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25주년 기념행사를 따로 개최할 만큼 한중관계가 얼어붙었습니다. 15, 20, 25주년 때는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행사를 치르면서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는데요.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듭니다.
“한중 양국을 둘러싼 국제정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두 나라가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봅니다. 중국이 한중관계를 더 이상 양자관계로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지역 문제나 미중관계라는 큰 틀에서 판단하고, 움직이기에 양국 간 인식 격차가 점차 커져갑니다. 서로에 대한 기대 차도 있고요. 일종의 전환기이기 때문에 한국이 위상(positioning)을 잘 찾아야 합니다.”
▼19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거치면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 2기를 맞았습니다. 11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北京)을 방문합니다. 동아시아 지정학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미·중 정상회담 결과는 한국에도 중요합니다. 중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다는 견해도 나오더군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실서(失序)라는 단어를 쓰더군요. 질서(秩序)를 잃어버린(失) 시대란 뜻인데요. 세계정치가 혼돈의 시기에 접어들었으나 미중관계가 갈등일로로 가긴 어렵습니다. 여전히 글로벌 차원에서 미중 국력 격차가 큽니다. △군사력 △경제의 질 △에너지 안보 △연구 개발 △교육의 질 △ 거버넌스의 능력에서 그렇습니다. 중국이 안고 있는 사회 리스크, 중위 인구 질만 봐도 미국과의 격차를 단기간에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베이징이 워싱턴에 정면으로 맞서기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어렵다는 얘기군요.
“미국을 추격해 G-2 시대가 됐다거나 중국의 시대가 열린다는 주장은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라는 이미지를 실체와 섞어 보는 데에서 오는 평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을 능가하기엔 아직 그 격차가 상당합니다. 이렇게 보면 미중관계도 전면적인 갈등 속에서 부분적으로 협력한다기보다는 협력의 토대에서 과거보다 쟁점(Flash Point)을 둘러싼 갈등이 빈발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시진핑은 미중이 협력할 이유는 1000가지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처지를 드러낸 외교적 수사(rhetoric)라고 하겠습니다.”
▼글로벌 차원에서 미중 간 국력 격차가 존재하더라도 동아시아 상황은 다릅니다. 한반도, 동·남중국해, 대만해협에서 전략 갈등이 벌어집니다.
“아직은 중국이 글로벌 수준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라고 봐야겠으나 동아시아 상황은 또 다르죠. 베이징이 동아시아에서 세계 전략의 교두보를 쌓으려 하니 전략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 중국이 적응하는 체제가 하나, 미중 간 격돌하는 동아시아가 다른 하나입니다. 이 같은 이원적 구조가 미중관계 본질입니다. 지리적으로 멀수록, 연성권력(Soft Power)일수록 협력이 이뤄지는 반면 지리적으로 근접할수록, 경성권력(Hard Power)일수록 갈등이 심화합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는 안보 및 경성권력 사안에서 갈등이 벌어지는 전형적 사례고요.”
▼2012년 시진핑 집권 이후 베이징은 워싱턴에 신형대국관계를 제안하면서도 양국 간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국력 격차가 존재하기에 협력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아시아 이웃국가, 중국 표현으로 주변국가에는 공세적이랄까요. 다시 말해 국익에 도움이 될 때는 적극적으로 포용 정책에 나서는 반면 국익과 충돌할 때는 강력한 제재를 전개합니다. 부드러운 곳에는 더 부드럽게, 까칠한 곳에는 더 까칠하게 나옵니다. 베이징이 지역적 차원에서 패권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만 사건이나 국면, 구조 차원에 따라 베이징의 대응이 제가끔 다른 것 같아요. 특히 북한 핵과 동·남중국해 문제도 상황이 워낙 복잡해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움직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신형대국관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6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하면서 제시한 외교 용어다. 기존 대국인 미국과 상승 대국인 중국이 상대방의 핵심 이익을 존중하면서 평화 공존을 추구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탄력적으로 적용한다?
