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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관계의 변천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트럼프의 플로리다주 별장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국가 간의 정상회담이 언제나 그렇듯 겉으로는 아주 평온하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담은 양측의 견해차를 보여주면서 별다른 성과도 없이 끝났다.

지난 8년간 오바마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가 올해 들어 트럼프의 공화당 정부로 바뀌고,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독특한 성격과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급변하는 정세 등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이번 정상회담의 의의와 영향을 분석하기 바쁘다. 특히 미국의 민주당 정부와 공화당 정부 간에 대중국 정책은 어떤 차이를 보일 것인가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는 상황이다.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부터 미국은 현재까지 9명의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 오고 있는데 이 중 6명은 공화당, 3명은 민주당이었다.

1960년 타이완을 방문하여 장제스와 부인 쑹메이링을 만난 아이젠하워 대통령. 미국에 타이완은 대중국 관계에 있어서의 계륵이면서 동시에 무기다.


닉슨의 방중으로 만들어진 양국 관계는 서로의 절실한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양국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정리와 경제적 발전이 필요했고, 미국은 베트남 문제와 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양국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닉슨이 탄핵 직전에 사임하고 뒤를 이은 포드 대통령도 1975년 중국을 방문해서 양국 간의 관계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여전히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실제로 대사급의 외교관계가 맺어진 것은 민주당 출신의 카터 대통령이 취임한 후였다.

1977년 취임한 카터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접근이 소련을 자극해서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SALT-II (전략무기제한협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지 고심했다. 그러나 당시 국무장관이던 사이언스 밴스와 국가 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의 강력한 건의에 힘입어 중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를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79년 1월 1일 양국의 수도에 대사관이 설치되고 미국의 초대 주 중 대사는 당시 베이징에 있던 미국 연락사무소의 소장이었던 레오나드 우디 콕이 취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고 대신 중국은 미국이 민간 차원에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타이완과 지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1979년 1월 29일 백악관에서 덩샤오핑을 만나 회담하는 카터 대통령과 미국 측 인사들


그 후 미국과 중국은 밀월 관계를 즐기는 듯했다.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했고, 양국은 초기에 주로 과학, 기술, 문화교류 및 무역으로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1979년 한 해 동안 양국은 수백 개의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군사교류도 시작되어 미국은 중국에 무기까지 판매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을 듯 보였던 양국 관계에 처음으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 직후였다. 미국이 타이완에 최신 무기를 판매하면서 잠시 긴장상태로 돌입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1982년 당시 부통령이던 조지 H.W. 부시의 방문과 설득으로 어느 정도 해결됐다. 1984년에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중국의 자오쯔양 총리의 상호 방문으로 다시 밀월 관계로 들어갔다. 이러한 관계는 1985년 7월 중국의 리센녠 국가 주석의 미국 방문으로 더 굳건해지는 듯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국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여전히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프레임이 달라진 것은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이후였다. 미국은 중국의 인권탄압을 소리 높여 비난하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고위급 대화는 물론 무기 수출 또한 잠정적으로 중단하는 등 강도 높은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양국 간의 교류가 급격히 줄어들고 관광객의 수 또한 줄어들었다. 미국의 무역 개발 기구 (TDA), 해외 민간보험 공사 (OPIC) 등 정부의 영향력 안에 있는 많은 기관들이 중국과 관련해서 강경한 조치를 내놓기도 했다.

당시 붕괴 직전에 있던 소련과 동구권을 보면서 미국은 새로운 적으로 중국을 상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국과 거리를 두는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때 중단된 군사 부문 교류는 아직까지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중국 또한 1996년 타이완해협에서의 군사훈련 재개 등 미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백악관을 방문한 후진타오 국가 주석 내외와 이를 영접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 내외


양국 간의 관계가 최악 상황까지 갔던 것은 1999년 5월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미군이 폭격한 것이었는데, 비록 이 폭격은 착오로 인한 것이었다고 미국이 해명했지만 많은 중국 사람들은 고의성을 의심하고 있다. 끝내 2001년 4월 남중국해 하이난 근방에서 미군 정찰기와 중국 공군기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위기에 처한 듯 보였던 양국 간의 관계는 또다시 공동의 적을 만나면서 복원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발생한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나섰고, 당시 신장 지역의 무슬림 분리독립운동으로 골머리를 앓던 중국은 이에 적극 동조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다시 순풍을 타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의 대중동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던 중국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정책을 지지하고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재건사업에 무려 1억 5천만 달러의 돈을 내놓기도 했다.

양국 관계 반전은 계속됐다. 2008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지정학적 필요성에 있어서 중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중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봤다. 특히 중국의 저환율 정책에 대해서 오바마는 지속적으로 시정을 요구했다. 2009년 11월 15일 중국을 방문한 오바마가 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나눴던 가장 시급한 대화는 경제협력과 북한의 핵문제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 미온적이자 2010년 1월 미국은 타이완에 64억 달러어치의 무기 판매를 제안할 정도였다.

오바마를 이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관계는 그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타이완 총독인 차이잉원의 축하전화를 받았으며 이는 중국 측의 격렬한 항의를 초래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후에도 이 일에 대해서 정당화하는 듯한 인터뷰를 했고 이는 중국 지도층으로 하여금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우리나라에 설치되고 있는 사드 등으로 인해 더욱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화당이던 민주당이던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오로지 자신의 거대한 세계정책의 관점에서 중국을 상대할 뿐이고, 그 과정에서는 많은 소모품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타이완이 그랬고, 아프가니스탄이 그랬고, 구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그랬다. 우리나라도 그 소모품 리스트에서 제외됐다는 보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