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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일의 여성황제

중국 역사 속에는 무려 550명 정도의 황제가 존재하는 데, 이들 중에서 여성은 측천무후 단 한 사람뿐이다.
그녀는 당나라 개국공신 무사확(武士彠)의 둘째 딸로 원래 이름은 조(照)였다. 무조의 탄생과 관련해서도 어김없이 원천강이라는 신비한 관상가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무사확은 개국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목재상이었다가 수 양제 시절에 실시된 대규모 운하공사로 돈을 많이 벌어 관직을 샀던 사람이다. 그는 당 고조(高組) 이연(李淵) 휘하에서 무기를 보급하고 관리하는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

무사확은 14인의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나 출신이 미천해서 다른 공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고조 이연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그가 상처를 하자 수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양달(楊達)의 딸을 그의 후처로 중매했다. 무사확은 사천 지역의 절도사로 있을 때 문제의 둘째 딸 조를 낳았으며, 그녀에게는 언니 이외에도 원상(元爽)과 원경(元慶)이라는 전처 소생의 두 이복 오빠가 있었다.
무조는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출중한 미모와 총명함으로 소문이 났다. 아버지 무사확은 그녀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공부를 시켜 말 타기와 활쏘기, 춤과 노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특히 시를 짓고 글을 쓰는 데 대단히 능했다고 한다. 당시는 당 태종 이세민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貞觀之治) 말엽으로 황제는 진정으로 사랑하던 황후 장손(長孫) 씨를 잃고 그 후유증으로 어린 소녀들을 탐닉하던 때였다.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무조의 소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의 나이로 황궁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비빈이 아니라 아주 품계가 낮은 단순한 재인(才人)의 지위였다.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명문귀족에 끼지 못하는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궁에서 미랑(媚娘)이라고 불리게 된 무조가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책읽기를 좋아하고 시와 서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 이세민은 그녀를 황실의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이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책이었다. 이로써 무미랑은 독서와 학문을 즐길 수는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2년 동안이나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도 아이를 얻지 못했으며, 품계도 궁에 들어올 때의 재인 그대로였다.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무(武)씨 여인이 이씨 자손을 시해하고 천하를 얻는다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예언설에 대한 신빙성은 별로 없다.
다른 하나는 천리마 사자두(獅子頭)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세민은 서역에서 이 말을 공물로 받았는데 성질이 하도 사나워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무미랑이 나섰다.
"이 말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물건만 있으면 된다. 억센 채찍과 쇠망치와 날카로운 검이 그것이다. 우선 채찍으로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내리친다. 그렇게 해서 굴복하지 않으면 쇠망치로 머리통을 내리친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면 검으로 목구멍을 가르면 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기겁을 했겠지만, 이것 역시 그녀의 사악한 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후일 첨가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서술보다 무미랑이 이세민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유로 가장 그럴듯한 기록은 '대단히 아름답고 총명하기는 했지만 애교가 부족했다'라는 것이다. 자고로 예쁘고 똑똑하지만 뻣뻣한 여성은 그리 큰 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당시의 이세민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황제 이세민의 건강이 악화되자 무미랑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황제가 죽으면 아이를 낳지 못한 궁녀들은 모두 출가해서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 당시 황실의 법이었다. 그런데 절망 속에서 아주 조그만 가능성이 보였다. 그녀에게 두 번째의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태자인 이치(李治)였다. 당시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후 깊은 병에 들었다. 무미랑은 병석에 누운 이세민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러 온 태자가 무미랑에게 반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태자 이치는 원래 태자감이 아니었다. 그는 몸이 약하고 성격이 유약했으며 애당초 황제가 되어 천하를 얻겠다는 야심도 없는 인물이었다. 다른 유력한 왕자들을 제치고 그가 후계자로 결정된 데는 개성이 강한 군주를 피하고자 했던 혁명동지들에 대한 이세민의 정치적인 배려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황제 이세민과 승상이자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중심으로 하는 중신들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전혀 황제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태자가 되었던 것이다.
