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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화가 불러온 중국발 데이터 혁명


중국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했다. 7억7000만명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미국, 유럽을 합친 것보다 많고 이 중 90% 이상이 모바일 사용자다.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25세 이하의 '디지털 원주민'만 2억8000만명으로, 미국의 전체 인터넷 사용자 수에 육박한다. 이들은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소비한다. 영상을 보는 내내 자신의 생각을 입력하고, 그것이 자막이 돼 쉴 새 없이 지나가는 '탄무(弹幕·동영상 댓글 자막)'는 나이 든 사용자가 보기에는 매우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이지만,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1990년대 중반 출생)에게는 환영받는 부가서비스다. 이에 힘입어 동영상 서비스인 '비리비리'는 7000만명 이상의 월간 활동 유저를 확보, 올 초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이 생태계를 바탕으로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의 앞글자를 따 BAT라고 불리는 디지털 드래곤이 등장했다. 특히 텐센트와 알리바바는 각각 시장 가치가 500조원에 육박해 전 세계에서 기업가치 상위 10대 기업이 됐다. 이들이 디지털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BAT는 중국 국내 벤처투자의 40%가량을 차지하며 중국 주요 50개 스타트업 중 절반 이상이 BAT 출신이거나 자본 투자, 자회사 등의 관계로 엮여 있다. 이들은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한 '수퍼 앱'을 제공한다. 알리페이나 위챗은 매년 5~10개의 기능을 추가해왔고, 지불이나 메신저의 단순 기능을 넘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거대한 시장은 새로운 도전자를 잉태한다. 최근에는 토우티아오头条, 메이퇀디엔핑美团点评, 디디추싱滴滴出行의 앞글자를 딴 TMD가 등장했다. 토우티아오는 인공지능(AI)과 머신러닝을 통해 독자가 원하는 뉴스를 추천, 제안해준다. 메이퇀디엔핑은 음식 배달, 식당 리뷰, 엔터테인먼트 티켓 판매 등의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제공한다. 디디추싱은 공유 차량 모델을 기반으로 시작해 자율주행 분야로 영역을 확장 중이다. 이들의 시장가치는 각각 50조~70조원에 이른다.

BAT나 TMD 같은 신조어는 앞으로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한국에는 두어 개에 불과한 유니콘(시가총액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이 중국엔 100개에 육박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기존 리더들에 도전한다. 유통 영역에서는 알리바바와 징둥닷컴이 선두 업체이긴 하지만 최근 핀둬둬가 등장해 업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최대 90%에 달하는 할인을 제공하는 대신 주변의 친구들을 끌어모아 대량 주문을 유도하는 소셜 쇼핑을 통해 약 2억 명에 달하는 유저를 확보했고, 매력적인 가격 덕분에 60% 이상의 고객이 중국의 중소 도시에 분포해 있다. 반면 중국 대도시의 젊은 여성 고객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샤오훙슈는 패션, 화장품, 해외 구매 등의 영역에서 커뮤니티를 형성, 사용자 기반 콘텐츠의 소셜 쇼핑 서비스를 제공한다.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재미난 비즈니스 모델'의 등장, 혹은 투자자들의 맹목적 '돈 잔치'쯤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오산이다. 경제의 디지털화는 초연결, 초지능화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의 기초가 된다. '21세기의 원유'로 불리는 데이터는 디지털화를 통해 생성·축적되고, 알고리즘의 성능 향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덕분에 중국은 AI 분야에서도 앞서간다. 맥킨지 글로벌연구소(MGI)가 분석한 40여 개국의 AI 준비 정도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과 함께 선두그룹으로 분류된다. 전 세계 AI 스타트업 관련 투자 중 절반가량이 중국으로 몰리고, AI 관련 특허와 출판물 수는 미국을 앞선다. 이 같은 환경은 인재 유입의 선순환을 일으킨다. 외국으로 나가는 인재 대비 중국으로 돌아오는 유학생의 비율은 2000년 23%에서 2016년에는 79% 수준으로 증가했다.