“북핵 문제도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동·남중국해 상황도 비슷하고요. 중국과 이웃한 국가 대부분이 정체성 외교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좀 더 강한 외교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전후 질서에서 탈각해 평화국가에서 보통국가로 나아가는 데다 김정은 체제도 그 나름대로 김정일 시기와는 다른 정체성 외교를 추구합니다. 러시아도 비슷하고요.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겠다는 한국 정부도 미들 파워로서 정체성 외교를 강조합니다. 북핵 문제에 운전대를 잡겠다는 생각도 그렇고요. 각 나라가 순응하거나 적응만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겠다면서 정체성을 강조할 때 강대강(强對强) 국면이 나타납니다.”
▼중국도 정체성 외교를 벌입니다.
“베이징은 역사와 대화 중입니다. 2021년 공산당 창당 100년, 20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년입니다. 잃어버린 과거 역사, 외세에 의해 열린 근대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중국에 중요해요. 중국의 부상은 단순하게 떠오르는 게 아니라 재(再)부상의 맥락이 있습니다. 아편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세계총생산(GDP) 30%를 차지하던 부강한 모습을 되새기는 거죠. 요즘 길거리에 걸린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의 첫 단어도 ‘부강’입니다. 말씀한 대로 국익에 크게 문제 안 되는 일엔 부드럽게 행동하지만 국익이 걸리거나 국면이나 구조와 관련한 일에는 좀 더 원칙적 외교를 벌입니다. 중국 바깥의 국가들이 중국을 부담이나 위협으로 느끼는 양상이 과거보다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북·중관계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中·國·通’ 아홉 번째가 서진영 사회과학원 원장이었는데요(신동아 10월호 “최악 상황엔 ‘핵무장 하겠다’ 中에 명확히 밝혀야” 제하 기사 참조). 서 원장은 “중국이 1992년 북한을 한 번 버렸다. 또 버리지 말란 법 없다”고 말합니다. 중국 국익에 해가 되면 북한을 또 한 번 버릴 수 있다는 건데요. 중국은 그간 북한을 상대로 생색내기 수준의 제재만 해왔으나 달라진 모습도 엿보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습니다. 북한이 핵·탄도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면 베이징이 평양을 버릴까요.
“북한과 중국 간 형성된 상호 불신 구조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사안이라고 봅니다. 1930년대에도 중국공산당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간 갈등이 거셌어요. 민생단 사건이 대표적이죠.”
민생단 사건은 간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 항일운동가들이 민생단과 관련된 일본 첩자라는 혐의를 쓰고 중국공산당에 체포, 살해된 것을 가리킨다.
“최근 발견되거나 공개된 자료를 살펴보면 6·25전쟁 후 중국군 철군 과정에서 평양과 베이징의 갈등이 상당했습니다. 6·25전쟁 때도 전시작전권을 가지려는 중국과 그것에 반대하는 북한이 부딪쳤고요. 문화대혁명 때도 북·중관계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는 평양에 큰 타격을 줬죠. 한중수교 이후로도 크고 작은 갈등이 많았습니다. 북·중관계가 우호적 상황에서 어떤 결정적 계기를 거치면서 나빠지는 게 아닙니다. 두 나라 간 전략적 불신의 뿌리가 상당히 깊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그랬고, 김정은 또한 이러한 인식구조를 가졌다고 봐야지요. 중국도 북한이 자국을 불신하는 현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대북정책을 짜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중국에 사람으로 치면 목구멍(咽喉)입니다.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 같은 관계면서 해양세력(미국, 일본)으로부터 안보를 지키는 요충이죠.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 이후 미중관계 재조정 과정에서 북한이 가진 전략적 가치가 중국에서 다시금 주목받습니다. 중국의 대미 인식도 2008년을 기점으로 변화했고요. 당시 베이징은 미국의 금융위기를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복합국면(Social Conjuncture)으로 파악한 듯싶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민낯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한 겁니다. 중국이 세계 질서와 관련해 대안 패러다임을 고려하기 시작한 때도 그즈음인 것으로 보이고요. 2009년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이 북한에 빠르게 접근한 것도 이러한 중국의 대미 인식 속에서 북한의 전략가치를 다시 주목한 것으로 본 것이지요. 중국에 북한은 내심 부담스러운 존재지만 미중관계 틀에서 보면 여전히 전략적으로는 자산입니다.