심약한 이치는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고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자 몹시 불안해하면서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황실에서는 침전 바로 옆에 태자의 방을 마련해 그가 머물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시기에 태자와 무미랑은 어느 정도 서로 교감을 나누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세민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쉰한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미랑은 법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했다.
태종(太宗)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세민의 첫 번째 기일이 돌아오자 황제가 된 이치는 예불을 올리기 위해 감업사를 찾았으며, 이곳에서 비구니가 된 무미랑과 일 년 만에 재회했다. 그녀는 이날이 마지막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 이치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감업사에서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으며, 태자 이치는 그녀보다 세 살 아래였다.
연인과의 밀회를 위한 황제의 감업사 행차가 잦아지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에서는 무미랑의 환속과 재입궁을 추진했다. 당시의 황후인 왕(王) 씨는 개국공신 왕인우(王仁佑)의 딸이었는데, 이치의 네 부인 중 하나인 숙비 소(蘇) 씨로 인해서 골치를 썩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무미랑은 황제와의 밀회 일 년 만에 다시 입궁했다. 이번에는 소의(昭儀)의 직급이었는데, 황제의 공식적인 여인 121명 중에서 여섯 번째 서열이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무 소의(武昭儀)는 노련하게 처신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궁에 들어왔던 총명한 열네 살의 소녀는 험난한 황궁 생활 12년과 고독한 산사에서의 2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 처세에 능수능란한 스물여덟 살의 괴물로 바뀌어 있었다. 무 소의는 자신이 다시 입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황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왕 황후와 소 숙비의 암투에서 황후의 편에 섰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관들과 궁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황제 이치는 이미 무 소의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입궁해서 바로 다음해에 아들 이홍(李弘)이 태어나자 숙비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황후의 입장에서는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형상이었지만, 무 소의가 워낙 노련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 소의가 얻고자 한 것은 황제의 은총이 아니라 무한한 권력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황후의 자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와 황후는 태자 시절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무 소의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필요했다. 무 소의가 낳은 두 번째 아이는 딸이었다. 이 어린 공주는 매우 예쁘고 귀여워서 황후를 비롯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후가 이 아이를 보고 간 다음 갑자기 이 아이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황후가 조금 전에 다녀갔음을 알게 된 황제 이치의 분노가 폭발했으며, 황후 폐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정사가 아닌 야사에서는 무 소의가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이불로 덮어 질식해 죽게 했다고 하지만, 사건의 현장에는 무 소의 혼자 있었으니 진위를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후일 그녀가 보여준 잔인함이나 포악함으로 판단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황제와 중신들이 모여 폐위를 논의하고 있는 왕 황후는 위국공(魏國公)의 딸이었다. 그러한 여인을 폐하고 무 소의를 황후로 봉하겠다는 황제의 의도는 난관에 봉착했다. 무 소의가 황제의 뒤에서 발을 내린 채 논의 과정을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이세민이 수나라를 타도하고 천하를 얻게 만든 장본인인 장손무기와 재상인 저수량(楮遂良)은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특히 저수량은 무 소의가 비천한 출신인데다 한때 선왕인 태종의 여인이었으므로, 그런 여인을 황후로 임명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며 이마에 피가 흐를 정도로 땅바닥을 머리를 찧으며 읍소했다.
"저런 자를 어찌하여 때려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분노한 무 소의가 참지 못하고 발 뒤에서 소리쳤다. 저수량은 목숨을 잃을 처지였지만, 다른 공신들이 나서서 그를 변호하여 간신히 호남(湖南) 지방의 장사라는 시골로 좌천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황제는 공신 이적(李積)에게 판결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적은 황후를 폐하거나 다시 봉하는 일은 전적으로 황제의 개인적인 일이며, 그러한 문제는 중신들이 동의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결국 무 소의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황후가 되어 야심을 이룬 무 태후에게 달콤한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다.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황제 이치와는 달리 그녀는 단호하고 엄정한 성격이었다. 황후의 책봉을 반대했던 중신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이루어져, 스무 명이 넘는 원로들이 좌천되었고, 이들의 의장 격이면서 황제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장손무기는 유배를 당한 후 강요에 의해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장손무기의 경우는 나약한 황제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니 인과응보였다고 할 수 있다.
