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 수가 200명을 넘어섰고, 확진자수는 17년전 사스때를 넘어섰다. 중국은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사스는 2002년 11월 16일 중국 광동성 포산(佛山)에서 처음 발병했는데,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가 첫 발생지역인 광동성 여행에서 감염된 후 베트남과 홍콩으로 이동하면서 호텔 투숙객, 의료진 등에게 전파했다. 중국 언론들이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2003년 2월10일 폐렴 괴질로 중국에서 100여명이 감염됐고 5명이 사망했고, 12일에는 중국 내 6개 도시로 확산되면서 감염자가 늘고 있다고 홍콩 언론들이 경고했다. 그해 3월12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국 괴질의 아시아 전역 확산 경계령을 내렸고, 같은 달 15일에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등에서 감염자가 보고됐다. 4일 후인 19일에는 미국과 영국, 스페인 등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 WHO는 이어 29일 첫 사스 사망자를 공식 확인하고 30일 전 세계 괴질 환자가 1500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4월9일에는 아프리카, 17일에는 인도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다.
WHO는 4월14일 사스의 원인을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非典型肺炎)라고 정의했다. 중국 정부는 이날까지 베이징 내 감염자가 37명이며, 사망자는 4명이라면서 사스는 통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같은 달 16일 중국 현지조사에 참여중이던 WHO 바이러스 전문가들이 "중국이 모든 사례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17일 WHO는 중국 정부가 사스 발병 사례를 축소 보고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다음날인 18일 후진타오(胡锦涛)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사스 은폐 중단을 지시했고, 급기야 중국 정부는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감염자 346명, 의심자 402명, 사망자 18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23일에서야 베이징 내 모든 학교를 폐쇄했고, 27일에 모든 위락시설 폐쇄 조치를 내렸다.
WHO가 사스 방역 종료를 선언한 것은 같은 해 7월5일인데, 이는 첫 환자 발생 후 약 8개월이 지나서다. 완전 방역까지 전 세계 32개국에서 8273명이 감염됐으며 이중 774명이 사망했다. 중국에서 5,300명의 환자중 349명, 홍콩에서 1,750명 가운데 29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캐나다에서 43명, 대만 37명, 싱가포르 33명, 베트남 5명, 태국 2명, 말레이시아 2명, 필리핀 2명, 프랑스 1명 남아프리카공화국 1명 등 세계 각국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2002년 11월 16일, 광동성의 포산 시에서 원인미상의 감염 환자가 최초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광동성, 혹은 포산시의 그 누구도 이 환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로 전 날인 11월 15일에 제16차 중국공산당 당대회가 폐막했기 때문이다. 이 당대회에서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시장개혁을 진두지휘 해온 장쩌민과 주룽지가 공식적으로 은퇴하고, 덩샤오핑이 낙점했다는 차기 지도자인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21세기의 중국을 이끌 지도자로 확정되었다.
1-2월에는 지방 양회가 개최되고 3월에는 한 해 가장 큰 정치행사인 양회(两会; 매년 3월초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协’))가 개최될 예정으로 사향 고양이에서 유래했다는 그 괴질은 광동성에서 사실상 방치되었다. 현지 보건 당국은 그 전염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상부로 보고하기를 계속해서 주저했다. 아마 권력교체기라는 민감한 시점에서, 인사고과에 불리한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상부도 그런 보고를 원치 않았다. 천안문 이래로 중국 공산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의 불안정이었다. 그 틈을 타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전파되었다. 2003년 1월, 감염이 광동성에서 더 확산됨에 따라 의료당국은 이 질병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를 시작했다. 1월 27일, 광동성 보건국 측으로 보고서가 올라갔다. 따라서 관련 문건들은 아마도 북경까지 보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주의 깊게 회람되지 않았다. 결국 1월 31일, 훗날 사스 ‘슈퍼 전파자(非典毒王)’로 기록될 한 환자가 광저우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50일간 의료진을 포함 144명을 감염시켰다. 2월 21일, 그 과정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산대학교 류젠룬(刘检伦) 교수는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홍콩에 방문했다. 이후 그가 홍콩에 방문했을 때 묵었던 메트로폴 호텔 911호는 세계를 휩슨 사스 유행의 진원지로 지목 받게 된다.