한국 주도로 통일이 이뤄지면 미중이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되면 베이징이 가지는 전략적 고민은 더욱 깊어지겠죠. 이렇게 보면 지금 상황은 베이징이 북한과 상호 전략적 불신이 있지만 상황 악화를 방지하면서도 평양의 체제가 변화하도록 압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북한이 중국이 내심 설정한 레드라인을 침범하면 모르겠으나 과정이 힘들더라도 북한을 변화시켜 얻는 이익이 클 때는 지정학의 이점을 추구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 통일 및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서울과 베이징이 각자 추구하는 대북정책의 공통분모를 찾을 법한데 엇박자가 반복됩니다. 한중 간 교집합을 넓히면서 해법을 마련하려면 베이징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베이징이 북한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고는 있죠. 국제적 고립이 심화될수록 중국의 대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지고요. 그런데 중국 처지에서 영향력은 사용하지 않을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했는데도 북한이 바뀌지 않으면 상황이 우스워지죠.
2006년 핵실험 때 베이징은 평양이 제멋대로(悍然) 핵실험했다며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타국을 제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에도 이례적으로 참여하고요. 그런데 이듬해 워싱턴과 평양이 베이징과 서울을 패싱(passing)해 양자 합의를 맺습니다. 북한의 이후 핵실험 때 베이징이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때 학습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영향력은 행사하는 것보다 보유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고, 영향력을 사용하면 영향력이 사라지는 딜레마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란다면 한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베이징의 외교 공간을 넓혀줘야 해요. 한국, 중국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 베이징이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미국이 중국에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마저 미국을 대변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아요.
북한의 최종 상태에 대한 한중 간 넓은 공감대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정권 교체를 추진하지 않는다’ ‘체제 붕괴를 시도하지 않는다’ ‘통일 드라이브를 급속하게 걸지 않는다’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등과 관련해 큰 틀의 합의를 이뤄낸 상태에서 역할을 분담해야 공동의 방법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중국은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천명합니다. 한국이 추구하는 평화통일과 중국이 말하는 자주적, 평화적 통일은 어떻게 다릅니까.
“베이징은 한반도 사안을 한국과 북한의 문제라고 봅니다. 남북이 통일 과정에 실제로 접어들지 않는 한 중국이 움직일 유인이 없습니다. 통일 과정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면 베이징이 자신들의 역할을 찾을 겁니다. 중국이 말하는 자주적, 평화적 통일은 평화적 협상을 통해 남북이 자주적으로 통일 과정에 접어드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과 중국이 북한을 배제한 채 합의한 후 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중국 처지에서 위험 부담이 클뿐더러 타국에 간섭하는 것이기에 저어할 겁니다. 현재처럼 남북이 교착된 상황에서는 통일과 관련해 베이징이 역할을 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중국은 평화공존이라는 탈(脫)분단 과정을 거쳐 질서 있는 평화통일로 가는 길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
▼시진핑이 김정은을 만나지 않는 까닭은 뭘까요.
“베이징의 대(對)한반도 정책은 한반도 비핵화가 골자입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것은 중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조를 깬 것입니다. 또한 북·중 정상회담은 미중관계, 한중관계 등의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중국 처지에서 볼 때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의 실마리를 보여주지 못하면 당분간 추진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쌍잠정(雙暫停·북한 핵·미사일 개발 활동과 한미 연합훈련을 일시적으로 동시에 중단하는 것)은 대북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평양의 요구를 베이징이 받아들인 겁니다. 쌍궤병행(雙軌竝行·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와 북·미 평화협정 협상을 병행해 추진하는 것)은 미국이 주장하는 ‘선(先)비핵화, 후(後)평화체제’와 북한이 주장하는 ‘선(先)평화체제, 후(後)비핵화’를 절충한 것이고요. 중국은 쌍잠정, 쌍궤병행 원칙을 러시아와도 합의했습니다. 쌍잠정, 쌍궤병행이 현 시점에서 중국의 북핵 문제를 푸는 방법론이라고 봐야 합니다.
