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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사랑하는 대만



현재 대만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1952년 일본과 평화조약이 맺어져 관계가 정상화됐으나 1972년 일본이 중공쪽으로 돌아선 결과다. 그해 9월 일본의 다나카(田中角榮) 총리가 오히라(大平正芳) 외상과 니카이도(二階堂進) 관방장관을 대동하고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던 것이다.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게 됨에 따라 대만과의 관계는 당연히 끊어지게 되었다.

원래 양안이 분단되면서부터 일본은 실리외교 차원에서 대만이 아니라 중공과의 교섭을 원하고 있었다. 다만,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중공이 유엔에서 승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일단 대만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그러다가 중공의 유엔 가입이 이뤄지게 되자 곧바로 중공과의 관계개선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일본과의 민간교류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만과 일본은 단교 뒤에도 민간창구 형식의 이익대표부를 통해 활발한 교류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일본은 재단법인 교류협회(交流協會, Interchange Association)라는 이름으로 타이베이와 가오슝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있다. 사실상 대만주재 일본 대사관 및 영사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대만도 일본에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처라는 명칭으로 민간사무소를 운영중이다. 도쿄와 오사카(大阪), 후쿠오카(福岡)에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오키나와 나하(那覇)와 요코하마(橫濱), 그리고 삿포로(札幌)에 지사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정식 외교관계가 단절된 것과는 무관하게 경제 및 문화 분야의 민간교류는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2005년부터는 양국간에 비자면제 협정도 발효중이다.

특히 무역에 있어 양안관계가 개선되기 전까지는 일본이 대만의 수출 대상국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으로부터는 공산품을 들여오고 일본에는 농산물을 수출하는 구조였다. 사탕수수를 비롯해 쌀, 차, 바나나 등이 주요 수출 품목이었다. 그중에서도 사탕수수는 한때 일본으로 나가는 수출 비중에서 50~60%를 차지할 정도였다.

대만 북부의 타이베이로부터 남쪽의 가오슝까지 345km를 연결하는 고속철도가 일본 신칸센(新幹線) 시스템으로 채택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5천억NT(한화 약 20조원)가 투자되어 2007년 개통된 대만의 고속철도는 일본 신칸센으로는 최초의 수출 케이스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만과 일본의 경제교류가 활발하다는 증거다.

아울러 2011년 일본 도호쿠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대만 국민들이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벌였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대만은 현지에 구조대와 물자를 보냈을 뿐 아니라 적십자를 통해 58억대만달러(약 2,200억원) 이상의 구호자금을 기부했다. 대만 국민들이 해외 재난에 기부한 모금액 가운데 단연 최대 규모이며, 각국 정부가 일본에 보낸 구호기금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액수다. 마잉지우 총통이 부인 저우메이칭(周美靑) 여사와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해 모금 대열에 참가했을 정도다. 지난 1999년 대만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일본이 대규모의 구조대를 파견하고 거액의 성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지난날 청나라가 갑오전쟁에 패배함으로써 대만이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체제를 겪었던 역사적 관계치고는 민족적 감정이 그렇게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대만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특수하다. 과거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 체제를 겪었던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은 위안스카이(袁世凱) 당시 중국에 대해 내몽골의 관할권을 요구했고, 제1차대전 직후에는 산뚱반도의 관할권을 요구했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7년에는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켜 8년 동안이나 중국 국민들을 전쟁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난징 대학살의 기억은 아직도 중국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역사적인 적대관계를 넘어서서 대만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선택하게 된다. 1952년 타이베이에서 제2차대전의 처리문제를 다룬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였다. 미국을 주축으로 반공이념을 표방하는 같은 자유진영의 울타리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명백한 공동의 적국으로 규정된 만큼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를 맞으면서 국제사회의 여건은 일대 변혁을 겪고 있었다. 동서 진영의 긴장이 서서히 완화되면서 외교관계에서도 국익을 앞세우게 됐던 것이다. 중공이 대만 대신에 유엔 가입이 확정된 것이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였다. 결국 일본은 대만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중공을 택하게 됐던 것이다.

오히려 식민지 시절을 제외한다면 일본과의 역사적인 관계에 있어 직접적인 피해자는 대륙이었다. 그런데도 대륙과 일본이 대만을 젖히고 서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서로의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중국 국민들 사이에는 아직 난징 대학살로 인한 앙금이 가라앉지 않고 있으며,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이타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으로 인해 국민감정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대만과 일본의 관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서로 보완적인 입장에 있다. 미국이 대만관계법(TRA)을 배경으로 대만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일본이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2005년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안전보장협의회에서도 공동성명을 통해 “대만해협을 둘러싼 문제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촉진한다”며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중국이 군사 분야에서 투명성을 높이도록 촉구한다는 내용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는 대만해협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자위대가 미군에 협력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유보해 오던 터였다. 하지만 2004년 11월 중국 잠수함이 일본 영해를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서 당시 고이즈미(小泉純一郞) 내각이 ‘신방위 대강’을 통해 중국의 방위력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내는 등 대만해협 상황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됐던 것이다. 최근에는 센카쿠 열도 주변에서 일본과 중국의 군사적 마찰도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