2008년부터 중국 정부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해외에 있는 기술자들과 전문가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자동차 구입 시 세금 면제, 거주 특혜 등으로 구성된 글로벌 전문가 채용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포터 연구원과 클라우디아 제이스버거(Claudia Zeisberger) 인시아드 교수는 ‘중국의 벤처캐피털은 실리콘 밸리보다 거대할까(China’s Venture Capital:Bigger than Silicon Valley’s?)’ 보고서를 통해 중국 유니콘의 빠른 성장세에 대해 분석했다. 연구팀은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강한 정부’를 꼽았다. 중국 경제에서 정부의 강력하면서도 안정적인 정책 시행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데, 현재 중국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창업가 정신’ 역시 정부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리커창 중국 총리는 2014년 9월 제8회 다보스 포럼 개회식에 참석해 ‘대중창업 만중창신(大众创业万众创新·모두가 창업하고 혁신하자)’이라는 표어를 제시했다.


유니콘은 기업가치가 10억 달러를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을 일컫는 용어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유니콘은 168개, 이들의 기업가치는 총 6천280억 달러(약 672조 원)에 이른다.

다만 중국의 유니콘들은 실리콘 밸리의 유니콘처럼 시장 점유율 경쟁에 몰두하느라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꾸준히 몰려들면서 펀딩은 무난히 이뤄지고 있다.

중국의 유니콘이 투자자들을 매료시키는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스타트업들의 혁신 노력, 그리고 최신 트렌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광대한 소비자 시장이 결합돼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의 출구가 있다는 것이다.

NGP 캐피털의 폴 아셀 상무이사는 미국 벤처 캐피털의 절반 이상이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에 투자되는 반면에 중국은 소비자 지향 기업들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인수·합병(M&A)이라는 잘 다져진 길 외에도 중국 정부가 지난주 중국주식예탁증서(CDR; China Depository Receipt) 제도의 도입을 발표한 덕분에 스타트업의 선택권은 더욱 넓어졌다.

미국주식예탁증서(ADR)을 모방한 CDR은 해외 상장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알리바바처럼 해외 증시에 상장된 대기업들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기업가치가 200억 위안(30억 달러)를 넘은 비상장 기업도 CDR를 발행할 수 있다.

스타트업들에게 또다른 출구는 알리바바나 텐센트에 사업을 매각하는 것이다. 알리바바나 텐센트는 처음에는 소액 지분 인수로 출발했다가 나중에는 기업 전체를 사들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알리바바는 최근 식품 배달 서비스 회사를 어러머(饿了么,Ele.me)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 실례로, 부채를 포함한 기업가치는 95억 달러로 평가됐다. 알리바바는 인수에 앞선 소액 지분 인수를 '혼전(婚前) 교제'라고 표현했다.

중국 IT공룡들의 출자는 스타트업들에게는 이들이 거느린 거대한 고객 기반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 대가로 스타트업들은 알리바바나 텐센트의 대금 결제 서비스를 통해 자금을 처리한다.

또한 중국 유니콘은 중국 정부의 ‘유별난 편애’를 바탕으로 성장해왔다. 시진핑 주석이 ‘비대칭 전략’을 채택해서라도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며 글로벌 경쟁자의 중국 진입을 막아준 것이다. 중국 기업들은 정부 보호하에 14억명의 인구를 바탕으로 빠르게 기술을 발전시켰다. 인시아드 연구진은 “중국의 거대한 방화벽 때문에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경쟁자는 (중국)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바이두와 텐센트 같은 중국 내 기술 기업들에 축복이었다”며 “바이두와 텐센트가 사용자 기반과 기능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보호 정책 덕분”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아시아 최대 시장인 만큼 글로벌 기업들이 꾸준히 중국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이미 중국 기업들이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려 승산이 없는 상황이다. 최근 구글은 사업을 하고 싶으면 중국의 검열과 규제를 받아들이라는 요구에 ‘백기투항’했다. 반(反)시진핑과 관련한 정보와 톈안먼(天安門) 사태, 소수민족 독립 등과 같은 내용을 검색할 수 없도록 하는 중국의 검열 시스템을 수용한 검색엔진 Dragonfly를 만들기로 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선점효과가 큰 검색 비즈니스 특성상, 이미 중국 검색 서비스 시장 70%를 차지하고 있는 바이두 때문에 구글이 중국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은 낮다. 리옌훙(李彦宏) 바이두 회장은 “구글과 맞붙어도 바이두가 이길 것”이라며 “이제 중국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능력과 자신감이 충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