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성(河南省) 북동쪽에 위치하며, 황허강[黄河] 남쪽의 대평원에 있으며 롄윈[连云]~란저우[兰州]간 룽하이철도[陇海铁路] 연변에 위치하는 중국 7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명칭은 전국시대의 대량(大梁) 남쪽 25km 지점에 있는 카이펑읍(邑)에서 유래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위(魏), 5대 10국의 양(梁), 진(晋), 한(汉), 주(周) 및 북송(北宋), 금(金) 등의 왕조가 이곳에 수도를 건립하였다. 위의 혜왕(惠王)이 안읍(安邑)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대량이라 칭하면서 위가 부강해짐에 따라 이곳도 번영하였다.
BC 3세기 말에 위가 망하자 카이펑도 폐허가 되어 한(汉) 이후에는 지방도시로서 존속하였다. 수(隋)·당(唐) 시대에 이르러 강남(江南)개발이 진척되어, 변하(汴河:通济渠)에 의해 대운하와 연락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5대10국의 후량(后梁)은 카이펑에 도읍을 정하고 동도개봉부(东都开封府)라 하였으며, 후진(后晋)·후한(后汉)·후주(后周)도 도읍으로 삼고 동경(东京)이라 하였다. 그후 송(宋)이 도읍으로 정함으로써 일찍이 없었던 큰 발전을 이룩하여 삼중(三重)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가지가 되었다. 명청대(明淸代)에는 허난성의 성도였다. 194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으로 한때 쇠퇴하였으나 금이 지배하면서 변경(卞京)이라는 칭호가 붙었고 뒤에 남경(南京)으로 개칭, 13세기 초에는 국도가 되었다. 원(元) 이후 계속하여 허난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존재하였고, 중화민국 시대에는 카이펑부(府)를 폐지하고 중심지인 샹푸현[祥符縣]을 카이펑현으로 바꾸었다.
“도성의 배수로는 매우 깊고 넓어서 도망자가 그곳에 많이 숨었는데, 도망자들 스스로 그곳을 ‘무우동(無憂洞)’이라고 불렀다. 심지어는 여자를 납치해서 숨겨두기도 했는데, 그곳을 ‘귀번루(鬼樊樓)’라고 한다.”(육유(陸遊)의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사람이 숨어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배수로, 거기서 지내면 잡힐 걱정이 없었으니 도망자들은 그곳을 ‘걱정 없는 동굴’이라는 의미의 무우동이라 불렀다. 저지대인 카이펑에서 1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려면 대규모 배수로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도망자들이 여자를 납치해서 숨겨두기도 했다는 ‘귀번루’는 ‘번루(樊樓)’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번루는 송나라 때 가장 번화했던 술집인 백반루(白礬樓)를 가리킨다. 백반루의 장사가 어찌나 잘 되었던지, 나중에는 이름을 풍락루(豊樂樓)로 바꾸고 확장공사까지 하게 된다. 다섯 채 건물로 이루어진 삼층 높이의 이 술집, 구름다리로 이어진 각 건물이 밤마다 밝은 불빛을 내뿜으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백반루처럼 규모가 큰 술집을 정점(正店)이라 하고 나머지는 각점(脚店)이라고 했는데, 송나라 카이펑에는 72개의 정점이 있었고 각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층빌딩 숲에서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감각이 아닌, 천여년 전 사람들의 감각으로 상상해본다면 송나라 카이펑(開封)은 정말 놀라운 도시였다. 개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술집이 성황리에 운영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송나라 때 중국 인구는 처음으로 1억명을 넘어섰다. 강남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논이 개간되고 이모작 쌀 품종이 개발되면서, 농민들은 잉여 농산물을 내다 팔 수 있었다. 운하를 통해 강남에서 북쪽으로 운송된 곡물의 양은 당나라 때의 세 배에 이르렀다. 카이펑의 엄청난 인구는 이것에 의지하고 있었다. 또한 송나라 때는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화폐 수요가 급증한다. 현금으로 교환 가능한 유가증권의 일종인 교자(交子)를 정부가 발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지폐인 셈이다. 이때가 1023년, 유럽에 비해 7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송나라 경제의 번영을 수치로 말하자면, 당시 전 세계 GNP의 60%를 차지했고 GDP는 유럽의 다섯 배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제력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다. 비단·도자기·종이 등의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고, 인쇄술 덕분에 서적이 널리 유통되어 지식의 보급도 활발해졌다.