황제 이치는 정신적으로 나약했을 뿐 아니라 몸까지 허약했기 때문에 점차 무후에게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되었다.이러한 와중에도 무후는 아이들을 연이어 낳아, 어려서 죽은 딸을 제외하고도 슬하에 모두 4남 1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순서대로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이었으며, 딸 하나는 후일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 태평공주(太平公主)였다. 무 태후는 태자인 이충(李忠)을 폐하고 자신의 큰아들 이홍을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황제 이치는 무후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녀의 전횡이 심해지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재상인 상관의(上官儀)를 은밀하게 불러 황후를 폐하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큰일이 무 태후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무 태후는 황제에게 호소했고, 마음이 약한 황제는 모든 책임을 상관의에게 떠넘겼다. 상관의는 폐위된 태자 이충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모반을 도모했다는 모함을 받아 이충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가족들은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무 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두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북문학사(北門學士)를 설립했다.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었으므로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기관이기도 했지만, 무후는 이 기관을 통해 문인과 학자들로 구성된 두뇌집단을 확보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서 배출했다. 이 북문학사 출신들은 무 황후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시행했던 갖가지 정책에 대한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했으며, 후일 그녀가 황제로 등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집단이었다.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본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무 황후의 야심은 황제 이치가 생존해 있던 시절부터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황제 이치를 천황(天皇)으로 올리면서 자신은 천후(天后)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절대 권력을 향한 가장 큰 장애물은 역설적으로 이충을 대신해서 태자가 된 아들 이홍이었다.
천성이 너그럽고 겸허하면서도 심지가 굳었던 이홍은 황제와 중신들의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황제는 그에게 가능한 한 빨리 양위하기 위해 열 살을 갓 넘긴 시절부터 이홍을 조회에 참석시켜 정치적 감각을 키워 주었다. 태자 이홍은 장성하면서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어머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무후의 입장에서는 머지않아 권력이 자신의 손에서 떠나 아들에게 가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빤했다.
이 상황에서 무후는 잔인한 선택을 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독주를 마시게 한 것이었다. 태자 이홍이 독살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심약한 황제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그는 국사를 거의 돌보지 못할 지경이 되자 둘째인 이현(李賢)을 태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양위를 하려고 했다. 이현은 영리하고 책읽기를 좋아해 상당한 지식을 쌓았을 뿐 아니라 그의 형만큼이나 탁월한 능력과 함께 강건한 기백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후는 이현에게 여러 번 경고를 보냈지만 태자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모자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자 무후는 사람들을 사주해서 태자가 사생활이 문란할 뿐 아니라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동궁을 수색하자 마구간에 숨겨진 수백 종류의 무기가 발견되었다. 황제에게는 이러한 음모를 막을만한 힘이 없었다. 태자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파주에 유폐되었고, 4년 후 황제 이치가 죽자 두 달 만에 살해되었다.
둘째 아들 이현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무후에게는 손자들이었지만, 후환을 두려워했던 그녀는 이 세 손자들을 황궁 깊숙이 유폐했다. 권력은 모정에 우선한다. 최소한 무 황후의 경우에는 그랬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두 아들을 살해하고 어린 손자들을 유폐했던 것이다.
