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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원하고 혁명에 지치다

중국인들은 1911년 청 제국의 몰락으로 전통 질서가 더는 현대 세계에서 온존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통치는 청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진 중화민국 정부조차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분명 중국 연안, 유라시아의 내주지역은 외주지역과의 무역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상해는 근대도시가 되었고 자본가와 지식인 그룹이 성장했다. 하지만 내륙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과 빈곤에 신음하고 있었다. 토지 개혁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으며 군벌들과의 허약한 연합정권이었던 장제스 정부는 중국 전역에 토지 개혁, 대규모 국민교육과 인프라 확충 등을 실시할 정치적 역량은커녕 의지조차도 의심받고 있었다.

그 자리를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기민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강서 소비에트와 연안의 공산당 해방구 등에서 토지개혁 프로그램들을 실행한 홍군은 중국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원하는 의제를 제시하여 지지를 끌어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토지개혁이 있었다.

내륙의 공산당원, 농민, 도시의 노동자들을 바탕으로 한 공산당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중화민국 정부보다 적었을지라도 조직력은 비교를 불허했다. 또한, 그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손문 이래로 실질적인 발전을 못 하고 있던 모호한 삼민주의보다 훨씬 명확했다.


사회적인 힘을 정치적인 역량으로 전환시킨 공산당 정부는 1949년을 ‘신중국’ 원년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해방의 비극이 이어졌다. 만년 지하정당이던 공산당은 처음에는 자유주의자, 중화민국의 구 관료, 자본가와의 협치가 필요했으나 통치역량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들과 권력을 공유하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삼반운동, 오반운동, 반우파운동이 이어졌으며 1956년이 되면 중국은 토지개혁을 완료하고 농업의 집단화(중국에서는 집체화라고 한다)를 완료했으며, 소련 기술자들이 세워준 거대한 중공업 단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외주지역과의 무역이 차단되었음을 의미했다.

분명 공산당 정부는 민국 정부에서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성과들을 이루었다. 토지개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매우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제거한 뒤 국민교육과 공공보건을 시행하였고 빠른 속도로 철도를 비롯한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이런 방식은 공산주의 개발모델의 특징이었으나 아무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폭넓은 지지와 동원능력, 조직능력을 확보한 곳에서나 가능했다.

하지만 그 혼란이 문제였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이 되자 중국의 상황은 정말로 심각했다. 소련이 세워주고 간 공장들은 외주지역, 특히 가까운 일본의 공장과 비교해보자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도시민들은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농촌은 식량이 부족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졌다. 바로 외주지역, 과거 자신들을 침략했던 나라들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1978년 3중 전회에서 덩샤오핑과 천윈은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 이제 중국은 폐쇄적인 공산주의 경제를 탈바꿈하기를 원했다. 처음에 관료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덩샤오핑은 일본,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외국 자본을 투자받아서 경제적 활력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선 이념보다는 실용주의가 앞서야 했다. 최측근인 완리가 수행한 포산도호 정책, 즉 자영농을 부활시키는 정책으로 중국은 식량 부족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사적 거래를 풀어주자 향진기업, 개체호 등을 중심으로 시장에 드디어 물건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동성 선전에서 중국은 처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좋은 정책은 있을 수 없는 법이었다. 국영기업과 연계된 당의 보수파 고위관료들은 개혁개방이 철저히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경제의 개방이 정치의 개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개혁개방이 진행되면 진행되어 갈수록 정치, 경제적 자율성을 원하는 수많은 사회집단의 힘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80년대는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가 중앙고문위원회를 무대로 하는 주도권 다툼의 시대였다.

이 중에서 총서기 후야오방과 후임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이 후임으로 점찍어둔 개혁파의 수뇌였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보수파의 공격에 취약했으며, 덩샤오핑이 추진한 정책 실패를 이들이 독박 쓰는 일도 흔했다. 또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개방도 추진했기에 이들은 더더욱 당내의 공격에 취약했다. 덩샤오핑도 여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기에, 때로 자신이 직접 이들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1988년 가격개혁이 도화선이 되어 번져나간 학생시위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엄청나게 격화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덩샤오핑은 이런 것까지 용납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오쯔양은 실각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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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전방위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소련이 멸망해 그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정당성과 비전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하여 개혁·개방기를 거치며 성장한 중국 사회의 힘이 한 번 좌절당하자 당국의 통치 정당성도 위태로워졌다.

원로 간부들도 때마침 세상을 떠나고 있었고, 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을 보여줘 중국 고위 간부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는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로 이어졌다. 자신이 개혁개방을 통해 이뤄낸 성과를 직접 중국 전역에 보여주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한 최후의 정치적 액션이었다. 이것으로 보수파는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진정한 ‘신중국’이 시작된다.


이런 이유로 1978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을 덩샤오핑으로 선정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덩샤오핑은 지금의 중국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를 만드는 데도 엄청나게 이바지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서 덩샤오핑과 라이벌이었던 천윈은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골자로 하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실책으로 추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은 건국 시 이룩한 대업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오욕을 씻어내고 인민들에게 적어도 안정과 나아가서는 부를 쥐여줘야만 정권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인민들은 더는 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새로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보상을 해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더하여 마오쩌둥 통치는 마오쩌둥 사후 국가의 발전 방향성을 제시할 리더십의 구성에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당내 강경 좌파들이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정치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조리 쓸려나갔다는 점에 있다. 4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화궈펑도 없어졌다. 2세대 지도부는 이로써 국가를 정상화하고 개혁개방을 밀어붙일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두 번째는 포스트 마오쩌둥으로 거론될 명망 있는 원로 고위간부 그룹들의 인적구성에 씻을 수 없는 손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도시 지하 노동자 조직을 이끌던,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던 류사오치나 명망 있는 군 지휘관 펑더화이는 모욕을 받고 비참하게 죽어야 했다. 만약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대신 1956년, 중국이 당시 마지막으로 누렸던 안정된 시기로의 회귀를 주장했을 것이다. 실제로 천윈을 비롯한 보수파 간부들은 어느 정도 이를 바라고 있었다.


사후(1987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국 건국의 아버지 4인으로 뽑히지만,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의 표적이 돼 결국 1969년 비극적인 삶을 마친 류사오치.

하지만 덩샤오핑은 자신이 키워낸 개혁개방파의 지지를 동원하고, 본인의 당과 군의 고위간부들을 두루 포괄하는 친분과 명망을 통해서 보수파를 결국 제압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군부의 주요 원로들과 장쩌민의 정치적 라이벌인 차오스과 함께 회의를 주최했다. 이는 자신이 군을 동원해 개혁에 미적지근한 장쩌민에게 모종의 압력(이를테면 차오스로의 정권교체)을 줄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장쩌민은 이에 기민하게 대처하여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선언한다.

만약 마오쩌둥이 정말로 1956년에 죽고 류사오치가 20년 가까이 중국을 그럭저럭 관리하고 있었다면 개혁개방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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