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대선에서 민진당에 참패한 중국국민당(국민당) 내부에서 쇄신론이 분출하고 있다. "몰락" "절멸" 등의 단어를 써가며 위기감을 토로하는가 하면, 중국과의 교류를 강조해온 기존 당론에 대한 자성도 나오고 있다. 대만 내 반중(反中) 정서가 커진 상황에서 더 이상은 이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01년 정당이 생존의 기로에 섰다는 말도 나온다.
국민당은 2016년 대선에 이어 지난 11일 열린 대선에서도 득표율 40%를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같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진당 의석수(61석)의 절반을 조금 넘는 38석에 그쳤다. 국민당 커즈언(柯志恩) 의원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민당은 노선·정책이 모호하고 무기력하다"며 "이번에도 깨어나지 못하면 역사의 먼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당은 1919년 '중국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쑨원이 중국에서 창당했다. 1925년 쑨원이 숨지자 장제스가 당을 이끌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해 장제스와 지지 세력은 대만으로 이주했다. 이후 대만에서 반세기 가까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민진당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 끝에 1996년 총통 직선제가 도입됐고, 2000년에 첫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그런데 이번에 또 연거푸 대선에서 패하면서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대만 언론은 국민당 쇠퇴 원인으로 젊은 유권자의 반감을 꼽는다. 국민당은 대만의 경제 성장을 이뤘고,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선 이후에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했다. 외성인(外省人,중국 대륙에서 이주해온 사람)이 주도한 국민당은 혈연·문화에 있어 중국 대륙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왔다. 하지만 2014년 4월 대만에서 일어난 해바라기 운동(葵花学运, 중국·대만 서비스 무역협정 체결 반대 학생 시위), 지난해 홍콩 시위를 거치면서 커진 젊은 층의 반중 정서를 읽지 못했다.
고질적인 내분도 국민이 등 돌린 원인으로 꼽힌다. 이번 대선에서도 '대만의 트럼프'라는 평가를 받던 아이폰 제조업체 '폭스콘' 궈타이밍(郭台銘) 회장이 대선 당내 경선에서 한궈위 까오슝시장에게 패배하며 탈당, 친민당의 쑹추위 (宋楚瑜)후보를 지원했다.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늙은 정당이 된 것도 문제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후보들의 평균 연령은 민진당이 51세인 반면 국민당은 63세였다. 현 국민당 지도부는 마잉주(马英九,69) 총통(2008~2016년) 시절 인사들이 주류다. 우둔이(吴敦义,71) 국민당 주석은 1973년 시의원을 시작으로 40년 넘게 시장, 국회의원, 행정원장(총리 격), 부총통 등을 지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유학하거나 변호사, 기자 등 전문직으로 활동하다 정계에 진출한 당내 소장파들은 세대교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3선의 국민당 장치천(江啓臣·47) 의원은 13일 국민당 지도부인 중앙상무위원을 사퇴하면서 "왜 국민당이 시대와 동떨어지게 됐는가를 철저히 토론해야 한다"며 전면적 세대교체를 주장했다. 장제스 전 총통의 증손이자 장징궈 전 총통의 손자인 장완안(蔣萬安·41) 의원도 "국민당이 두 번의 총통 선거에서 패한 상황에서 개혁 논의를 늦출 수 없다. 개혁은 핵심 지도부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했다.
당내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진 '92 공식(共识)' 등 대중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쏟아지고 있다. 92 공식은 1992년 중국과 대만 민간기구들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양측이 각자 다른 명칭을 쓸 수 있다'고 합의한 것을 말한다. 국민당은 양안(两岸,중국과 대만) 관계가 안정돼야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 가능하다며 92 공식을 지지해왔다.
하지만 국민당 내 40대 인사들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요수후이(游淑慧·43) 타이베이시의원은 12일 "이번 투표로 92 공식이 사람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됐다. 맞지 않는 옷은 고쳐야 한다"고 했다. 쉬위런(許毓仁·41) 의원도 "이번에 처음 투표한 118만명 가운데 70%가 반중에 가깝고 4년 후에는 이런 사람 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한편 대만 국민당 우둔이 주석이 총통선거와 입법위원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국민당은 이날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우 주석의 사퇴안을 처리한 뒤 당 주석 보궐 선거 관련 일정 등을 논의한다고 밝혔다. 우 주석의 임기는 2021년 8월까지로 그가 물러나면 국민당 당헌에 따라 4월 15일 이전에 보궐선거를 마쳐야 한다.
국민당 지도부의 이번 퇴진에는 선거 참패와 관련해 조기 퇴진을 요구하는 소장파의 압박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장치천 입법위원 등 국민당 소장파들은 당 혁신 차원의 중앙상무위원직 사퇴를 발표하면서 우 주석에게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가 총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대만 이티투데이는 지난 12~13일 만 20세 이상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당 선거 참패의 책임이 우둔이 주석에게 있다는 응답이 39.8%로 대선 후보였던 한궈위 가오슝 시장(35.5%)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특히 우 주석이 중앙상무위원회의 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무려 78.2%에 달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여론조사에서 차기 주석 후보를 묻는 질문에는 주리룬 전 주석이 30.4%로 1위를 차지했고, 이어 장완안 입법위원(13.2%), 한궈위 시장(9.1%), 마잉주 전 총통(4.8%) 등의 순이었다. 국민당 차기 주석은 이달 중순 공고를 거쳐 2월 초 후보자 등록을 마친 뒤, 3월 초 당원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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