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在/余

중국에서 탄압받는 이슬람


중국 내 이슬람 사원의 철거를 둘러싸고 현지 정부와 이슬람교도 주민들이 충돌을 빚고 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10일 보도했다.

SCMP에 따르면 중국 간쑤(甘肃) 성 닝샤(宁夏) 후이족(回族) 자치구 내 웨이저우 마을에는 지난해 9개의 양파 모양 돔과 4개의 뾰족탑 등을 갖춘 모스크가 완공됐다.

닝샤 자치구는 중국 서북부 황허 중류에 있는 소수민족 자치구로, 이슬람을 믿는 후이족이 주민 630만 명의 34%를 차지한다.

시짱(西藏·티베트), 신장(新疆) 등 다른 자치구와 달리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움직임은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현지 정부가 모스크 관리위원회 측에 이 사원이 당국의 건축 허가를 받지 않았다며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자진해서 철거하지 않을 경우 강제로 철거하겠다는 통보도 했다.

이에 격분한 수백 명의 이슬람교도 주민들은 전날 이 사원으로 몰려들어 당국의 철거 통보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주민들의 항의에 지방 정부는 모스크 전체를 철거하겠다는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고, 9개 돔 중에서 1개만 남겨놓고 나머지 8개를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슬람교도 주민들은 "왜 완공 전에 이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완공된 후에 뒤늦게 이러한 요구를 하느냐"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주민들의 거세 항의에 현지 정부는 철거를 잠시 보류한 채 주민들과 협상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12년에도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서 모스크 철거를 둘러싸고 현지 정부와 주민의 충돌이 빚어져 시위대 중 여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한 사건이 있었다.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서는 최근 들어 이슬람의 흔적을 지우려는 당국의 노력이 더욱 강도 높게 전개되고 있다.

새 모스크는 물론 기존 건축물에서도 이슬람 양식을 상징하는 초승달 장식이나 양파 모양의 돔을 철거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시장, 호텔,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는 더는 이러한 양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스크의 종교 교육에는 금지 조처가 내려졌으며, 상당수 이슬람 학교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이러한 이슬람 흔적 지우기는 '종교의 중국화'를 강조하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주석의 지침을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시 주석은 2015년 당 간부회의에서 "우리는 '중국화한 종교'라는 방향을 추구해야 하며, 종교가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어 2016년 7월에는 불법적인 집단의 침투에 확고한 방어막을 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원래 이슬람교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예민할 정도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무슬림 여성은 얼굴에 베일을 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에게 기독교의 사순절처럼 내면적 성찰과 금욕의 시기인 라마단에 일부 공공장소에서 금식이 허용되지 않는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종교적 압박에서 예외인 경우가 있으니 바로 후이족이다.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는 크게 이슬람교를 믿는 2개의 민족이 있다. 하나는 신장자치구에 있는 위구르족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이족이다. 대략 1000만명 정도로 튀니지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후이족은 위구르족이 중국 정부의 강력한 감시를 받으며 갈등을 이어 가는 것과 달리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다.

이들은 중국이 가장 번성했던 당나라 때인 7세기 중동 지역인 페르시아와 아랍에서 이주한 상인의 후손이다. 이들이 후이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이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중동으로 돌아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중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올 회(回)’를 붙여 후이족으로 불리게 됐다. 이들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중국과 서역의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원나라 때는 서역의 천문학과 의학, 건축학, 음악 등을 중국에 전했다.

특히 후이족이 중국에서 주목받는 것은 최근 중국이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도 관련이 있다. 중국의 콜럼버스라며 당국이 집중 조명하고 있는 명나라 시대 환관 정화(鄭和)가 바로 후이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원래 정화의 성씨는 마(馬)씨였으나 일곱 차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대항해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황제가 정씨 성을 하사한 것이다.

터키계인 위구르족 대부분이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모여 사는 것과 달리 후이족은 자신의 본거지인 닝샤후이족자치구에 모여 살지 않는다. 전체 후이족 중 닝샤후이족자치구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전체의 6분의1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 정부가 이들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이슬람 종파 중에서도 온건 수니파에 속한다는 점도 고려됐다. 시아파가 이슬람 영토와 신념, 기구를 보호하고자 성전에 나설 수 있다는 지하드 개념이 강한 반면 수니파는 이 같은 생각이 비교적 약하다.

