통제로 08헌장과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일반 중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세상을 뜨기전 한달 동안 그를 치료했던 선양의 병원 간호사들은 류샤오보의 상태에 대해 묻는 외신기자들을 향해 '도대체 그가 누구이길래 수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와 묻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류샤오보가 감옥에 드나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첫번째 아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류사오보는 ‘사회질서교란죄’로 노동교화소에 갇혀 있던 류샤(刘霞)와 96년 옥중 결혼했다. 남편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수감 중 300여통의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 여인에게서 본다”며 류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류샤오보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류샤에 대한 감시도 심해졌다. 2011년부터 남편의 메신저 역할을 해오던 류샤는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우울증을 겪었다. 류샤오보가 “죽더라도 외국에서 죽고 싶다”며 출국을 원했던 것은 뒤에 남겨질 아내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대부분의 중국언론들과 소셜미디어에서는 류샤오보와 그의 부인 류샤의 이름은 삭제됐고, 검색이 불가능하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름과 같이 류샤오보를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정보 대신 2010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류샤오보의 불참으로 빈 의자와 함께 진행된 데서 착안한 '빈 의자(空椅子)'라는 단어를 써서 검열을 피해 류샤오보 상태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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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0일 중국 당국의 불허로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메달과 증서가 빈 의자에 놓여있다.

심지어 13일 저녁 류샤오보의 사망이후 중국 당국은 웨이보에 류샤오보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촛불 이모티콘의 사용도 금지시키고, 촛불 이모티콘을 쓴 네티즌들의 글들도 삭제시키고 있는 중이다.



과거 중국이 힘이 약했을 때는 서방 세계의 민주화 요구를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전 중국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들은 서구에 망명하는데 성공했었다. 천안문 시위의 지지자였던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励之)는 1989년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관에 13개월간이나 몸을 피했고, 미국은 중국과의 마라톤협상을 벌여 그가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했다. 역시 천안문 시위에 앞장섰던 당시 베이징대 학생이었고 정치범으로 수감 중이었던 반체제 인사 웨이징셩(魏京生)도 1997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국으로 추방되는 형식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굴기하면서 서방 세계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중국의 민주화 문제를 이슈화하길 꺼려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대부분 서방의 지도자들은 류샤오보의 석방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노벨상 평화상 시상국인 노르웨이도 류샤오보 석방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나라가 사드배치에 대한 보복조치로 한한령과 한국여행을 금지당한 것처럼 류샤오보에게 노벨상을 수상했단 이유로 노르웨이는 주력 수출품이던 연어수출을 금지당하는 등 몇년 동안 경제 보복조처를 당했고, 단교조치까지 당한 후 6년 만인 최근에야 겨우 다시 외교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가한 대부분 정상들은 류샤오보에 대해 침묵했다.

중국은 이제 외국의 민주화 요구를 돈으로 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눈치볼 것없는 중국 당국에 의해 더욱 탄압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류사오보의 사망을 계기로 중국의 인권 문제를 둘러싼 서방의 압력은 더 거세지고, 이를 내정간섭이라며 비난하는 중국과 서방의 신경전도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2015년 7월부터 인권운동가들을 더욱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현재 최소 16명의 인권변호사와 활동가가 투옥돼 있다. 국가권력을 전복하려 선동했다거나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는 혐의다. 이들도 대부분 류샤오보처럼 외부와 단절된 채 갇혀 있다. 또 올해부터 외국 비정부기구(NGO)의 활동을 더 강도높게 통제하는 ‘NGO관리법’이 시행돼 지난달까지 7000여개 단체 중 1%인 82곳만 등록이 허가됐다.

중국에서 사회 불만으로 일어나는 집단시위는 연간 18만 건을 넘는다고 한다.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에서는 매일같이 무장독립투쟁이 일어난다. 대중이 모르는 사이에 투옥, 수감되는 인사가 부지기수라는 얘기다. 류 씨가 평생 외친 것은 자유 인권 평등 민주 법치였다.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본이자 진리의 어머니”라며 언론자유를 강조했다. 이런 인류 보편적 가치조차 수용 못 하는 중국이 세계 지도국가로 갈 길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