주로 병석에서 지내던 황제가 마침내 죽자 절대 권력을 향한 측천무후의 도전은 순풍에 돛을 올린 셈이 되었다. 병약했던 황제 이치였지만, 장장 35년이나 제위에 있었다. 그는 죽고 나서 고종(高宗)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태자인 셋째 아들 이현(李顯)이 황제 직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중종(中宗)이다. 그는 원래 아버지처럼 심약하고 야심도 없는 인물이었으며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은 날은 단지 55일이었다. 자신의 장인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한 일이 무후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녀는 셋째 아들을 유폐시키고 막내아들인 이단(李旦)에게 황제의 지위를 넘겼다. 이 사람은 후일의 예종(睿宗)이다. 이런 지경이니 이단은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허울뿐인 황제였다. 고종이 죽었을 때 측천무후의 나이는 이미 예순한 살이었는데, 권력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점차 도가 심해졌다.
무씨 친족들이 득세하면서 황족들과 원로대신들을 밀어내고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했다. 황제가 어리거나 무능할 때 태후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야 흔했지만, 스스로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일은 분명히 반역행위였다. 황후가 점차 왕조를 탈취하는 길로 들어서자 당연히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원로들은 물론 근왕병들의 움직임까지 심상치 않은 가운데 드디어 반란이 일어났다.
중종의 폐위를 계기로 측천무후에 의해 좌천되었던 유주사마(柳州司馬) 서경업(徐敬業)과 고종의 신하였으나 측천무후가 부상하자 조정을 떠났던 저명한 문장가 낙빈왕(駱貧王)이 주축이 되어 양주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 십만의 병력이 되었다. 승상인 배염(裵炎)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보다는 이를 계기로 무후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측천무후에게는 최대의 위기였지만 유능한 장군들 덕분에 무장봉기는 40여 일 만에 진압되었으며 극심한 혼란은 수습되었다. 무후에게는 이 위기가 오히려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승상 배염을 사형에 처하면서 조정을 자신의 조카인 무승사(武承嗣)를 비롯한 충성스러운 측근들로 채웠다. 일단 위기를 넘긴 무후는 정권 탈취의 과정을 착착 진행시켰다.
그녀가 서적 편찬을 위해 세운 북문학사는 어느새 비공식적이지만 막강한 권력기관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곳에서 《성씨록(姓氏錄)》을 발행해서 보잘 것 없던 자신의 무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조작하였다. 그녀는 무씨 5대조를 왕으로 추증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길 계획을 세워 낙양의 이름을 신도(新都)로 바꾸었으며, 그곳에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여 궁궐을 지은 후 명당(明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 환관 한 사람과 공모한 승려 법명(法明)이 〈대운경(大雲經)〉이라는 새로운 경전을 지어 무후에게 바쳤다. 이 경전에는 미륵불이 측천무후로 현신해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후는 불교의 미륵불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이름자를 바꾸었다. 원래 그녀의 이름은 '세상을 비춘다'라는 의미의 '조(照)'였다. 새로운 한자는 그 발음과 뜻은 그대로였지만, 해와 달이 합쳐진 '밝을 명(明)' 아래에 '허공 공(空)' 자를 쓰는 것이다. 미륵불이 환생하면서 하늘에 뜬 해와 달처럼 백성들에게 광명을 준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황제의 뒤에 쳐져 있는 발을 들어 올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앉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정권의 탈취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황실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중종 이현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자는 명분을 세워 당 고조의 열한 번째 아들 이원가(李元嘉)와 이정(李貞), 이충(李沖) 부자 등 황족 일가의 반란이 전국각지에서 산발적으로 터졌다. 그렇지만 지난 서경업의 난으로 단련이 된 무후는 이십여 일 만에 손쉽게 전국의 반란을 제압했다.
마지막 결정적인 하늘의 뜻은 작은 조약돌을 통해서 전해졌다. 무후가 가장 신임하는 조카 무승상은 옹주 출신의 강동태(剛同泰)라는 인물이 낙수라는 장소에서 신비한 돌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신기하게도 그 흰색의 돌에는 예언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성모께서 사람들 사이로 내려오셔서(聖母臨人)
영원히 번창할 제업을 이룰 것이다.(永昌帝業)
무후는 이 조약돌을 보도(寶圖)라고 이름 짓고, 발견 장소인 낙수에 커다란 절을 창건했다.