중국의 대북정책이 성공하려면 평양을 ‘핵 동결’이란 입구로 불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입구에 일단 들어서서 긴장도를 낮춰야 하는데, 북한은 핵 보유와 주한미군을 등가(等價)로 보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지요. 핵 포기를 전제로 한 핵 동결 협상에 북한이 나올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없죠. 따라서 중국도 어렵게 만든 한반도 정책의 기조를 훼손하면서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당장은 어려워 보입니다. 북한 또한 북·미 간 직접 대화로 핵 문제를 푸는 게 효과적이라고 여기고 있고요.”
▼19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시진핑 집권 2기가 시작됐습니다. 시진핑 집권 후 중국 국내 정치에서 발생한 뚜렷한 변화로 1인 권력 강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반(反)부패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간부에게 철퇴를 가했고 정치적 걸림돌도 제거했습니다. 집권 2기 시진핑 체제의 안정성을 어떻게 평가합니다.
“베이징에서는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관건적 시기’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집단지도체제 속에서도 개인의 리더십을 강화해 개혁 드라이브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집권 기간 중 앞선 5년은 낡은 술 부대에 새 술을 붓고 새로운 술 부대에 새 술을 부으면서 기존 체제와의 연속성을 강조했습니다. 매몰 비용(Sunk Cost)을 줄이는 정책을 선택한 것이죠. 그런데 시진핑은 첫 임기부터 자기 스타일로 정치했습니다. 시진핑 권력이 집단지도 체제의 틀을 무너뜨리지는 않겠으나 집단지도 체제 속에서 1인 우위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외정책에서도 중국식 방안(Chinese Solution)을 더욱 강조할 것이고요. 반부패 운동을 강화해 당과 국가의 기강을 잡아나가면서 공산당 체제의 안정된 기반 속에서 중국형 미래 산업 전략을 모색하는 복합적 정치권력의 모습을 그리고자 할 것입니다.”
▼집단체제 틀 속 1인 우위 체제에서는 시진핑의 퍼스낼러티(personality)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변수가 될 것입니다. 시진핑은 어떤 사람입니까.
“산시(陝西)성 작은 지역의 서기부터 국가주석에 오르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16번 넘게 중요 직책을 담당했으며 국가주석을 맡기 전 인구 약 1억5000만 명을 통치해봤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과를 쭉 내온 겁니다. 문화대혁명 때 하방(下放)이라는 개인적 경험도 정치를 보는 눈을 키웠을 것이고요.”
하방은 중국공산당이 당·정·군 간부의 관료주의·종파주의·주관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고학력자, 지식분자를 낙후된 농촌, 변경의 공장으로 보낸 것을 가리킨다.
“시진핑이 3세대, 4세대 지도자들보다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강합니다. 돌파력, 추진력도 갖췄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특성이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을 살펴봅시다. 한반도에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것이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깨는 행동이라는 게 하나라면 시진핑이 사드 배치는 안 된다고 얘기한 게 다른 하나입니다. 쉽게 말해 지도자의 말의 무게(立言)가 큰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사드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데 시진핑의 스타일 탓에 매듭을 풀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중국의 정책 결정 과정에 시진핑의 생각이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커졌다고 봐야 합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집권기에는 지도부 내 역할 분담이 이뤄졌습니다.
“그게 시진핑 집권 이전, 이후의 차이죠. 후진타오 시절까지는 이전처럼 집단지도 체제 속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지도부 간 역할을 나눴습니다. 물론 시진핑 체제에서 집단지도 체제를 대체하는 것은 기존 관례와 제도를 뒤엎는 문제이기에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집단지도 체제에서 1인 우위가 형성되고 그것이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엔 물밑에서 세력, 파벌 간 경쟁과 견제가 치열하게 이뤄졌습니다. 경쟁과 견제를 타협으로 봉합하는 구조도 정착됐고요. 1인 우위 집단지도 체제하에서도 세력, 파벌 간 경쟁, 견제는 존재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조절해 타협의 문화를 이어갈까요. 타협의 기제가 작동할까요.
