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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의 끝, 사인방의 체포와 재판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지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은 1976년 10월 6일. 문화대혁명 기간 중 대륙을 한 손아귀에 넣고 요리하던 사인방 중 장춘차오(张春桥), 왕훙원(王洪文),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3명에게 연락이 갔다. 마오쩌둥이 생전에 쓴 글들을 정리한 마오쩌둥선집의 최종 교정본을 승인하기 위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참가하라는 통보였다. 속속 회의장에 도착한 이들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무장병력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같은 시간,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있던 장칭(江青) 또한 연행되었다. 이들은 모두 주요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베이징 북구 친청(秦城)감옥에 수감되었다. 곧이어 중국 전역에서 사인방을 비난하는 선전 문구가 나돌기 시작했고, 각 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사인방의 체포를 축하하는 행진을 벌였다.


재판에 출석한 사인방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칭


하지만 그들이 체포됐다는 소식만 확인됐을 뿐 어떻게 사법 처리 되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1980년 11월. 체포된 지 무려 4년 이상이 지난 후 그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 4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문화대혁명과 관련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들이 파기되거나 아직도 공개되지 않다 보니 정확한 실상은 누구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주변 상황과 피해자들의 증언, 그리고 이후 흘러간 시국의 방향을 보면서 당시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인방의 체포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의 4년은 중국 정치가 큰 혼란을 겪은 시기였다. 겉으로는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청소하면서 서서히 국가를 재건해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1977년 7월 덩샤오핑이 복귀했다. 1년 후인 1978년 8월에 열린 11차 당대회에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과 계급투쟁 이데올로기의 종식을 선언하고 이른바 ‘4개 현대화 노선’에 따라 국가 발전의 아젠다를 제시했다.

1979년 9월에 열린 당대회에서 예젠잉(叶剑英)은 문화대혁명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1949년 이후 가장 가혹한 오류’라고까지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같은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의 오류를 바로잡고 대중을 교육하기 위해서 사인방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라고 발언했고, 이에 따라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조직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사인방 체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화궈펑(华国锋)과 왕둥싱(汪东兴) 등 보수파들은 미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문화대혁명에 반대하고 사인방을 증오한 이들이었지만 덩샤오핑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것 또한 싫었던 것이다. 심지어 왕둥싱은 덩샤오핑을 ‘두꺼비 같은 놈’이라고 욕하기까지 했다.



마오쩌둥이 죽고 사인방에 체포되어 정권이 화궈펑에게 넘어가자, 처음에는 갈피를 잡지 못하던 외신들도 차츰 그가 모든 권력을 잡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1977년 1월 중국 전역의 관공서에 화궈펑의 초상화가 걸렸지만 덩샤오핑 측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1977년 2월 춘절을 맞아 베이징시 외곽에서 쉬고 있던 덩샤오핑을 예젠잉, 리센넨(李先念) 등 원로들이 찾았다. 이 자리에서 원로들은 덩샤오핑에게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라고 선언했다. 며칠 후인 2월 27일 화궈펑은 ‘무릇 마오쩌둥 주석이 내렸던 결정을 우리는 굳건히 유지해야 하며, 생전에 했던 지시는 어김없이 준수되어야 한다’라는 이른바 ‘량거판스(两个凡是)’ 이론을 인민일보에 게재했다. 한데 이 이론을 그대로 따를 경우 사인방을 믿고 권력을 맡긴 것도 마오쩌둥의 결정이므로 그들을 처벌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덩샤오핑 곧바로 반격했다. “우리는 대대손손 정확하고 완벽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전 당과 인민을 지도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정확하고 완벽한’이라는 말에 방점을 둬서, 마오쩌둥이 ‘정확하고 완벽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면서 화궈펑을 비판했다. 그 이후 화궈펑은 덩샤오핑을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노력했지만 이 또한 물거품이 되면서 덩샤오핑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꼿꼿한 자세로 재판에 임하는 장칭

방직공장 경비원으로 출발해 젊은 나이에 권력을 최정점에 섰다가 추락한 왕훙원


마오쩌둥의 경호대장으로 덩샤오핑을 경멸했던 왕둥싱

사인방의 운명도 이때 결정되었다. 1980년 2월 덩샤오핑은 당대회를 소집해서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赵紫阳) 등 젊은 테크노크라트들을 전면에 배치하면서 권력을 집중화했다. 총리로 올라선 자오즈양은 ‘특별기소조’를 구성해서 사인방과 그의 추종세력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4년간의 침묵을 깨고 이들은 재판정으로 끌려 나왔다. 재판정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는데, 실제로 방청권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300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도 재판에 참여했다.

시종일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검찰관과 증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친 장칭과는 달리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등은 대체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과 또한 결정되어 있었다. 장칭과 장춘차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2년간 집행을 유예한다고 했다. 이는 무기징역과 다름없는 효과를 가져온다. 왕훙원에게는 종신형이, 야오원위안에게는 20년형이 선고되었다. 1981년 1월 25일 이 선고가 있기 전부터 중국의 언론들은 이미 유죄를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소 절차도 없었다.


사인방 축출에 따라 수정된 마오쩌둥 장례식 사진. 4인방이 모두 지워져 있다.

1992년 5월 14일, 장칭은 치료를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자살해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왕훙원 또한 수감생활 동안 도진 간암으로 1992년에 죽었다. 야오원위안은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해 소리 없이 지내다가 죽었으며,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사인방인 장춘차오는 1998년 병보석으로 출감해 상하이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살다가 2005년 4월 죽었다.

결과적으로 사인방 재판은 인간에 대한 범죄행위를 단죄한 절차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권력 간의 투쟁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어차피 모든 정치범 재판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