또한 그녀는 새로 건축한 낙양의 새 궁전 명당의 이름을 만상신궁(萬象神宮)으로 짓고, 신궁의 대전 무성전(武成殿)에서 황제 이단이 '성모신황(聖母神皇)'이라는 존호와 함께 '신황지새(神皇之璽)'라는 새로 만든 옥쇄를 자신에게 바치도록 했다. 이제 황제가 모후에게 양위를 하는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될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시간 문제였다.
이때 부유예(傅游藝)라는 관리가 수백 명의 지방 관리들을 대표해서 태후의 제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무후는 그 청을 거절하면서도 부유예를 승진시켰다. 그러자 비슷한 내용의 상소가 빗발치면서 무려 육만 명이 넘는 관리, 귀족, 승려, 일반인 등등 갖가지 사람들이 이에 참여했다.
당의 제3대 황제 고종(高宗) 이치가 죽고 나서 6년 후 드디어 무씨 왕조가 새롭게 탄생했다. 무후는 공자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고대의 주(周)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고치고 주나라의 문왕(周文王)을 시조로 삼았다. 무후의 아버지 무사확은 태조(太祖)로 추존되었다. 반면 황제인 이단은 황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황사(皇嗣)로, 황태자 이성기(李成器)는 황태손으로 강등되었다.
무후가 세운 주나라를 원래의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후주(後周)라고 부른다. 이때 무후의 나이는 예순일곱이었으며, 당나라는 고조 이연이 왕조를 창업한 지 72년 만에 일단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이로써 황실인 이씨는 급속히 몰락하고 무씨의 세상이 되었다. 무후의 조카인 무승사와 무삼사(武三思)를 비롯해 열 명이 넘는 일가들이 이씨 일가를 대신해서 군왕 이상의 직위에 봉해졌다.
여인의 몸으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측천무후는 공포정치를 통해서 정권을 유지했다. 그녀의 가장 기발한 발상은 밀고 제도를 체계화했다는 사실이다. 밀고를 받아 처리하는 전담부서를 만들었으며, 먼 지방에서 오는 밀고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각 역에서는 역마를 제공했다. 밀고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접견했으며, 밀고한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면 밀고자에게 녹봉을 내리거나 관리로 발탁했다.
밀고와 관련한 심문에 대한 대비도 철저했다. 그녀는 잔혹한 성품을 가진 자들만 발탁해서 이들에게 심문에 관한 업무를 전담토록 했다. 이들 중에서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가혹한 고문기법을 개발하고 새로운 고문도구를 발명했다. 일단 그들의 손아귀에 잡히면 죄가 있건 없건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했다. 밀고 한 번에 수백 명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이러한 혹리(酷吏)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져 갔다.
무후의 목표는 명확했다. 정권을 탈취당해 불만이 많았던 황족들이 자연스럽게 밀고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일단 반역의 혐의로 감옥에 갇히면 모진 고문이 기다리고 있어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후의 집권 초기에 황족들에 대한 집중적인 숙청이 이루어지자 당의 고조, 태종, 고종, 세 황제가 남긴 수십 명의 아들 중에서 무후의 소생인 중종 이현과 예종 이단만 남게 되었다.
물론 이 밀고 제도로 인해서 황족뿐 아니라 그들과 연관된 중앙과 지방의 관리 수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모진 고문을 당한 다음 멀리 유배를 가야 했다. 불과 이삼 년 사이에 측천무후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이와 함께 조정에는 인사 적체가 완전히 해소되고 젊은 피가 수혈되는 계기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민심을 잡은 방식도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것이었다. 그녀는 악명 높은 혹리들 중에서 먼저 주흥을 제거했는데, 이 일처리를 혹리의 좌장격인 내준신에게 맡겼다. 주홍은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반의 죄를 자백한 후 처형되었다. 그 다음은 내준신의 차례였다. 주홍이 죽고 나서 얼마 후 측천무후는 내준신에게 폭정의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하면서 그의 일가까지 모두 멸했다.