후이족 출신인 마퉁 북방민족대 교수는 “후이족이 믿는 종파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전통 종교와 수니파가 합쳐진 하나피 학파에 속한다”고 밝혔다. 하나피 학파는 튀르크족이 토착화한 이슬람으로 전통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 중앙아시아의 전통과 관습, 특히 샤머니즘이 결합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율법을 강조하는 전통 이슬람과 달리 우애를 강조하고 성직자와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이슬람을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때문인지 중국 당국은 후이족의 정신적 고향인 퉁신(同心)을 포함해 닝샤후이족자치구에 모스크 설립을 많이 허가했다. 1958년 1900개에 불과하던 모스크는 현재 4000개로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마 교수는 덧붙였다. 마 교수는 “후이족은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면서 “이들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전 세계에서 차별받고 피해를 당한 일반인과 달리 이슬람포비아의 희생자가 된 적이 없으며 가장 성공한 민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후이족 다수가 온건한 종파에 속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위구르족과 다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구르족은 민족적으로도 터키계와 비슷해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고 이를 사용한다. 심지어 시간대도 다르지만 베이징 시간대에 맞춰 사용한다. 신장이라는 엄청난 크기의 고향도 있다. 이런 것이 중국의 주류 계층인 한족과 분명하게 구분되게 만든다. 이들은 주로 국영기업에서 일하더라도 고위직이 아닌 하찮은 일에 종사한다.

반면 후이족은 한족과 구분이 쉽지 않다. 후이족인지를 알려면 후커우(戶口·호적)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후이족 대부분은 페르시아나 몽골, 또는 동남아시아 상인의 후예로 수세대에 걸쳐 한족과 결혼하며 섞여 있어 중국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위구르족과 달리 중국 전역에 퍼져 살고 있다.

후이족과 중국 사회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여러 방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이족 출신으로 유명한 정화를 비롯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왕정웨이 전 주임도 후이족 출신이다. 국무원 산하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중국의 민족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다. 이렇듯 후이족은 중국의 주류 계층인 한족과의 동화를 통해 중국 사회 곳곳에 진출했지만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들은 1864~1877년 청나라의 지배에 맞서 둥간 반란을 일으켰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양측은 화해했다. 드루 글래드니 포모나대 교수는 “후이족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정치 체제에서 이른바 회색 지역을 찾아내 공산당과 협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만의 역할을 찾아내면서 존재감을 이어 갔다. 중국 내 할랄식품 생산을 장악하는 한편 중국 국영기업과 중앙아시아, 또는 걸프 지역 기업 간의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내 최대 아랍어 학교는 후이족이 설립하고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졸업생 상당수는 통역사로 활약하고 있다.

중국 역시 후이족의 동화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이들에게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시행할 수 있도록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샤리아는 코란 등에 나오는 이슬람의 기본법으로 이슬람공동체의 헌법이며 모든 삶의 정황에 적용된 법이다. 그동안 중국 법체계에서는 샤리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닝샤후이족자치구의 일부 모스크에서는 설교자이자 지도자인 이맘과 법원이 같은 중재 사무실을 이용한다. 이맘은 매주 샤리아법을 근거로 가족 간 분쟁을 조정한다. 중국 사법 체계가 개입하는 경우는 샤리아법으로 조정이 실패한 경우에 한해서다.

후이족이 중국 사회에 편입됐지만 이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후이족은 자신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후이족 전통 식당을 운영하거나 택시 기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마 교수는 “이슬람교가 후이족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한국 축구의 위기  (0) 2019.01.30
양청후 털게  (0) 2018.11.27
시안 등 2선 도시. 인구확대 정책   (0) 2018.07.21
북미회담 경호맡는 구르카 용병  (0) 2018.06.11
중국의 공자학원, 문화적 침략인가  (0) 2018.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