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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제국을 일으킨 여성

그녀의 본명은 '꿩'을 의미하는 '치(雉)'였으며, 기원전 240년 전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녀의 아버지 여문(呂文)은 산동 출신의 유지였는데, 가족들을 데리고 유방의 고향인 패현(현재의 강소성 서주시)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현령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치는 이곳에서 마을의 정장(亭長)인 유방을 만나 그와 결혼했으며 두 아이를 낳았다. 첫째가 후일 노원공주(盧元公主)로 불리게 될 딸이고, 둘째가 황제를 계승하게 될 유영(劉盈)이었다.
그들의 결혼과 관련해서 유방이 후일 큰 인물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본 여문의 관상술과 신비한 예언가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중국 역사의 이러한 신비주의는 새로운 왕조에 대한 필연성과 정당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추가되거나 과장된 서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 기술에서 이러한 부분을 제거한다면 유방과 여치는 결혼 이후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살았으며, 유방은 가정에 그리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풍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방을 후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상황은 진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이었다. 유방이 이에 가담하게 된 계기는 그의 투철한 정치의식이 아니라 일종의 사고가 원인이었다. 진나라 말기는 진시황이 여러 해에 걸쳐 자신의 능을 축조하던 시기였다. 이때 죄수들은 모두 사역에 동원되었는데, 이 사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유방은 정장의 직무 중 하나로 죄수들을 호송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이 죄수들 중에서 상당수가 도주하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자 죄수들을 전원 석방하고 자신도 멀리 도망쳤다.
이 석방된 죄수들 중 오갈 데가 없기에 유방을 따라 나선 십수 명이 최초의 부하들이자 혁명동지들이었다. 여기에 소하(蕭何)와 같은 어릴 적 친구들이 가세하고 진시황의 폭정에 신음하던 농민들이 합류하면서 세력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유방은 졸지에 고향에서 패공(沛公)으로 옹립되면서 이 지역에서 반란군의 지도자가 됐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여치의 일가도 모두 유방의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유방이 서초패왕 항우(項羽)에 의해 한왕(漢王)으로 세워지면서 그 이름을 천하에 알리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마흔을 넘긴 때였다. 이때부터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방은 항우와 치열한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때에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훗날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여치는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나누어 가진다는 내용으로 일시적인 화친을 맺게 되자 비로소 가족들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 된 계기가 바로 이 화친의 약속을 믿고 군사들을 철수한 초나라를 공격해서 거둔 결정적인 승리로, 항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한 해하(垓下) 전투였다. 이때가 기원전 202년으로 유방은 마흔다섯이었고, 여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거의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기간 중 항우는 '우(虞)'라는 여인 단 하나만을 사랑해서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후일 중국의 경극 중 〈패왕별희(覇王別戱)〉로 사람들이 심금을 울리며 영원히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승자인 유방에게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척희(戚姬)라는 여인이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하며 혁명과 전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8년간이나 유방과 함께 전선을 누빈 혁명동지이기도 했다.
척희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유영이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여의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다고 한다. 유방은 태자인 영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보류한 적이 있어, 여후(呂后)에게 척희 모자는 목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여후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長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
여후의 성품은 유방의 공신들을 처리하는 일에서 잘 나타난다. 원래 공신이라는 사람들은 대업을 이룰 때까지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들이지만, 일단 일을 이루고 나면 더없이 성가시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인물들이다.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향 친구인 소하는 재상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재사 장량은 최종적인 승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장 한신(韓信)이 있었다.
한신은 유방이 항우에게 밀릴 때 그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냈으나 그러한 유방의 처지를 이용해서 억지로 한왕(韓王)의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이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은 스스로 은퇴하고 소하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불평불만이 많았다. 한신의 군사적인 능력을 두려워했던 유방은 그를 제왕(濟王)에서 초왕(楚王)으로, 다시 회음후(淮陰侯)로 봉호를 깎은 다음 4년간이나 수도 장안에 억류시키고 견제했지만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황후였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했다. 유방과 한신은 혁명 중에 서로에게 맹세하기를 "하늘과 땅을 보며 죽게 하지 않고 쇠붙이 무기를 보며 죽게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였지만, 여황후는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한신을 죽일 때 자루를 씌우고 대나무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다.
개국공신들에 대한 그녀의 과감한 조치는 한신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은 전쟁영웅인 양왕(梁王) 팽월(彭越)의 차례였다. 백성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팽월은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던 길에 우연히 여황후를 만나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고향으로 은퇴해서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요청했다. 여후는 일단 그를 낙양에 데리고 온 다음 유방에게 그의 신병처리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리고 여후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다. 그녀는 팽월을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삼았다. 그의 뼈와 살로 육젓을 만들어 각 제후들에게 보내어 엄중하게 경고한 것이다.