측천무후는 포퓰리즘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악명 높은 혹리들을 처형하자 민심은 일단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 정책은 포퓰리즘의 핵심이었다. 그녀는 관직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스스로를 추천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조칙을 내렸다. 이론적으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관리가 되어 녹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단지 구호에 그치지 않았고, 무후는 실제로 관리들을 지방에 파견해서 과거에 응시한 경험이 없는 선비들과 현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을 추천하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추천받은 사람들은 정식 관리는 아니었으나 일단 시관(試官)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임용했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시관이 정식 관리로 발령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는데, 현대적인 인턴 제도와 유사한 시스템을 수백 년 전에 이미 시행한 셈이었다.
원래 기득권 세력의 권력 세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어떠한 사회체제 아래서나 발생하는 문제이다. 과거 제도는 이러한 병폐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아무리 과거 제도가 공정하게 운영된다고 해도 교육의 기회가 많은 명문가 출신들이 그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래서 과거 제도는 결국 기득권 계층을 보호하는 일종의 사회적 장벽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무후가 관직에 대한 문호를 실질적으로 개방하자 명문가들이 독점하고 있던 조정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출세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출신 집안이나 배경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이 우선시되었다. 측천무후 시절은 적인걸(狄仁杰), 이소덕(李昭德)과 같이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될 명신들이 등용되고 활동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무후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개방해서 인심을 얻었다. 이러한 제도는 왕국에 기초한 봉건체제의 중국 사회가 거대한 관료기구에 의해 움직여지는 체제로 재편되어 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었다. 비대한 관료조직에는 엄청난 유지비용이 소요되며,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관리가 되어 토지로 봉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민주적인 기본적인 원칙이 실현된 것이지만, 먼 후일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불건전한 형태로 변모하게 될 중국식 관료체제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측천무후는 철저한 숙청작업과 포퓰리즘을 통해서 정치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독하고 불안한 날이 연속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였겠지만, 무후는 개인적인 삶의 상당 부분을 남자들에게 의존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녀가 음탕한 요부였다고 매도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호색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것이다. 사실 무후를 중국사에서 별로 이름을 남기지 못한 보통 황제들의 호색행각에 비교한다고 해도 대단히 정숙한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측천무후는 말년에 황궁 내에 공학부(控鶴府)라는 기관을 두고 스무 살 안팎의 미소년 일흔두 명을 모아 자신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공학부는 무후가 색을 밝혔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것은 황실에서 비전되었다고 하는 방중술의 일환으로, 역대 황제들이 어린 여자들과 성 관계를 함으로써 그들의 기운을 빌어 젊음을 유지했다는 채음보양(採陰補陽)의 상대개념인 채양보음(採陽補陰)의 비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무후는 늙지 않기 위해서 결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법이 실제로 효험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무후는 일흔이 넘었을 때에도 그녀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한 외모가 시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피부가 일품이라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십 대 소녀와 같은 탱탱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년의 미소년들을 제외한다면 무후가 마음을 열었던 남자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으며, 모두 순정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남자 복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인물은 풍소보(馮小寶)라는 한량이었는데, 이 사람은 고향에서 죄를 짓고 도주해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에서 중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백마사는 무후가 비구니 자격으로 머물고 있던 감업사와 인근한 절이었다.
무후와 풍소보는 이 시절에 만나 친하게 지낸 적이 있으며, 수십 년 만에 고종의 고모인 천금공주(千金公主)의 소개로 재회했다. 무후는 환속해서 장사를 하고 있던 풍소보에게 설회의(薛懷義)라는 이름을 주고 다시 출가하도록 한 뒤 백마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설회의는 황실의 불교 행사를 주관한다는 명목으로 황궁에 자유롭게 출입했으며 태사(太師)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그는 만상신궁의 건축 책임자이기도 했으며, 이 건축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설회의는 원래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만방자한 성격이었다. 무후의 총애를 받자 기고만장했으며, 무후의 사생활까지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녀 그녀의 수심이 깊어졌다. 그러자 어머니의 근심거리를 알게 된 외동딸 태평공주(太平公主)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했다.
