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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뿌리



18일 개최되는 19차 당대회에서 5년 임기를 재보장받고, 중국을 이끌어 나갈 시진핑 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부위원장을 역임한 시중쉰을 아버지로 둔 태자당 출신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태자당들과는 달리 아버지 시중쉰의 권력부침으로 시진핑 주석은 유년시절부터 산전수전을 겪고 수 많은 역경을 극복한 남다른 성공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2002년 5월 22일 중국 혁명원로 정치인 시중쉰이 8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낳은 자녀 중 가장 총애했던 시진핑이 다행히 임종을 지켰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시진핑은 저장성 부서기로 마침 베이징에 출장 중이었다. 산시성(陕西省) 푸핑현(富平县) 농가에서 태어난 시중쉰은 13세때 공청단에 가입 학생운동을 시작 15세에 공산당에 입당 산시북부 정치위원 류즈단(丹)을 따라 서북지역의 농민운동을 지도, 게릴라전을 펼쳤다. 시중쉰의 활약은 그를 류즈단 휘하의 가오강(高岡)에 이어 3인자에 오르게 하였다. 마오쩌둥의 장정 주력 홍군이 산시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근거지를 마련해 놓은 류즈단은 마오쩌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유명한 시중쉰을 만나고 싶어했다. 워낙 용맹하고 전투의 공이 혁혁하여 나이 많은 노장군일 것으로 생각했던 마오쩌둥은 불과 22세의 청년 장군 시중쉰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류즈단은 죽고 가오강은 동북으로 전출되자 시중쉰은 한동안 '서북의 왕'으로 불리었다. 그 후 마오쩌둥은 중앙 정부의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영웅들을 북경으로 불러 올렸다. '동북의 왕'으로 불렸던 가오강과 함께 시중쉰도 북경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6월 북경에서 태어난 첫 아들이 시진핑이다. 시진핑의 핑(平)은 베이핑(北平) 즉 북경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다. 그의 손윗 누이 안안(安安)은 시안(西安)에서 태어나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이름은 태어난 곳의 지명을 넣은 것이 유행이었다.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는 외교관인 아버지가 미국에서 낳은 딸이고 그의 오빠 왕광잉(王光英)은 영국에서 낳은 아들이다.

시중쉰이 저우언라이의 신임을 받아 국무원 비서장등 고위직에 오르지만 1962년 소설 류즈단의 필화사건에 연류되어 반당분자로 허난성 노동자로 하방된다. 시중쉰이 문화혁명이 끝난 1977년 복권될 때까지 16년간 농촌생활을 하게되어 시진핑은 농촌에서 초,중학교를 다니는 등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많은 고초를 겪는다. 시중쉰은 장기간 실각한 생활에서도 자녀들에게 항상 자존심을 지키되 근검 절약의 정신을 교육하였는데 자녀 중 시진핑이 가장 아버지의 기대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시진핑이 오랜 공직생활에서 가난한 사람을 찾아 격려하고 겸허하게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고, 항상 인화를 중시하라는 시중쉰의 교육으로 그와 함께 일한 사람은 그를 친화적인 상사로 기억하고 칭송하고 있다. 시중쉰이 복권되어 광둥성 서기로 있으면서 홍콩 마카오의 발전에 주목, 선전, 주하이 등에 경제 특구 지정을 건의하여 실현시키는 등 개혁개방의 진정한 설계자 역할을 하였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덩샤오핑이 가장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 처했을 때 시중쉰은 중국은 개혁개방론자 덩샤오핑을 필요로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덩을 지지하며 덩의 실각을 막았다.

아버지 시중쉰의 엄격한 가정교육과 개혁개방만이 중국을 살릴 수 있다는 아버지의 신념을 이어 받은 시진핑 국가주석은 한국 역시 짧은 기간동안 어려운 여건에서 근검절약과 개혁개방정신으로 발전한 국가임을 평가하고 있어, 최근 사드사태로 비록 양국간의 관계가 어려움을 겪고있지만 19차 당대회이후 중국지도부의 권력기반이 정상화된다면 조만간 호전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