류교수에 의해 오염된 이 호텔에서 감염된 환자가 프린스 어브 웨일즈 병원에 입원하면서 병원종사자 및 환자를 감염시키며 전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홍콩에서 본격적으로 전염병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신종 질병에 대한 세계인들의 의구심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고, 타국민까지도 그 피해 범위에 들어왔는데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 해도 중국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심지어 전염병의 진원지인 광동성에도 정보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2월 내내 광동성에서는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괴담이 확산되며 3월에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전염병이 베이징에 상륙하고, 그 달 말에는 더 북쪽인 내몽골까지도 진출했다.
당국의 정보 통제라는 댐은 홍콩과 본토를 오가는 기자들에 의해 뚫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일국양제가 작동하던 홍콩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질환에 관한 정보를 공유받고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본토 출신 기자들은 자신들에게서 차단되고 있던 정보를 새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본토로 돌아간 기자들 중 일부가 검열을 아랑곳하지 않고 관련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이 통제하는 공식 언론의 첫 관문이 뚫렸다. 그 다음은 소문이었다. 홍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소문, 검열되기 전의 언론기사를 본 사람들이 퍼트린 소문들이 이메일,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각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제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전염병이 광동에서 시작됐고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더는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3월 말, WHO와 협조가 시작되면서 중국 당국은 제한적이나마 관련 정보를 외부인들에게 제공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권력과 그 기반인 사회안정이었지, 투명한 정보와 즉각적 위기관리는 아니었다. 4월, 장원캉(张文康)국무원 위생부장은 베이징에서 고작 12명 환자가 있을 따름이고 상황은 통제 가능하다고 발표하며 대내외적 신뢰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베이징의 사스 실태를 알고 있던 인민해방군 301 의원 군의관이었던 장옌융(蒋彦勇)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인민해방군 301 병원을 비롯한 세 군데 병원만 이미 120명 이상의 환자가 있다고 4월 8일 발간된 미국의 시사잡지 ‘타임’지를 통해 폭로했다. 중국 국영 CCTV는 장옌융의 폭로를 외면했지만, 이 소식은 외신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WHO와 각국 정부를 비롯한 외국인들과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불안에 떠는 중국인 모두가 당국에게 진실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장박사는 45일간 구금됐고, 8개월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연금 이후에도 장 박사의 활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제한 조치는 계속됐다. 장옌융은 2004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새로 권력을 얻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게는 이런 사태를 활용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당시 후진타오는 국가주석과 당총서기 직위를 승계 받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인 최고직위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은 승계 받지 못한 ‘반쪽짜리 지도자’로 여전히 장쩌민은 상왕으로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고, 장원캉 위생부장은 장쩌민의 주치의였고, 당연히 그의 심복이기도 했다. 13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면서 만들어놓은 장쩌민 계파를 뚫고 들어가기에, 내륙의 한미한 출신인 후진타오의 힘은 아직 약했다.하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인 사스가 그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서 잔혹한 진압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남자였지만, 그는 동시에 개혁파 지도자인 후야오방 밑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배경도 갖고 있었다. 