송나라의 경제적·문화적 번영은 현재 중국의 자긍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떠올려보자. 종이·인쇄술·화약·나침반을 형상화함으로써, 세계 4대 발명품을 탄생시킨 중국의 문화를 전 세계에 자랑하지 않았던가. 4대 발명품 가운데 인쇄술·화약·나침반은 바로 송나라 때 실용화되었다. 2010년 상하이엑스포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송나라를 조명했다. 중화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말해지는, 상하이엑스포의 중국관인 ‘동방지관(東方之冠)을 떠올려보자. 69m에 달하는 면류관 형태의 중국관이 20m 남짓의 다른 국가관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조공을 받는 천자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바로 이 중국관의 한 쪽 벽 전체를 차지했던 것이 바로 송나라 카이펑의 경관이다. 원작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세로 24.8cm, 가로 528.7cm)를 700배 확대한 디지털 영상은 세계 최고의 문명을 지닌 중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 덕분에 우리는 송나라 카이펑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당나라 창안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방장(坊墻)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108개의 방으로 구성된 창안의 폐쇄적인 구조가 카이펑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송나라 카이펑에서 살던 이들의 삶은 당나라 창안에서 살던 이들의 삶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당나라 창안의 방제를 카이펑의 주거지역에 적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통치의 편의성보다는 경제적 실용성이야말로 카이펑을 지배하는 원리였던 것이다.
<청명상하도>를 보면 길을 향해 문이 난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프랑스 파리보다 인구밀도가 2~3배 높았던 카이펑,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재는 정말 큰 재난이었을 것이다. 중국 최초의 소방 조직인 군순포(軍巡鋪)가 송나라 카이펑에 처음으로 설치된 것도 당연하다. 300보마다 군순포가 하나씩 있었다고 하니, 꽤 촘촘히 분포했던 셈이다. 군순포에 소속된 병사는 화재뿐 아니라 도난과 불의의 사고와 교통질서까지 책임졌다. 소방업무에 경찰업무까지 겸했던 것이다. 화재 예방을 위해서 높은 곳에 세운 망루에는 화재가 났는지 살피는 이가 배치되어 있었다. 망루 아래에는 물통·사다리·밧줄 등의 소방용구가 구비되어 있었다.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카이펑 시내에는 거리마다 가게가 즐비하다. 당나라 창안에서는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장사를 할 수 없었고, 방문의 개폐 시간에 맞춰서 통금 시간 역시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반면에 송나라 카이펑의 거주민은 어디서든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통금 시간은 점차 완화되다가 결국 통금이 폐지되면서 24시간 장사가 가능해졌다. 카이펑에는 6400개가 넘는 가게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상업용 건물이 개인 주택보다 비싸게 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야시장과 새벽시장이 열리는 카이펑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었다. 가게와 술집 앞에는 채색비단과 등으로 장식한 광고판과 간판이 내걸렸다.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서민이 본격적으로 소비의 주체가 된 것이다. 이들의 수요에 맞춰서 카이펑에는 일종의 멀티플렉스가 들어섰다. 와자(瓦子)라고 하는, 오락과 상업이 공존하는 종합 센터가 6곳이나 있어서 서민을 상대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와자에는 찻집과 술집과 음식점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구란(勾欄)이라는 전문적인 공연장도 수십 개나 있었다. 구란에서는 이야기와 노래를 섞은 설창(說唱)을 비롯해 곡예·잡기·연극·마술 등 각종 공연이 펼쳐졌다. 수천 명을 수용할 정도로 큰 규모의 공연장도 있었다고 한다.
송나라 카이펑의 교통·운송 수단 역시 다양했다. <청명상하도>에는 29척의 배, 소·말·나귀 등 73마리의 가축이 그려져 있다. 말을 탄 사람, 가마를 탄 사람, 크고 작은 여러 수레들이 카이펑 시내를 분주히 오간다. 바퀴가 하나 달린 손수레 독륜거(獨輪車)도 꽤 유용한 운송 수단이었던 듯하다. 수레바퀴를 수리하고 있는 가게가 그려진 것을 보면, 오늘날 카센터에 해당하는 서비스업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성밖으로 나가고 있는 낙타의 모습 역시 매우 인상적인데,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상인의 운송수단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카이펑의 생명줄인 변하, 그곳에 떠 있는 배들, 변하 기슭의 번화한 모습,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변하 주변의 장면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홍교(虹橋)’다. 무지개가 걸린 듯하다고 해서 홍교라고 명명된 다리 아래로 화물을 실은 배가 떠 있다. 다리 위는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구경꾼과 행인으로 넘쳐나는 다리, 그 기회를 놓칠세라 행상들이 들어서 있다.