무후의 다음 남자는 사람 됨됨이는 쓸 만했다. 어전 시의(侍醫)였던 심남료(沈南蓼)라는 인물로, 무후와 비슷한 연배의 신중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후의 주치의로 정성을 다해 그녀를 보살폈으며, 그러는 와중 정신적인 교감이 생겼다. 그는 무후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무척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어서 무후가 정신적으로 상당히 많이 의존했지만 좋은 친구 사이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였다. 그의 신체는 이미 쇠약해서 육체적으로 무후를 만족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형제는 명문가 출신으로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외모도 준수할 뿐 아니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부와 권세를 가지고 있던 바람기 많은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한량들이었다.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던 이 낙양의 유한부인 그룹의 리더가 바로 태평공주였다. 그녀는 상당히 영리했지만 못 말리는 바람둥이로 공식적인 결혼만 세 번을 하면서 무후의 골머리를 썩였는데, 그녀가 이들 형제를 무후에게 추천했다.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는 공학부에 소속되어 무후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이 형제가 무후의 시절 말년을 어지럽히게 되는 원흉들이다. 무후의 나이가 여든을 바라보자 그녀의 판단력이 현저히 흐려졌고, 장씨 형제들이 무후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학부 소속의 미소년들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정사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한편 측천무후의 말년에 살아남은 두 아들 중에서 셋째인 중종 이현은 유배되어 있었으며, 막내인 예종 이단은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전락해 권력의 핵심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다. 이단 대신 무후를 보좌한 사람들은 두 조카인 무승사와 무삼사였다. 특히 무승사는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고 있었으며, 이단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태자의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무승사가 후계자로 굳어지는 듯한 분위기에서 무후 자신이 발탁한 두 명신 적인걸과 이소덕이 무후를 찾아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들과 조카 중에서 누구와 더 친하십니까?"
이 질문에 무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이현이 유배되어 있던 곳으로 사람을 몰래 보내어 그를 은밀하게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사 이단은 스스로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중종 이현이 다시 황태자로 복귀하자 조카인 무승사는 크게 실망해서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무후는 자신의 소생인 이현과 이단, 태평공주 삼 남매와 무씨 일가를 한데 모아 천지신명에게 화평을 서약하게 하고 이를 쇠판에 기록해서 사관에게 보관하도록 했다.
측천무후의 후계 문제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자 정국이 안정되고 천하는 태평했다. 이때가 무후의 나이 일흔다섯 살이었다. 공학부가 설치된 시기는 그 다음해이며, 미소년들이 득세를 한 것은 무후의 나이 여든이 되어 그녀가 병에 걸렸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 이전에도 무후가 장씨 형제를 귀여워하면서 그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자 그들의 권세에 기대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지만, 무후가 앓아눕자 장씨 형제는 다른 중신들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 형제 중에서 동생인 장창종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 천자가 될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점술가를 몰래 황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이 장차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냈다. 이 위기는 무후가 병석에서 일어나 한 달 만에 수습되었지만, 무후는 중신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장씨 형제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무후가 다시 병석에 눕자 이번에는 중신들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재상 장간지(張柬之)와 최현위(崔玄暐), 환언범(桓彦範)과 같은 중신들은 모두 무후가 발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군사들을 동원해서 장씨 형제가 걸어 잠근 황궁의 문을 부수고 침전까지 들어가 장씨 형제를 살해하고 무후에게 양위를 요구했다. 그리고 황태자였던 중종 이현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측천무후의 20년 정권도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중국사에서는 '오왕의 정변(五王政變)'이라고 부른다.
