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상영된 홍콩영화 ‘첨밀밀’에서는 청춘의 운명적 사랑이야기와 감성적 음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영화의 배경은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사회. 그 속에서 남녀 주인공을 맺어주는 인연의 고리로 가수 덩리쥔의 존재를 드러낸다. ‘홍콩 드림’을 좇아 본토에서 낯선 땅을 찾은 청춘남녀가 좋아하는 가수가 덩리쥔이었고, 10년 뒤 두 사람이 우연히 재회하게 된 것도 전파에서 흘러나온 그의 사망 소식 때문이었다.
영화는 리밍이 분한 리샤오줜(黎小军)과 장만위가 분한 리챠오(李翘)의 감정과 인연을 연결해주는 메타포 (metaphor)로 덩리쥔의 ‘첨밀밀(甛蜜蜜·꿀처럼 달콤한)’과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달빛이 나의 마음을 대신하네)’를 활용한다. 한국의 중장년팬들에겐 등려군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덩리쥔은 청아한 목소리로 달콤하고 애틋한 로맨스를 십분 살려냈다.
덩리쥔(鄧麗君·1953∼1995)은 대만이 배출한 세기의 가수다. 영화 첨밀밀에서도 말했듯이 세계 어디에서든 차이나타운이 있고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덩리쥔의 노래를 한 번쯤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금지됐다. 중국은 그의 노래를 '대중을 현혹시켜 나라를 망치는 노래(靡靡之音)'로 간주했다.
덩리쥔은 국민당 군인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군 위문공연을 열심히 다녀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공공연히 국민당의 처지에 섰다. "제가 중국 대륙에서 노래하는 날은 (대만의 국가이념인) 우리의 삼민주의가 중국 대륙에서 실행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이야 어쨌건 중국인들은 덩리쥔의 노래에 사로잡혀, 낮에는 덩샤오핑의 교시를 듣더라도 밤에는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다(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
덩리쥔은 1953년 1월 29일 타이완의 윈린현(雲林縣) 바오중향(褒忠鄕) 톈양촌(田洋村)에서 아버지 덩수(鄧樞), 어머니 자오쑤구이(趙素桂) 사이의 네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름인 ‘리쥔’은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지은 것이다.
아버지는 동료들의 추천에 따라 청나라 여류 작가 진단생(陳端生)의 희곡 『재생연再生緣』에 나오는 재능이 출중했던 송나라의 ‘맹여군(孟麗君)’으로부터 딸의 이름을 취했다. 그는 아마도 덩리쥔이 재인으로 살아갈 운명을 느낀 것은 아닐까?
그녀는 태어나면서 노래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다. 이 자질을 더욱 발전시키게 된 것은 1960년 초등학교 2학년 때 은사 리청칭(李成淸)으로부터 노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휴학하고 위저우(宇宙)음반회사에서 최초로 자신의 노래를 취입하고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홍콩·일본 등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고, 가는 곳마다 인기가 대단했다.
덩리쥔은 언어 분야의 재능이 특별히 뛰어났다. 영어·일어·프랑스어·말레이어를 구사했으며 중국어로는 베이징어·민난(閩南)어·광둥어·상하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특히 상하이어를 잘했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일본 회사가 통역을 붙여주었으나 반 년 뒤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본어를 잘했다. 1970년대 말부터 중국 대륙에도 그녀의 노래가 전파되기 시작했 다. 당시 중국 대륙은 녹음기의 보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만에서 전송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그녀의 노래를 암암리에 들었다.