홍교를 비롯해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송나라 카이펑의 경관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바로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이다.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건물을 재현해 놓은 것은 물론이고, 송나라 때의 복장을 한 직원들이 당시의 생활상을 재연하고 다양한 공연도 펼친다. 1998년에 만들어진 이 테마파크는 이제 카이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청명상하원을 둘러보면서 <청명상하도>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청명상하원에 들르게 된다면 저녁에 펼쳐지는 수상 공연을 꼭 관람할 것을 권한다. 무려 700여명의 배우가 동원된 <대송(大宋)·동경몽화(東京夢華)>라는 공연이 펼쳐 보이는 송나라의 화려한 역사에 잠겨 있노라면 70분의 시간이 어느덧 훌쩍 지나간다. 이 공연에서 재현한 것이 바로 <청명상하도>와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서 묘사한 송나라다. 송나라 때의 카이펑은 지하 10m 아래에 묻혀 있지만 <청명상하도>의 그림과 <동경몽화록>의 기록이 당시를 증명해준다. 앞서 소개한 백반루나 군순포 역시 <동경몽화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청명상하도>를 700배 확대한, 상하이엑스포에서 전시되었던 디지털 영상 역시 카이펑에서 관람할 수 있다. 홍콩 기업인 ‘디천(迪臣)발전국제집단 유한공사’가 1억 위안을 들여서 구입한 뒤 이를 카이펑으로 가져온 것이다. ‘디천 엑스포 청명상하 동태관(動態館)’에서 전시 중인 <청명상하도> 디지털 영상(높이 6.5m, 길이 130m) 역시 원작 <청명상하도>와 비교해서 본다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다. 원작의 배경은 낮인데, 디지털 영상은 낮 버전과 밤 버전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밤 버전을 통해 불야성이었던 송나라 카이펑을 들여다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카이펑은 곳곳에서 송나라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1988년에 건설된 송도어가(宋都御街)는 송나라 때의 상가를 모방해서 만든 상업 지구다. 송도어가의 북쪽 끝에는 앞서 소개한 백반루를 복원한 반루(礬樓)가 있다. 송도어가에서 북쪽으로 2km 되는 지점의 고루(鼓樓) 주변은 카이펑의 야시장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청명상하도>를 펼쳐 보고 <동경몽화록>을 읽다 보면, 이토록 번영했던 송나라의 궁궐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송나라 황성의 규모는 당나라 황성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동경몽화록>에 의하면, 풍락루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궁궐이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다. 궁궐과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사설 주루가 들어섰고 궁궐이 내려다보일 정도의 높이로 확장 공사까지 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궁궐이 내려다보였음에도 철거시키지 않은 것 역시 놀랍다. 송나라 궁궐이 당시의 경제력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는 건 확실하다. 예외적으로 진종(眞宗, 송나라 3대 황제)의 경우, 국가의 2년치 세입을 쏟아부어 옥청궁(玉淸宮)이라는 사치스러운 궁궐을 조성하기도 했다. 당시 궁궐터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백성들의 삶터가 철거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은 궁궐은 얼마가지 못했다. 진종 다음의 인종(仁宗) 때 발생한 화재(1030년)로 옥청궁 대부분이 소실되고 만 것이다. 당시 어린 인종을 대신해 장헌(章獻)태후가 수렴청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대신들에게 울며 하소연하면서 궁궐을 재건하고픈 바람을 전달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단호히 반대했다. 그 결과 불에 타지 않고 남은 건물만 겨우 보수할 수 있었다. 이후 송나라의 명군이든 혼군(昏君)이든,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자 백성들의 삶터를 철거한 경우는 없었다. 송나라 백성들이 다른 시대보다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가권력의 절제가 있었던 것이다.
<북창자과록>에는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밤 떠들썩한 음악소리가 들려오자 인종이 궁인에게 묻는다.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냐?” “민간의 주루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폐하, 바깥 민간은 궁중의 적막함과 달리 이토록 즐겁사옵니다.” “너는 아느냐? 궁중이 적막하기에 바깥 백성들이 이토록 즐거울 수 있는 게다. 만약 궁중이 이토록 즐겁다면 바깥의 백성들은 적막할 수밖에 없느니라.”
송나라의 번영을 이끈 인종의 이 일화야말로,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대변하는 것이리라.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인종이 사망(1063년)하자 도성에서는 며칠씩이나 시장을 열지 않았고 거지와 어린아이까지 지전을 태우며 궁성 앞에서 울었다고 한다. 뤄양에서도 시장을 열지 않고 애도했으며, 얼마나 많은 지전을 태웠는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번영했던 송나라는 사회 취약층에 대한 복지에도 힘을 기울였다. 자립할 능력이 없는 과부와 노인과 장애인에게 식량을 지급하고, 병자에게는 약을 주고 치료해주었으며, 죽은 자에게는 장사는 물론 천도제까지 치러주었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했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오중전회(중국공산당 제18차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에서 제시한 5대 발전 이념 중 하나가 ‘함께 누리는(共享) 발전’이었다. 이는 올해 3월에 열린 양회(兩會)에서도 또다시 강조되었다. 승자독식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어느 사회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적 화두인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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