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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20주년, 점차 짙어지는 ‘일국(一國)과 중국화’의 그림자

​홍콩이 아편전쟁 이후 155년간의 영국 제국주의 지배의 굴레를 벗고 중국으로 반환된 1997년 7월 1일 0시. 홍콩섬 컨벤션센터에 중국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자치구 깃발이 나란히 올라가고 영국 유니언 잭이 내려오면서 홍콩의 ‘일국양제(一国两制·한 국가 두 체제)’ 실험이 시작됐다.

올해 반환 20년을 맞아 시진핑 국가주석이 29일부터 3일간 홍콩을 방문한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25일 보도했다. 중국 국가주석이 홍콩을 찾는 것은 20년 전 반환식에 장쩌민 주석이 참석한 이후 처음이다.

시 주석은 30일 오전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 부대를 시찰한다. 다음 달에는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辽宁)함이 홍콩에 처음으로 입항할 예정이다. 자치를 넘어 일부에서 독립 요구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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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주석 취임 이후 첫 홍콩 방문을 공식화하면서 중국 정부는 ‘방문’이 아닌 ‘시찰’이라는 표현을 썼다. 최근 젊은층을 주축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큰 홍콩도, 결국 중국의 한 지역일 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홍콩 반환 20주년을 앞두고 중국 정부와 홍콩 사이의 긴장이 날로 팽팽해져 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시 주석은 전임자들과 달리 가정집을 방문해 홍콩 시민을 만나는 일정도 잡지 않았다. 대신 시 주석이 다녀간 뒤에는 중국 굴기를 힘으로 상징하고 있는 첫 항공모함 랴오닝호가 홍콩을 방문해 일반에 개방된다. 시 주석은 29일 홍콩에 도착해 렁춘잉(梁振英) 행정장관 주최 만찬에 참석하고 30일 중국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 부대를 시찰한다. 주권반환일인 7월 1일에는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 당선인과 내각의 취임선서를 주관한다.

홍콩 정부는 경찰력의 3분의1이 넘는 1만명을 동원해 24시간 경비 태세에 들어갔다. 28일부터는 ‘비호’(飛虎)로 불리는 경찰 특별임무중대의 잠수부를 동원해 행사장인 컨벤션전시센터 인근 바다에서 수중 검사를 한다. 홍콩 당국은 민주화 세력이 매년 빅토리아공원에서 열어 왔던 민주화 요구 집회를 불허하는 대신 친중파 단체가 공원을 선점하도록 유도했다.

중국의 통제 강화에 비례해 홍콩인들의 불만도 커져 가고 있다. 중국이 1997년 홍콩을 반환받을 때 50년간 홍콩의 체제를 인정하고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홍콩인들은 자치권이 후퇴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특히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한 ‘우산혁명’이 당국의 강제 진압으로 실패한 이후 열패감은 커지고 있다.

심각한 양극화도 반중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홍콩의 국내총생산(GDP)은 1997년 1조 3650억 홍콩달러에서 2016년 2조 4913억 홍콩달러로 2배 가까이 성장했지만 홍콩 시민들은 성장의 과실을 친중국 재벌들이 독점했다고 보고 있다.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996년 0.477에서 올해 0.539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이라는 0.5를 훌쩍 넘겼다. 중국 부호들이 홍콩 주택 사재기에 나서면서 홍콩의 주택 가격은 지난 10년간 3배 급등했다. 반면 신입직원 초봉은 10여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홍콩의 GDP는 이미 2009년에 중국 상하이에 역전당했고, 중화권 294개 도시 중 최고 경쟁력 있는 도시라는 명성도 2015년부터는 선전에 내주었다. 홍콩 중문대의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받아들이는 홍콩 시민은 18%에 불과하다.

홍콩의 범민주파 시민단체들은 다음달 1일 민주화 요구 거리행진을 강행할 계획이다.


홍콩 대표가 중국의 국회 격인 인민대표대회나 국정자문기구인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지만 아직은 ‘두 체제’다. 두 지역 간 통행이 다른 ‘국경’과 비슷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 내 49개 도시 주민은 홍콩 개별 관광을 할 수 있지만 특별 허가가 있어야 한다. 중국인의 홍콩 탈출을 막는 철조망도 있다.

홍콩이 여전히 ‘중국 속의 특별행정구’임을 보여주는 사례는 더 많다. 대륙에서는 금서인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국가의 죄수’ 같은 책이 발행되고 밍보 등 비판적인 언론의 활동 공간이 남아 있다. 입법원 의원에 ‘중국에서의 독립’을 주장했던 인사가 당선되고 매년 6월 4일 홍콩섬 빅토리아 공원에서 1989년 ‘6·4 톈안먼사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계속 개최된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덩샤오핑 최고지도자 간 합의와 1984년 12월 19일 ‘중영 연합성명’에 따라 마련된 ‘홍콩 기본법’은 1997년 이후 50년간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는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의 고도의 자치를 보장했다. 아직 30년이 남았지만 점차 ‘홍인치항(红人治港·공산당이 홍콩을 통치한다)’ 혹은 ‘경인치항(京人治港·베이징이 홍콩을 통치한다)’으로 바뀌고 있다.