한신이나 팽월 같은 개국공신들을 처단한 일은 새로운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조치라고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그녀는 사악하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유방은 정말로 반란을 일으킨 개국공신 영포(英布)와 전투하던 중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으며, 이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유방이 가장 경계한 것은 바로 여황후의 권력욕과 냉혹한 성품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제후와 군신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고 백마를 잡아 하늘에 예를 올린 다음 그들로부터 두 가지 조건에 대한 맹세를 받았다.
첫 번째는 유(劉)씨가 아니면 왕(王)으로 봉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운 공이 없으면 후(侯)에 봉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 두 가지 사항을 위배하는 자들은 모든 제후와 군신들이 연합해서 응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유방이 죽은 후 제후와 군신들의 맹세도 한갓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유방이 죽고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연적인 척부인에게 오랫동안 칼날을 갈아왔던 그녀는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팔다리에 수갑을 채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어 두고 곡식을 빻는 고된 노동을 시켰다. 당시 여의 왕자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져 임지인 하북(河北) 지방에 나가 있었다.
여태후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의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심성이 착했던 황제는 자신이 아예 성 밖으로 나가 어린 동생을 맞이하고 항상 그를 곁에 두면서 어머니의 음모로부터 보호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태후가 아니었다. 여러 달이 지난 겨울날 새벽,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 태후는 여의를 독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여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척부인이 여태후를 원망하자 그녀는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보복했다.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를 멀게 하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척부인을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 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날 이후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면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여태후는 아들의 방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자신의 일가인 여씨들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왕족인 유씨들을 철저하게 경계했다. 제거하기 어려운 왕족들에게는 여씨 일가의 딸들을 시집보냈다. 백마를 잡으면서 유방에게 한 맹세는 철저하게 무시되었으며, 천하는 여씨의 수중으로 들어가 왕족들은 숨을 죽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여태후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천륜을 거슬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황제 영은 자신의 친누나인 노원공주가 낳은 딸 장 씨를 왕후로 맞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셈이었다. 또한 황제의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을 황후가 데려와 키우게 하고 생모들은 모두 죽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어머니로 인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지 못했던 황제는 스물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에게는 혜제(惠帝)라는 이름이 추증되었다.
혜제의 뒤를 이어 그가 후궁으로부터 얻은 두 아들이 차례로 허수아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첫째가 유공(劉恭)이었는데, 4년째 제위하던 어느 날 자신의 친어머니가 태후 장 씨가 아니라 할머니인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어느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을 품었다. 이 사실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소년 황제를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 그 다음이 유홍(劉弘)이었는데, 이 소년 역시 4년 정도 재위했다. 유공과 유홍은 모두 소제(少帝)라고 부르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들의 재위 8년을 한나라의 역사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은 해부터 약 16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칠순을 넘기자 여 씨 일족의 무궁한 영화를 위해서 모든 병권을 자신의 형제와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황후 역시 일가의 아이들 중에서 골랐다. 그녀가 죽으면 자신의 통치를 피로 씻어내고자 하는 유씨 일가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80년 어느 날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갔던 여태후에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덤벼들어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녀는 병에 걸렸으며, 여태후는 그녀가 독살했던 유여의의 귀신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하며 두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희망과는 달리 그녀가 죽은 후 여씨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씨 일가는 모든 병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왕족들과 제후들과 군신들이 일시에 봉기하자 불과 며칠만에 무너진 것이다.
제후들은 유방의 아들들 중에서 유항(劉恒)을 새로운 황제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크게 낮추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문제(文帝)이다. 그의 어머니는 박희(薄姬)라고 불리던 여인이었는데, 원래는 항우와 동맹을 맺어 유방에게 끝까지 대항했던 위왕(魏王)의 애첩이었다. 그녀에게는 내세울 만한 집안 배경도 없었고 황궁에 있을 때에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태후에게 질린 제후들은 권력을 쥐어도 보살펴야 할 일가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그녀를 새로운 태후로 선택했던 것이다.
여태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외척정치를 실시하고 피바람을 일으켰지만,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원래 한 고조 유방은 유학을 멸시하고 도교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후일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라며 유학자들을 중용하기는 했지만, 도교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여태후는 유방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계승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했다. 그녀의 시대에 한(漢)이라는 새로운 왕조는 백성들에게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자신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기는 하다. 여기에 통치자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정통성을 중요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통치의 결과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