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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京

등소평의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홍콩 반환과정에서 덩샤오핑(邓小平)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반환일을 코앞에 두고 눈을 감았지만 특유의 집요함과 지혜를 발휘해 1984년 영국과의 반환협정을 매듭지었다. 최대 관건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돌려보내는 아쉬움에 이런저런 구실을 찾던 영국, 사회주의 체제 편입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 못 이루던 홍콩 주민, 축하보다는 뭔가 시비를 걸고 싶은 서방 국가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세기의 ‘묘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일국양제다. 중국의 사회주의와 홍콩의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통합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적응과 융합의 선순환 과정을 거쳐 결국 하나의 중국으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국양제는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개혁개방의 대장정을 막 시작한 상황에서 덩샤오핑의 실용적 사고와 과감한 결단이 응축된 중국식 해법이었다. 이러한 탄생배경을 가진 일국양제는 그동안 절묘한 비방으로 여겨져왔지만 시행 22년을 맞은 올 해 큰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일국양제를 가능하게 했던 상호신뢰의 붕괴다. 중국과 홍콩의 불신은 이미 2014년 우산혁명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홍콩 반환 20년이 되는 2017년 행정장관의 직선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중국은 후보자격에 ‘애국애항’(爱国爱港)이란 조건을 붙여 친(親)중국 인사에게만 후보자격을 부여했다. 민주 선거 과정에 익숙치 않은 중국지도부의 입장에서 그 정도면 직선제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20년을 불안하게 기다렸던 대다수 홍콩인들은 일국양제의 결정적 함정에 절망했다.

지난 1일 사상 초유의 홍콩 입법회 건물 점거로 이어진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시위는 사안의 성격으로만 보면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에 비해 비중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규모·조직·강도의 측면에서 우산혁명을 능가한다. 700만 홍콩 주민 가운데 100만명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동안 누적된 문제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과 분노의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일 것이다. 홍콩 청년들의 분노와 폭발음은 이미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

일국양제의 핵심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하여 정치·경제·사법적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다. 즉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에 따라 50년간 ‘고도의 자치’를 보장함으로써 중국 본토와는 다른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50년 절대불변’이란 약속이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 달래준 게 사실이다. 물론 형편이 넉넉한 홍콩 상류층은 반환을 앞두고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언제든지 이주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력이 없는 대다수 홍콩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홍콩인에 의한 홍콩의 통치’(港人治港)를 보장하겠다는 중국의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반환 초기 중국은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하고 고도의 자치 실현에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 반환 당일 홍콩에 주둔한 인민해방군도 외부노출을 차단하고 은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유무역협정(FTA)과 유사한 경제협약도 맺었고 홍콩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직간접적인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중국 최고지도자 앞에서 머리 조아리는 둥젠화(董建華) 초대 행정장관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 자치의 취약성을 확인했다. 중국지도부가 임명하는 어용 행정장관이 아닌 직선제 행정장관을 홍콩인들이 원했던 이유다.

물론 행정장관의 직선제만으로 홍콩의 자치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일국양제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중국 헌법은 ‘국가가 필요로 할 때 특별행정구를 설치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바꿔말해 필요가 사라지면 특별행정구를 폐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별행정규의 존폐는 전인대(全人大)의 형식적 표결에 달렸다. 뿐만 아니라 행정장관을 직선으로 선출한다 해도 최종 임명권은 중국에 있다. 따라서 부여된 자치는 어차피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홍콩의 젊은이들이 직선제를 원한 것은 중국이 임명하는 꼭두각시 행정장관보다는 홍콩의 민의를 반영하여 좀 더 당당하게 자치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 때문이었다. 결국 그 희망마저 무너지자 절망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확산되었다.

홍콩 청년들의 분노가 정치적 이유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을 더욱 좌절케 한 것은 중국의 전방위적 개입으로 인한 가치 혼란과 제도적 충돌, 생활여건의 지속적인 악화와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등복합적 요인에서다. 사실 반환 이후 외형적 화려함과 다르게 홍콩의 정치 통제, 경제 격차, 사회 갈등은 나날이 심화되었다. 민주·자유·인권의 가치를 교육받은 홍콩 청년들이 가속화되는 중국화의 현실을 암담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실제로 대다수 청년들은 점차 홍콩의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는 중국인 상류층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중국인 하층 노동자 사이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 홍콩의 주요 대학에까지 중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어 미래의 홍콩 상류층을 예약하고 있다.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홍콩 청년들이 좌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중국과 홍콩이 문제를 잘 해결하기 바란다. 내가 아는 최대 규모의 시위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홍콩 시위를 언급하며 한 말이다. 그의 속내는 무엇일까.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진심이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골치깨나 아프겠다는 비아냥마저 엿보인다. 미 국무부도 ‘표현의 자유와 평화적 집회의 존중’을 주문했고 미 의회의 반응은 더욱 부정적이다. 중국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서방 언론들의 날선 비판이다. CNN이 시위 현장을 몇 시간씩 생중계하는 바람에 중국 외교부가 ‘가짜 뉴스’란 말을 꺼내기도 민망하다. 세계가 주시하는 상황에서 강경 진압도 가능하지 않다.

한마디로 중국의 전면적 굴기를 제압하려는 미국으로선 더없이 좋은 호재를 만났다. 중국이 거대한 경제력을 축적하고 ‘종합국력’의 전방위적 투사를 통해 ‘중국몽’(中国梦)에 바짝 다가가도 민주·자유·인권의 취약성은 언제나 중국의 발목을 잡는다. 도무지 종잡기 어려운 트럼프와 무역전쟁을 하는 와중에 민주와 자유를 달라는 홍콩 청년들의 외침이 짜증날 뿐이다. 마침 2019년은 시 주석이 화려하게 광을 내야 할 건국 70주년이지만 홍콩 청년들의 가슴에 더 와닿는 건 민주·자유의 상징인 5·4운동 100주년, 천안문 사건 30주년이다. 이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 미국과 서방 세계의 눈과 입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잘 나가는 중국을 손보고 싶은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다.

결국 이번 홍콩 시위는 일국양제의 태생적 한계와 상호인식 차이를 극명하게 노출시켰다. 또한 일국양제의 통합기능에만 집착하여 ‘고도의 자치권 부여’ 약속을 가벼이 여긴 중국지도부의 조급증과 힘센 중앙정부에 과잉 충성하려는 홍콩의 아부꾼들이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은 한 건 하려다가 시 주석에게 못보일 걸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의 일국양제는 지속될 것이다. 중국은 일국(一国)을 향한 양제(两制)의 시한부 ‘화해’(和谐)를 강행할 것이고 홍콩으로선 이를 전면 거부할 명분도 없고 힘도 없다. 일국양제가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라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상처나고 곪아 터져도 시간은 중국 편이다. 약속했던 50년의 절반이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