당시 대륙에서 덩리쥔의 노래는 금지곡이었다.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부친의 타이완 군대 근무 경력과 덩리쥔이 타이완 군대에 대해 여러 차례 위문 공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덩이 타이완의 노래인 ‘매화’와 ‘중화민국송’ 등을 불렀고, 타이완에서 ‘애국 가수’이자 ‘군인들의 애인’이었으며, 진먼섬(金門島)에서 대(對)중국 방송으로 ‘반공’을 강조했다는 게 덩리쥔 노래가 금지된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단파 라디오로 몰래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이후 개혁·개방이 되면서 1980년 대 초 중국 대륙의 몇몇 여자 가수들이 덩리쥔을 모방해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부른 1000곡의 노래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 ‘꿀처럼 달콤해요(첨밀밀, 甛蜜蜜)’, ‘안녕, 내 사랑(再見我的愛人)’, ‘작은 도시 이야기(小城故事), ‘당신은 나의 가장 중요한 사람(我只在乎你)’, ‘인생의 길에 산보를 하며(漫步人生路)’, ‘바다의 음조(海韻)’, ‘잊으리(忘記他)’가 자주 불리고 지금도 중화권 어디에서나 들리는 노래들이다. 또한 유명한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곡조를 붙여 부른 ‘다만 우리 헤어져 있어도(但願人長久)’와, 후당(後唐)의 황제였던 이욱(李煜)이 지은 시 ‘우미인(虞美人)’이나 ‘홀로 서루에 오르니(獨上西樓)’ 같은 명문장의 시에 곡조를 붙인 노래는 지금도 노래방에서 우선 선곡되는 큰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도 흥미를 끈다. 남자친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 만난 첫사랑 린전파(林振發) 는 말레이시아 부호의 아들이었는데,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는 스물다섯 살에 만난 천샹린(陳祥林)으로, 그가 타이완의 유명한 여배우 린칭샤(임청하, 林靑霞)와 약혼을 함으로써 사랑이 깨지고 말았다. 세 번째는 1979년 스물일곱 살 때 미국에서 만난 영화 배우 청룽(成龍)인데, 잠시 동안 서로 사랑했지만 헤어졌다.
청룽(왼쪽)과의 즐거웠던 한 때를 보내는 덩리쥔
네 번째는 스물아홉 살 때 만난 말레이시아의 사탕수수 재벌 샹그릴라그룹 총수의 아들 궈쿵청(郭孔丞)이다. 그와는 비밀리에 약혼했으나 궈쿵청의 할머니가 덩리쥔에게 가수 은퇴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서른일곱 살에 만난, 열네 살이나 어린 프랑스 사진 작가 스테판 퓨엘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덩리쥔은 1995년 5월 8일 태국 치앙마이의 메이핀호텔에서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사망했다.
1990년부터 동거 관계에 있던 스테판 퓨엘이 마지막 간호를 했다.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최후였다. 장례식에서 그녀의 관에는 중화민국 청천백일기와 국민당 당기가 덮였다. 국기를 덮어준 것은 당시 총통부 비서장 우보슝(吳伯雄) 등 네 명이었고, 국민당의 당기는 쉬수이더(許水德) 등 네 명이 덮었다.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후이(李登輝)는 ‘예술계에 공헌을 한 인물(藝苑揚芬)’이라는 만장을 내렸고, 국민당은 최고 영예 훈장 화하일등장장(華夏一等 奬章)을 수여했다. 장례위원장은 당시 타이완 성장이었던 쑹추위(宋楚瑜) 였고, 행정원장 롄잔(連戰) 등 고관들이 직접 참석했다.
국장에 버금가는 의식이었다. 전 세계 3만여 명의 팬들이 몰려 애도했다. 묘소는 타이베이시(臺北市) 동북쪽 진바오산(金寶山)의 ‘쥔위안(筠園)’이다. 묘 앞에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했다. 사후 50년 정도까지 생전 모습 그대로 둘 계획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에서도 덩리쥔 사망 이듬해인 1996년 2월 1일 그녀의 사진을 담은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2007년에 작고 12주년 기념으로 아사히방송 단막극 『타이완 가수 덩리쥔』을 제작해 30개 국가에 방송하기도 했다.
마침 올해는 홍콩 반환과 덩리쥔 사망 20주년이다. 20년여년전이나 지금이나 덩리쥔의 노래는 변함없지만 예전에는 꿈을 쫒아 홍콩에 오던 중국 청춘남녀들은 이제 따마(大妈)와 광팡즈(光胖子)가 되어 주머니 두둑히 채운 돈을 소비하기 위해 홍콩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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