홍콩 경제일보는 중국 정부의 홍콩에 대한 태도가 행정장관 재임 시기별로 달랐다며 ‘방임’(둥젠화·董建华·1997∼2005)과 ‘자치 지지’(도널드 창·曾荫权·2005∼2012)를 지나 ‘간섭과 간여’(렁춘잉·梁振英·2012∼2017)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분수령은 2014년 우산혁명 시위와 2015년 반체제 서점 관계자 대륙 연행 조사 사건이었다. 2014년 9월 28일부터 12월 15일까지 79일간의 우산혁명 시위는 행정장관 선출 직선제를 요구했지만 무산됐다. 그 결과 올해 3월 친중파의 캐리 람 후보가 12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 선거 방식의 ‘체육관 선거’로 당선됐다. 시 주석은 렁 전 장관과 람 장관 당선자를 면담할 때 지방정부 수장을 대하듯 아랫자리에 앉히기 시작했다.

홍콩섬에서 중국 체제에 비판적인 서적을 판매해 ‘반체제 서점’으로 불렸던 ‘퉁뤄완(铜锣湾) 서점’의 대주주 리보(李波) 씨 등 서점 관계자 5명은 2015년 10월에서 12월 사이 잇따라 실종됐다. 이들은 대륙으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경찰이 홍콩 시민을 홍콩에서 사실상 연행해 간 것으로 ‘일국양제’에 대한 심각한 위반 사건이었다.

지난해 9월 4일 실시된 입법회 선거에서 비친중파(범민주파)가 70석 중 30석을 차지했다. 중요 정책 저지선인 24석(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특히 자결과 독립을 주장하는 후보가 6명이 당선된 것은 우산혁명 무산에 대한 반발이었다. 홍콩대 조사 결과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긴다는 응답이 1997년 46.6%에서 지난해 31.2%로 뚝 떨어졌다. 중국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다.

올해 6월 12일에는 대만 입법원 의원 18명이 ‘대만국회주목 홍콩민주연선’이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 창립식에 홍콩 입법회 의원 3명과 우산혁명 당시 학생 지도자 조슈아 웡 등이 참석했다. 홍콩 민주화를 위해 대만과 홍콩이 처음으로 공동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영국의 마지막 홍콩 총독이었던 크리스 패튼은 거듭 홍콩의 자치와 민주화가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최근 강연에서 “중국이 홍콩의 자치권 통제를 점점 심하게 하고 있다”며 “중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홍콩 친독립파 정당인 홍콩민족당은 30일 주룽(九龙)반도 침사추이(尖沙咀)에서 ‘홍콩 추락 20주년 애도 집회’를 갖겠다고 밝혔다. 홍콩 민주화 세력은 시 주석 참석하에 홍콩 반환 기념식이 열리는 다음 달 1일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홍콩 정부는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전 경찰력의 3분의 1인 1만 명을 동원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홍콩 내 중국 정부 대표처 격인 주홍콩 중국연락판공실의 장샤오밍(张晓明) 주임은 최근 관영 중국중앙(CC)TV 인터뷰에서 “소규모 친독립 옹호자들이 중국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무관용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홍콩 경제는 반환 이후 중국과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아시아 금융위기(1997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를 무난히 극복하고 아시아 허브로서의 기능도 강화됐다는 평가다. 2003년 6월 자유무역협정(FTA) 격인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체결과 홍콩 증시와 상하이, 선전증시의 교차 거래인 후강퉁(沪港通) 선강퉁(深港通) 개시 등이 새로운 활력 요소가 됐다는 분석이다. 국내총생산(GDP)은 1997년 1조3730억 홍콩달러에서 2016년 2조4910억 홍콩달러로 80% 남짓 늘었다.

하지만 중국 경제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제조업이 붕괴된 것은 부작용으로 지적된다. 1980년대 초반까지 제조업이 GDP의 25% 안팎을 차지했으나 2015년에는 금융 및 서비스업의 비중이 98%에 이르는 극단적 서비스업 중심 경제로 변모했다. 2000∼2007년 연평균 5.3%의 성장세를 유지하다 2011년 이후 연평균 2.8%로 동력이 떨어지고 지난해에는 1.9%로 2%대를 깨고 내려간 것은 편향적 경제구조가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홍콩의 경제 성장은 이어지지만 상당 부분 중국에 기댄 상태에서 대체 누가 그 열매를 맛보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지난해 자산 상위 10%의 월평균 소득은 11만2450홍콩달러(약 1640만원)로 하위 10%(2560홍콩달러)의 44배였다. 특히 젊은층은 직접적으로 중국 쪽에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중국 출신 이주민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주의적 시선도 있다. 중국이 홍콩 문제로 영국과 협상을 시작한 1980년대부터 의도적으로 이주 정책을 펼쳐 홍콩 장악을 위한 장기 전략을 구사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잔뜩 몰려와서는 아이를 많이 낳는다며 중국 출신을 ‘메뚜기’로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지난 20년간 홍콩으로 이주한 중국인은 150만명이다. 압도적인 중국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홍콩의 경제에 대한 불안감도 크다. 홍콩경제가 크게 의존하고 있는 관광분야가 급성장한 중국 경제의 영향력을 뼛속 깊이 체감하는 중이다. 홍콩 경제는 2003년 초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발병으로 직접적 타격을 입을 뻔했지만, 그해 24.1%, 이듬해 44.6% 등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큰 위기는 면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 2014년 가을 반중 성향의 ‘우산시위’가 일어나자 2015년 3%, 2016년 6.7%씩 관광객이 줄어들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중국 관광객들의 동향에 희비가 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