총리 원자바오는 역시 다른 개혁파 지도자인 자오쯔양의 밑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이 둘은 장쩌민 식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통치보다는 더 개방적인 통치가 앞으로의 중국에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당국의 고압적이고 폐쇄적인 행보가 사태를 일파만파 악화시키고 있음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이제 정보를 공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장옌융의 폭로 이후, 후진타오는 위생부 부장인 장원캉과 북경 시장인 멍쉐눙(孟学农)을 경질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사스에 대한 전 인민의 적극적 대응을 촉구하였다.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베이징의 사스 감염자가 37명 밖에 안 된다고 주장하던 보도는 이후 곧바로 베이징 시민 340명이 감염되었으며 전국적으로는 1,800명이 감염되었다는 보도로 바뀌었다. 최초 발병 이래로 5개월이나 흐른 시점이었지만, 아직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전염병이 확대되지는 않던 상황이었다. 정보가 흐르고 각급 지방정부들이 중국이 자랑하는 거대한 동원력을 활용해 전면적 방역에 나서면서 사태는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정보를 계속 은폐하려고 하거나 태업을 벌이는 관료들에게는 계속해서 징계, 경질, 출당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사스는 이제 마오쩌둥 시대의 단순했던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국제 무역에 참여하면서 놀랍도록 복잡한 사회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전염병이 온 대륙과 세계 전역을 패닉 상태로 몰아붙인 것은 중국 내외부를 연결해주는 교통이 발달하고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국은 미생물은 통제 못하면서 정보를 통제하려 함으로써 중요한 방역 시기를 놓쳐버렸다. 후진타오는 이 상징적인 실패를 활용해 마침내 전임자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자신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출발선에 간신히 설 수 있게 되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사스의 경험이 무서우리만치 똑같이 우한에서 반복되고 있다. 먼저 중국인 특유의 야생동물 섭취 문화가 만들어낸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점에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스와 판박이다. 하지만 유사점이 여기서만 그쳤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마치 2002년 광동에서 당대회와 양회사이의 기간에 ‘태평 천하’를 연출하려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처럼, 2019년 12월 후베이와 우한에서도 1월에 있을 성급(省級)양회를 앞두고 사태를 의도적으로 축소, 은폐, 경시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사스에 대항한 ‘성전’의 기억이 있는 나라에서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한 것일까? 이는 아마 후진타오 정부에서 시진핑 정부로의 성격 변화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비교적 우호적이고, 전면적은 아니나 정치적으로 더 개방된 질서를 원했던 이전 정권의 성격이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히 퇴조했다. 공산당의 더욱더 적극적인 영도 하에 중국 인민은 중국이 다시 세계 정상의 국가에 올라서는 ‘중국몽’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로 당의 권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허튼 일’로 대중적 소요와 사회 혼란이 발생하는 일이 전면 차단 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베이성과 우한시 당 관료들 입장에서 새로운 괴질을 은폐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개혁개방 이래로 중국은 줄곧 각급의 당관료들을 지방 행정부에서 경쟁하게 하고, 실적이 좋은 이들에게 상급 행정기관을 맡기는 인사 정책을 시행해온 터였다. 이는 개혁개방의 흐름을 한창 탈 무렵 경제성장을 촉진시킨 효과적인 정책이었음이 드러났다.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각 지방 정부의 수장들은 기업의 수출과 도시 발전을 위해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건설하고, 각종 제도적 혜택과 혁신을 고안하여 더 높은 실적을 거두고자 했다. 한 지방정부에서 얻어진 성공은 다른 곳으로 빠르게 복제되어 중국 전역이 분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인사정책이 위기대응 능력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실적은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기록되어 승진에 좋게 활용되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이나 실패는 절대 자신의 것이 되면 안 되었다. 어차피 몇 년 근무하고 떠날 근무지 아닌가? 임기 내 최대한 사고 없이 무탈하게 보내 실적을 쌓아 상급 기관으로 영전하는 것이 지방 관료들의 목표가 되었다.
