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역에 이동 제한령이 내려진 가운데 북부 토리노에서 가족이 아파트 발코니에 나와 프라이팬 등을 두드리고 있다. 베란다에는 연대를 뜻하는 무지개 그림에 '모든 것이 다 잘 뒬 거야'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안드라 두토 베네'를 적어서 걸어뒀다. '고난이 있어도 끝내 이길 것'이란 뜻이 담긴 플래시 몹이다. 이탈리아는 코로나19로 전국이 봉쇄되면서 일정 시간에 지역 주민이 발코니에 나와 노래, 방수, 환성으로 서로 격려하는 '플래시 몹'이 유행하고 있다. 이탈리아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이탈리아는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와 함께 G7(주요7개국) 회원국인 선진 국가다. 경제 지표를 보면 윤택한 나라다. 2019년 명목금액 기준 국제통화기금(IMF) 추산치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 규모는 1조9886억 달러로 세계 8위다. 미국(21조4394억 달러)·중국(14조4140억 달러)·일본(5조1544억 달러)·독일(3조8633억 달러)·인도(2조9355억 달러)·영국(2조7435억 달러)·프랑스(2조7070억 달러)의 다음이다. 브라질(l조8470억 달러)·캐나다(1조7309억 달러)·러시아(1조6378억 달러)·한국(1조6295억 달러)가 이탈리아의 뒤를 잇는다. 6030만 이탈리아 국민의 1인당 GDP는 3만2946달러다.
이탈리아는 경제지표는 물론 의식주에서 높은 삶의 질을 자랑한다. 이탈리아의 음식문화는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이탈리아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중해식 식사’의 핵심을 차지한다. 올리브유와 정제하지 않은 곡물, 풍부한 채소와 허브, 그리고 과일과 포도주로 이뤄진 이탈리아 식단은 ‘건강식’의 대명사로 통한다. 국민 건강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인 기대여명은 82.7세로 유럽에서 스페인(83.0세) 다음가는 장수국가다. EU 평균(80.6세)보다 높다.
이탈리아는 멋진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패션산업을 운영한다. 이탈리아 패션은 멋쟁이의 상징이다. 이탈리아는 음악·미술·문화유산·자연경관에서도 세계의 부러움을 산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관광대국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찾고 싶은 나라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55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다. 세계관광기구(UNWTO)의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이탈리아에는 6210명의 외국인이 찾아 프랑스(8940만)·스페인(8280만)·미국(7960만)·중국(6290만)에 이어 세계 5위의 관광대국이다.
이런 이탈리아에서 왜 코로나19가 급속히 번졌을까? 우선 의료 시스템을 살펴보자.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전 국민은 물론 외국인 거류자에게도 ‘보편적 의료복지’를 제공한다. 정부가 세금으로 의료기관에 의료비를 지급해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무료 진료를 누린다. 고비용·특수 진료와 약제비, 그리고 치과 진료만 개인이 부담한다. 1978년 이러한 국가건강서비스를 시작했으며 가정의 주치의 제도도 두고 있다. 의료비의 77%가 공공의료에 쓰인다. 의료 공공화의 살아있는 모델이다. 보건학적으로 이상형에 가깝다. 이탈리아는 의료 제도에서도 선진국이다. 하지만 제도가 번듯하다고 운영도 매끄러운 건 아니다. 이탈리아 의료비에서 개인부담 비율은 23%로 EU의 15%보다 8%포인트가 높다. 개인 부담이 높다는 것은 마음 놓고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보건학에서 의료 시스템은 자유방임형과 재정형, 보험형, 절충형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탈리아는 재정형에 무게를 둔 절충형이다. 상당수 유럽 국가가 이런 모델을 따른다. 절충형 중에서도 개인 부담이 높은 것이 이탈리아 의료제도의 특징이다.
재정적자 부담에 의료비 지출 EU 평균보다 10% 적어, 보건의료에서 이탈리아의 아킬레스건은 의료비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의료비 지출이 비교적 적은 나라다. 2015년 유럽연합(EU)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2502유로로 EU 평균인 2797유로보다 10%쯤 적다. GDP의 9.1%를 의료비로 지출해 EU 평균 9.9%보다 낮다. 보건의료 종사자들에게 다른 나라에 비해 넉넉한 급여를 주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개인 부담이 데서 볼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국가와 의료복지 시스템은 비슷하지만 재정을 충분히 투입하지 못하는 데서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가 의료복지에 충분한 돈을 쏟지 못하는 데는 사정이 있다. 이탈리아의 총 국가부채는 2018년 말 기준으로 GDP의 132.2%에 이른 것이 한 이유다. 유럽연합(EU)은 1997년 전체 회원국이 채택한 안정·성장협정(SGP)에 따라 공공부채(정부+공공기관 부채)를 GDP의 60%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권고한다. 이탈리아는 이를 2배나 넘으며, 유로화를 쓰는 유로 존에선 그리스 다음으로 높다. 그간 포퓰리즘 정책을 폈든지, 재정 운용을 방만하게 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EU는 지난 몇 년 동안 이탈리아의 정부 예산안의 재정적자 폭을 줄이라고 압박해왔다. 2019년 4월 이탈리아 정부는 애초 2.4%로 잡았던 2020년도 재정적자 규모를 EU의 압력으로 0.36%포인트를 줄인 2.04%로 낮췄다. 애초 예산을 더욱 삭감했다는 이야기다. EU 집행위원회가 유럽이사회에 ‘초과 재정적자 시정절차(EDP)’에 착수하도록 권고하겠다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EDP는 회원국에 재정적자 수준을 EU 기준에 맞춰 예산안을 수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최고 GDP 0.2%에 이르는 거액의 제재금을 물릴 수 있는 제도다. 2002년 포르투갈, 2005년 그리스에 EDP를 적용한 사례가 있으나 최종적으론 협상으로 해결됐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재정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유럽연합(EU)의 기준에 맞춰 정부예산을 지난 몇 년간 대폭 깎을 수밖에 없었다. 공공의료기관의 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이탈리아 전국의 병원 등 의료기관 758개소가 문을 닫았다. 인력도 대폭 감축됐다. 이탈리아는 의사가 약 5만6000명, 간호사가 약 5만 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코로나19 사태를 맞았다고 이탈리아의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지적했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3.99명으로 전체에서 중상위다. OECD 1위인 오스트리아(5.18명)나 스위스(4.30명)독일(4.25명)보다는 적지만 프랑스(3.37명), 미국(2.61명), 한국(2.34명)보다는 많다. 이탈리아의 간호사는 인구 10만 명당 19.99명으로 적은 편이다. 스위스(199.88명), 한국(99.85명), 미국(61.68명)은 물론 독일(54.49명), 프랑스(61.68명), 영국(30.92명)보다 현저히 적다.
