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인조 14년) 12월 인조와 신하들이 용골대가 이끄는 청의 대군을 피한 남한산성에서 마주한 질문은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이다. 죽어서 산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며, 살아서 죽는다는 것은 목숨은 지키되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치욕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은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47일간 이 질문을 놓고 벌인 치열한 논쟁과 산성에 고립된 이들이 신분을 막론하고 겪었던 참담한 고난을 그린 작품이다.
<도가니>(2011)와 <수상한 그녀>(2014)로 주목받은 황동혁 감독은 협상을 주장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항전을 주장했던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원작의 문제 의식과 인물 구도를 스크린에 충실하게 구현했다.
영화는 말 안장 위에 앉은 이조판서 최명길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멀찍이 도열한 청나라 군대의 압도적인 위용이 나타난다. 말 한필에 의지해 청의 대군과 마주한 최명길의 모습은 당시 조선 왕실이 처한 고립무원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
전장에서는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펼쳐지지만, 이 영화의 핵심적 긴장은 말과 말이 벌이는 싸움이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항전을 주장하는 김상헌은 임금의 앞에서 서늘한 말의 전투를 치른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최명길)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김상헌)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최명길)
영화는 평행선을 달리는 둘의 설전을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소설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이병헌과 김윤석은 영화로 옮겼을 때 자칫 어색했을 수도 있을 원작의 문어체 문장을 빼어난 대사 전달력으로 소화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가 미세한 표정 하나까지도 명징하게 담아내면서 스크린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영화에서 조선을 무너뜨리는 힘은 적의 공격이 아니라 왕의 우유부단함과 신하들의 무능이다. 인조(박해일)는 식량이 없어 병사들이 굶고 있다는 말에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말아라”고 말한다. ‘얼마나 아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그것까지 내가 정해주랴”고 답한다. 영의정 김류(송영창)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다. 군의 위엄을 위해서는 병사보다 말이 중요하다며 병사들에게 방한용으로 지급한 가마니를 거둬 말을 먹이고는, 급기야 그 말을 잡아 다시 병사들을 먹이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일까지 일어나게 한다. 감독이 용골대나 청 황제, 청나라 병사들을 쓸데없이 야만적이거나 잔인하게 그리지 않은 덕분에 당시 조선이 안으로부터 무너졌음이 더욱 선명하게 강조된다.
영화는 최명길의 길과 김상헌의 길 가운데 특별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은 조정의 명운을 놓고 벌이는 일생일대의 승부이지만,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정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먹이는 일이다. “나는 그 어느 편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는 이런 시각을 웅변하는 인물이다.
김훈은 <남한산성> 개정판에서 “나는 졸작 <남한산성>을 쓰면서 서날쇠가 나오는 대목이 가장 신났다. 그의 삶의 모든 무늬와 질감은 노동하는 근육 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썼지만, 영화에서 서날쇠의 캐릭터는 최명길이나 김상헌, 인조에 비해 평면적으로 그려져 존재감이 떨어진다. 서날쇠 역할을 맡은 고수는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어도 외모에서 빛이 나는 탓에 역할과 겉도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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