가깝게, 리커창 총리가 허난성 성장에 부임하자마자 발생한 매혈로 인한 에이즈 위기는 그의 승진에 계속해서 걸림돌이 된 바가 있었다. 중국의 당관료로서 성공적인 출세 가도를 걷고자 한다면, 이런 불운을 최대한 피해야했다. 즉, 윗선에서 들릴 잡음이 나면 절대 안 되었던 것이다. 특히 양회와 같이, 당이 인민에 노출되는 중차대한 행사를 앞두고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우한은 본래 장강 중류의 우창(武昌), 한양(汉阳), 한커우(汉口)라는 세 개 도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곳이다. 이 도시는 장강 중류 물류의 중심지로, 청제국이 개항을 하면서 더욱 빠르게 발전하여 열강들의 조계지까지 설치된 곳이기도 하였다. 약 100여년 전인 1911년, 바로 이 도시에서 사천 지방의 보로운동(保路运动)을 진압하러 가던 호북 신군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청제국의 각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이 곳에서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고,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자 대부분의 지역들이 봉기에 동참하게 된다. 마침내 전국적 봉기가 이어져 2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의 청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아니, 시황제 이래로 2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을 통치하던 황제 전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신해혁명의 신호탄은 최초의 봉기가 일어났던 도시의 이름을 딴 ‘무창봉기(武昌起义)’로 간주된다.
무창봉기로부터 1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중국 대륙에서 무척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외세에 의해 착취 받던 중국은 오히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무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패권국인 미국마저도 중국과 ‘협상’을 해야한다. 한편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민들의 수는 이제 부지런히 메트로폴리스를 오가는 도시민들보다 적어졌다. 이제 말 그대로 ‘불야성’인 번쩍번쩍 빛나는 거대한 도시들이 대륙을 수놓고, 그 도시 밑에는 거미줄 같은 지하철이, 도시들 사이는 수개월 걸리던 거리를 수시간으로 줄여주는 고속철이 가로지른다. 인민들의 삶은 여유로워졌고 사람들은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대비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해혁명과 신중국 성립을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이 이루어냈다고 자부하는 성과들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 자유선거는 단 한 차례밖에 치러지지 않았다. 관리들은 여전히 인민 위에 서려고 하며, 그들이 행하는 부정의는 달라진 바가 없다. 그런 면에서, 당이 주장하는 지난 백년의 성과는 어찌보면 껍데기와도 같은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중국은 아프리카에서는 중국의 발전 경험을 전수하겠다고 자랑하고, 유럽 선진국에서도 ‘큰 손’으로 대접 받는 것을 즐기며, 패권국인 미국에도 맞서겠다는 세계 제2의 강대국이었다. 그들의 정부와 당이 그렇게 선전했고 그 국민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대한 나라가 국민이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죽도록 방치하고, 세계의 공장이라면서 고작 마스크도 제대로 배급 못하며, 공식 발표라는 것이 인터넷 괴담만큼의 신뢰성을 보여준다면, 그 인민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야할까?
그런 이유로, 당-국가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퇴치한다고 하더라도, 바이러스가 당과 인민 사이에 만들어낸 상처가 회복되기에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17년 전 사스는 더 발전되고 복잡해진 중국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어떠해야할지, 정보는 어떻게 흐르고 행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후진타오는 그에 대해 불충분하지만 나름의 답을 제시했었다. 당의 절대적 영도 하에 최대한 주어지는 자유. 이 답이 옳든 그르든 어쨌든 중화인민공화국은 후진타오의 답 덕에 17년의 세월을 벌었던 것 같다.
시진핑이 접한 문제는 17년 동안 중국이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고, 안팎으로 더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으며, 더 많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오가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7년 동안 시진핑은 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을 더 강하게 막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아마 필시 모바일 시대 새로이 등장한 놀라운 신무기들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정착민과 도시민의 근원적 공포라고 할 수 있는 미생물의 공포마저 통제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하겠다. 더 커진 문제에 맞서 시진핑과 그의 수하들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까. 방향을 급선회하여 그의 전임자가 시행한 대책들을 더 크게 실시할까? 아니면, 그의 완고한 고집을 이어 더 강력한 통제책으로 미생물, 나아가 인민에 대처하려고 할까?
어떤 선택이 되든 그 선택은 바이러스 이후의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중국과 함께 살아가야할 세계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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