측천무후는 '오왕의 정변'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무너져 병석에 여러 달 누웠다가 임종을 맞이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한 시도를 했다. 자신의 존호에서 '황제'를 빼고 '측천대성황후(側天大聖皇后)'로 부를 것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에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그녀는 이와 함께 자신의 정적이었던 왕 황후와 소 숙비의 일족들, 자신이 처단했던 고종 조의 신하들인 저수량, 한원, 유상 등의 일족들을 모두 사면하라는 유언도 함께 남겼다.

측천무후의 유언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신의 능 앞에 세우라고 했던 무자비(無字碑)이다. 아무것도 적어 넣지 않은 이 거대한 비석만큼 중국의 사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업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에게 맡긴다는 의미였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고 있다.
외교와 군사 측면에서는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그녀 이전 세대에 고구려를 정복해서 세웠던 안동도호부 전역을 그녀의 통치 시절에 대조영이 세운 신생국 발해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지만, 발해와는 선린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돌궐(突厥)이라고 부르던 튀르크와도 우호 관계를 유지해서, 튀르크가 그동안 당나라 큰 위협이었던 키탄(거란)까지 대신 제압해 주는 외교적인 성과를 올렸다. 이로써 당나라 입장에서는 동쪽 지역의 근심거리를 완전히 해소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자어로 토번(吐藩)이라고 불리던 서방의 고대 티베트 왕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정책을 고수해서 결국 티베트 왕국을 정복했다. 티베트의 정복은 막대한 부가 창출되는 서방 교역로를 독점했다는 의미였다. 이는 곧바로 괄목할만한 경제부흥으로 이어졌다.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그녀는 기존의 경제 체제를 잘 유지했을 뿐 아니라 경제가 낙후된 각 지방에 대해서 '농업과 양잠업을 중시하고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한다'라는 단순한 경제 원칙을 세우고 이를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따라서 이러한 지방의 관리들에게는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주어졌다. 농지를 개간해서 경작지가 넓어지면 포상을 받고 파격적인 승진이 가능했으나 호구 수가 줄어들면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부역과 세금 감면 정책을 통해서 유랑민들을 정착시켰다. 그러자 당나라 전체의 호구 수는 65퍼센트 이상 늘어났다. 그 시대의 호구 수는 곧바로 국부(國富)를 의미했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것이다.
초기에 티베트 정복을 위한 막대한 전비가 재정에 부담되었으나, 동서 교역로의 확보는 장기적으로는 크게 남는 장사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무후는 새로운 황궁인 명당과 함께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면서 재정을 낭비한 과실도 있지만, 호구 수가 증가하면서 경제 규모 자체가 커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세금 부담은 그녀 이전의 태종이나 고종 시절보다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후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논쟁의 핵심은 항상 정치적인 측면과 이와 연관된 윤리적인 문제였다. 그녀는 피의 숙청을 통해서 권력을 창출했다. 언제라도 정권에 도전할 수 있는 황실의 직계 손들은 대부분 희생되었는데, 그중에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인간적인 잔인한 모정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황족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유배되거나 노비 계급으로 전락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생은 어디까지나 권력층 내부의 일이었지 일반 백성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며, 오히려 국가 전체로서는 득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당나라는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것도 아니었고, 민중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어려운 과정을 통해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서 세워진 나라였다. 때문에 건국 초기에 개국공신들에 대한 정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후의 잔인한 숙청은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기득권 세력이 와해된 것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부담으로 유지되는 계급이 줄어든 것이었다. 또한 무후의 통치 시절은 지배를 받기만 하던 사람들에게도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시대였다. 결국 그녀에 대한 평가는 '선정을 베푼 찬탈자'라는 평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측천무후의 '음탕함'을 비난하는 역사가들의 견해는 편협한 것이다. 공정한 입장이라면 역대 중국 황제들의 음탕함을 동시에 비난해야만 한다. 남자 황제들이 자기의 딸이나 손녀 또래의 여자들을 수백 명씩 불러들여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유독 무후의 남성 편력을 비난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측천무후는 550명에 달하는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 유일무이한 여성이지만, 엄연히 '황제'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