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선 중국공산당의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이 열린다. 미사일과 전차 부대가 지나가고 보폭을 맞춘 병사들의 분열식도 볼만할 장면일 것이다. 중국의 열병식은 천안문 성루를 빼놓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러시아의 열병식이 크렘린 궁전을 배경으로 하고 프랑스의 열병식이 파리의 개선문을 배경으로 하듯이 말이다.
1948년 9월 중국 대륙을 걸고 국민당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던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결정이었다. 베이징이 신중국의 수도는 그때 결정됐다. 48년 농촌 지휘부 허베이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열린 9월회의 석상에서였다. 1948년 5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중국공산당은 이 마을에 지휘본부를 세우고 전장 상황과 전후 재건 계획을 총괄했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베이징은 파괴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어떻게 나왔나.
당시만 해도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팽팽하게 맞붙고 있을 때였다. 변곡점은 48년 11월에 찾아왔다. 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했다. 만주를 장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창춘 등 만주의 거점 도시들이 철저하게 파괴됐다. 만주를 놓고 붙었던 요심전역에서 공산당이 전세를 뒤집자 국공내전의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 1월31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만주의 중심은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을 확보한 공산당은 위상을 높여 특별시로 지정했다. 당시 만주는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중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 중심 도시가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은 소련과도 가까워 각종 지원과 함께 국민당군에 밀릴 경우 망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였다. 때문에 공산당 주류 일각에서는 내심 하얼빈을 미래의 수도로 구상하고 있었다.
천년고도를 포탄의 잔재와 뒹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당시 베이징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군 총사령관은 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푸쭤이(傅作义)였다. 그의 병력 50만이 베이징과 톈진을 포함한 사방 500㎞에 포진해 있었다. 산하이관(山海关)에서 장자커우(张家口)까지 폭이 좁고 긴 지역들이었다. 푸쭤이 장군은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린뱌오는 그래서 무력이 아니고서는 베이징 장악이 어렵다고 했을 정도였다.
결정적 전기는 톈진 공방전이었다. 어이없게도 하루 만에 끝났다. 1월 14일 인민해방군은 보병·포병·공병과 전차부대를 동원한 연합작전을 펼쳐 톈진을 점령했다. 이제 베이징만 남았다. 25만명이 지키는 베이징을 인민해방군이 포위했다. 당중앙은 선전전과 지하 공작을 통해 푸쭤이를 압박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1월 21일 인민해방군과 푸쭤이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다음날 국민당군 20만명이 교외로 철수했다. 남은 5만명은 해방군에 투항했다.
마오쩌둥 등 공산당 지도부는 전후 재건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어디로 정할지를 놓고 각론을박이 계속됐다. 당시 상황은 베이징일보가 보도한 중국공산당 동북국공작부장이었던 왕자상의 회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마오와 만난 왕자상. 마오는 물었다. “역대 왕조의 수도는 시안 아니면 카이펑, 난징, 베이징이었다. 어디로 해야할 지 결정 못했다.”
“현재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은 지리적적 요건은 좋다. 하지만 역대 정권이 단명했다. 난징은 연해지역에서 너무 가깝다. 현재 국제정세로 볼 때 중대한 결격 사유다. 난징은 안되겠다.” 난징은 아니라고 왕자상이 선택지 하나를 지웠다. 왕자상은 말을 이어갔다.
“시안을 보자. 너무 서쪽에 치우쳐있다 게 결점이다. 현재 중국의 영토는 진한수당 시대의 강역을 넘는다. 당시엔 만리장성이 변경이었다. 현재는 장성이 영토의 배 부분을 지날 뿐이다. 시안은 이제 더이상 중심적 역할을 감당 못한다. 시안은 부적절하다.”
황허의 인접 도시인 카이펑과 뤄양은 어땠을까. 왕자상은 “경제적으로 낙후했고 홍수 등 수재에 취약하다.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고 말했다.
왕자상이 자신의 심중을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했는지 마오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다면 수도로 어디가 좋은가”라고 되물었다.
“베이징은 동북과 산해관내 지역의 목구멍 같은 위치에 있다.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소련과 몽골과 인접해 전쟁의 우환도 없다. 명청조의 수도였기에 민심의 거부감도 적을 것이다.”
마오가 말을 이어받았다.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으로 삼았다. 정치적 기초가 저장의 자본가들이었으니까.” 장제스와 정치적 대척점에 있던 마오는 이렇게 난징을 장제스와 동일시하면서 거부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는 국민당 잔존 세력이 아직 대륙 서남부에서 활동하던 때였다. 여차하면 1920년대 군벌들이 장악하던 북부 중국을 향해 북벌의 진격을 하듯 미국의 힘을 빌어 다시 롤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미국이 과연 국민당과 장제스 지원을 포기할 것인지 불확실했던 시점에서 마오의 수도 선택은 소련의 지원 여부를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1949년 3월 25일 시바이포를 떠나 베이징 시위안(西苑)비행장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군대를 사열하며 공식적인 베이징 입성식을 가졌다. 역사적 고도이자 열병식의 배경인 천안문 성루를 중국공산당이 거머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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