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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군장악의 일등공신

중국 공산당 19대 당대회가 끝나고 가장 주목받는 장군 한 명이 있습니다. 군 출신으로 유일하게 정치국원에 새로 선임된 장요우샤(张又侠,67) 중앙군사위 부주석(상장·대장 격)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중앙군사위 장비발전부장인 그를 군사위 부주석에 발탁하고 정치국원 진입까지 지원한 인물입니다. 이 정도면 시 주석의 군 대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시진핑의 군 장악에 있어 장요우샤의 역할은 유비에게 제갈량과 같은 급이라고 평하기도 하지요.


장은 산시(陕西) 성 웨이난(渭南)이 고향입니다. 그러나 베이징 태생이지요. 시진핑 주석의 고향이 산시성 푸핑(富平)이지만 태어난 곳이 베이징인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시 주석이 관리하는 군내 대표적인 산시방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혁명 원로였던 장쭝쉰(张宗逊·1908~1998) 전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입니다. 마오쩌둥 주석이 가장 존경하고 아꼈던 장군이지요. 역시 시진핑 주석과 같은 태자당(혁명 원로나 당 고위 관료 자녀들의 정치 세력)에 속합니다.

장은 인생 자체가 군인입니다. 18살의 나이에 쿤밍에 있는 육군 14집단군 40사단에 들어가 말단 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1968년) 했지요. 그리고 같은 부대에서 연대장, 부사단당, 사단장(1990~1994년)을 거쳤습니다. 무려 26년간 같은 사단에서 군 생활을 한 아주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한데 14집단군 40사단은 중국 군과 시진핑에게 좀 특별한 부대입니다. 이 부대의 전신은 중국 공산 혁명 원로 중 한 명인 보이보(薄一波·2007년 사망) 전 부총리가 만든 항일 결사 유격대입니다. 훗날 이 부대는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홍군에 편입됐고 오늘날14집단군으로 발전합니다. 보이보의 군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중국 육군 중 최정예 부대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진핑과 장요우샤는 보이보의 부대를 통해 서로의 신뢰를 다졌을까요.

사건은 2012년으로 충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충칭시 서기는 그해 11월 열리는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했던 보시라이였습니다. 보는 기고만장했습니다.

충칭시에 ‘창훙다헤이(唱红打黑·공산 혁명을 찬양하고 조폭을 소탕한다)’ 드라이브를 걸면서 국내외 관심을 독차지했습니다. 보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고 최소한 총리, 아니 시진핑을 제치고 당 총서기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요. 갑자기 사건 하나가 터집니다. 다름 아닌 그의 부인인 구카이라이(谷开来)가 영국인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겁니다. 닐 헤이우드는 보시라이 집안과의 오랜 친분으로 동업 관계였는데 돈 문제 등으로 다툼이 생기자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를 충칭시 안가로 유인해 술에 독을 타 살인한 겁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까지 화장해버립니다.

이 사건은 당시 충칭시 공안국장이었던 왕리쥔(王立軍)에게 보고됐고 왕은 사건 전모를 보시라이에게 보고합니다. 한데 보고를 받던 보시라이가 느닷없이 왕의 뺨을 후려칩니다. 알아서 조용해 처리하면 될 걸 보고한다는 거였습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왕리쥔은 곧바로 쓰촨성 청두(成都)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요청합니다. 물론 보시라이와 관련된 수 많은 기밀자료를 갖고 말입니다. 당시 중국 정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2012년 2월 6일입니다.

왕리쥔이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갔을 때 보시라이는 경찰차와 군 장갑차 수십 대를 동원해 총영사관을 에워싸고 언제라고 공격을 시작할 태세였습니다. 그때 보시라이는 5000 정의 자동소총과 50만 발의 탄약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인 2월 7일 밤 베이징에서 청두로 날아온 국가안전부와 당 중앙 기율검사위 요원, 국방부 장교가 왕리쥔의 신병을 확보해 베이징으로 올라갑니다.

14집단군 포병 훈련 모습 [출처: 바이두 백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보시라이는 다음날 충칭에 주둔하는 부대 일부를 직접 이끌고 군용기 편으로 윈난(云南)성 쿤밍(昆明)으로 날아갑니다. 쿤밍은 충칭시, 쓰촨성, 윈난성, 티베트 자치구 등을 관할하는 청두군구의 주요 기지가 있는 곳이지요. 더구나 쿤밍에는 보시라이 아버지인 보이보 전 총리가 만든 제14 집단군의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보시라이는 14집단군을 자신만의 군대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군의 배경 때문에 보시라이가 충칭에 부임하자 현지에선 중앙도 손쓰기 어려운 ‘서남왕(西南王)’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실각을 우려한 보시라이가 14집단군을 앞세워 쿠데타 모의를 하자 후진타오(胡锦涛) 당시 국가 주석은 곧바로 다수의 군 병력에 쿤밍으로 향하도록 명령합니다. 당시 부주석이었던 시진핑도 즉시 동향인 장요유샤를 찾았다고 합니다. 당시 장은 선양 군구 사령관으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시 주석의 부탁을 받은 장 사령관이14집단군 내 각 부대장들과 병력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26년간 14집단군에서 근무한 장은 부대 내 친분이 두터운 핵심 부대장들을 설득했고 보시라이의 쿠데타는 결국 무산됩니다. 물론 당시 보시라이는 후 주석의 지시를 받은 대규모 부대가 쿤밍으로 진군한데다 핵심 지휘관 대부분이 장요우샤의 설득에 넘어가 쿠데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충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각의 길을 스스로 수용합니다.

이 사건 이후 장은 시진핑 당시 부주석은 물론 후진타오 당시 주석에게도 신뢰를 받는 인물로 급부상합니다. 그리고 시 주석은 집권하자마자 그를 인민 해방군 모든 장비의 현대화를 책임지는 장비부장에 임명합니다. 2015년에는 중앙군사위 장비발전부장에 오르면서 중국군 장비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2013년 6월 중국의 유인왕복선 선저우(神舟) 10호, 2015년 8월의 선저우 11호 발사 성공은 모두 그의 지휘 아래 일궈낸 중국 우주 무장 능력의 현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우주 굴기의 최 전방에 그가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