이탈리아에서 눈여겨 볼 또 한 가지는 고령화다. EU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비율은 21.7%다. EU 평균인 18.9%보다 높으며 회원국 중 최고다. 전 세계적으로 일본 바로 다음이다. 기저질환자나 고령자는 아무래도 면역력이 떨어져 코로나19에 걸렸을 경우 사망 확률이 높다. 이탈리아 국립보건고등연구원(ISS: Istituto Superiore della Sanità)의 실비오 브루사페로 원장은 이탈리아 코로나19 사망자의 평균 연령이 81세라며 이들의 3분의 2는 기저 질환자라고 밝혔다. 브루세페로 원장은 전국 봉쇄 조치가 북부의 코로나19가 남부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탈리아는 전국을 봉쇄했지만 국경은 닫지 않고 있다. 유럽 26개 회권국끼리 국경개방을 약속한 솅겐 조약 가입국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 등 이웃나라도 출퇴근 등으로 국경을 지나는 사람을 통제하지 않고 있다. 오스트리아가 무감염 확인증을 요구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의 국경개방도 코로나19 확산의 이유라고 하기가 힘들다.
중국과의 밀착 관계에서 이유를 짐작하는 사람도 있다. 이탈리아는 G7 회원국 중 유일하게 2019년 3월 23일 중국과 일대일로 양해각서(MOU)에 서명해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북동부의 트리에스테와 북서부의 제노바 항구를 공동 개발하고 이탈리아 기업이 중국 사업에 대거 진출하기로 약속했다. 이탈리아와 중국은 2020년을 ‘문화·관광 교류 촉진의 해’로 삼고 지난 1월 로마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하자 중국의 왕이(王毅)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3월 10일 이탈리아의 루이지 디 마이오 외교장관과 통화하고 마스크 지원과 의료팀 파견 의사를 밝혔다. 중국 의료진은 이탈리아에 도착해 국제적십자위원회 이탈리아 지부에 마스크를 기증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로마제국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고 미식의 천국이기도 한 이탈리아는 중국인의 인기 관광지다. 지난해 600만 명의 관광객이 이탈리아를 찾았다. 2018년과 비교하면 100만 명, 약 20%가 늘어난 숫자다. 이탈리아의 첫 코로나19 확진자도 중국인 관광객이다. 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따르면 1월 23일 밀라노로 이탈리아에 입국한 중국 우한(武汉)에서 함께 온 중국 관광객 부부가 북부 지방에서 중부 로마까지 버스로 계속 여행했다, 그러다 1월 30일 로마의 국립감염질환연구소 병원에 입원했으며 31일 확진을 받았다. 이탈리아 정부는 즉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이탈리아와 중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편을 중단시켰다. 2월 6일에는 중국 우한에 살다 송환된 이탈리아인이 확진 판정을 받아 3호 확진자가 됐다. 하지만 우한에서 온 확진자들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줄줄이 발생한 감염 클러스터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를 밝혀줄 고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나 중국계 주민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이탈리아에는 유럽 통계상 32만 명, 합법·비합법 거주자를 합하면 40만이 넘는 중국인과 중국계 주민이 거주한다. 이 중 70%가 중국에서 다량의 확진자가 나온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 출신이다. 이들은 대부분 북부 롬바르디아주 밀라노와 토스카나주 프라토에 몰려 산다. 밀라노에선 무역업 종사자가, 프라토엔 섬유업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은 편으로 이탈리아와 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도 감염 확대의 배경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왜 이렇게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지고 희생자도 많은지에 대한 확실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밀라노대학 연구팀이 바이러스가 지난해 10월에서 11월 사이 이탈리아에 퍼졌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감염 확대를 저지해야 할 정부가 초기 대응에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사태가 커졌다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왜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가 급속 확산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한 방역 책임을 따지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서 높아지고 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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