“외부에서 우려하는 게 공산당 내부의 민주주의 후퇴입니다. 당내 민주주의는 협상민주주의와 함께 중국 당-국가 체제의 골간 격입니다. 당밖의 민주주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활성화돼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민주집중제의 원리가 작동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진핑의 권력이 강화된 상태에서는 ‘민주 없는 집중제’가 더욱 고착화될 공산이 크고 체제도 더욱 경직될 것으로 보입니다. 베이징이 외부 환경의 엄중함을 강조하는 것도 유념해봐야 합니다. ‘관건적 시기’는 복합적인 맥락이 있지만, 정당성의 기반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측면이 있습니다. ‘외부 환경 탓’이라는 수사의 마법이 풀리면 경직된 체제가 어려움을 겪을 소지가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당과 정부 지식인 사회가 ‘복지부동’에 빠져 있거나 지나치게 고요한 현상도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도 한중관계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일정이 아직도 잡히지 않았고요. 베이징이 문재인 정부에 기대감을 가졌다가 실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대(對)중 소통 채널이 막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구체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물밑에서 다수 채널이 가동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사드를 북핵과 연동된 개념으로 봅니다만 중국은 사드와 북핵을 분리해 보고 있어요. 연동론과 분리론의 차이를 극복해내는 게 한중관계 회복의 핵심 사안이죠. 사드 임시배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중국의 우려를 불식할 군사기술적 대화를 지속하고 중국의 안보 우려에 대한 한국의 전략 방향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통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모멘텀을 찾아야 하겠지요.
베이징도 경색된 한중관계에 부담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도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전에 한일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것도 걱정이고, 중국과 시진핑 개인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것도 부담이겠고요. 한중관계가 과거 중일관계 형태로 고착되는 것은 중국에도 외교적 부담이 크죠.
그런데 사드 문제는 근본적으로 배치와 철회라는 이분법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고 봐요. 극복이 아닌 관리의 문제로 넘겨 민감도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가야 대화 동력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2018년 평창올림픽 이전에 한중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평창올림픽에 초청했기에 중국 지도부가 답방 형식으로 올림픽에 오도록 해야 합니다.”
▼외교·안보정책 수립 과정에서 중국 전문가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우리 외교안보팀에서 차이나 스쿨이 힘을 잃고 있는 이유는 중국 커리어로는 외교 안보부처의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고 유능한 외교관들은 차이나 스쿨로 가지 않으려고 하죠. 주중 한국대사관은 지원자가 늘 부족해 인력을 겨우겨우 채운다고 합니다. 외교·안보 현안에서 중국이 미국 못지않게 중요한데도 중국 전문 인력을 안정적으로 키우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올라갈수록 정부 내 중국 전문가 풀이 굉장히 얇아집니다. 외교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미국의 프리즘으로 중국을 보는 인식을 빨리 극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북·미 라인, 도쿄 스쿨 등 특정 지역을 오래 전담한 인사들이 외교부 요직을 차지해왔다.
“관성을 깰 필요가 있습니다. 경로에 의존하는 외교가 아니라 경로 바깥으로 나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외교가 지나치게 경로에 따라서만 움직이다 보니 창의력이 떨어집니다. 중국 관련 인력과 조직도 대폭 확대해야 합니다. 미국 쪽 커리어를 가진 이들이 중국에도 가고, 중국 쪽 커리어를 가진 이들이 미국에도 가면서 균형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외교 순혈주의를 타파하는 것 못지않게 고위 외교관을 배양하는 시스템을 일신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문화대혁명(1966 ~1976)이 한창이었습니다. 서구의 좌파 학생들은 마오쩌둥(毛澤東)에 열광했고요. 중국을 연구하기로 한 데는 이념적 관심이 영향을 미쳤습니까.
“이념적 관심이 없었다고 얘기할 순 없죠. 우리 세대는 지구의 반쪽에서만 살았습니다. 자본주의만 봤지 사회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랐죠. 이데올로기를 떠나 나머지 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한국에서 중국을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할 때입니다. 중국어 공부할 곳도 없었고요. 한국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 다시 말해 중국과 연관 짓지 않고는 설명을 못합니다. 한국의 운명은 좋든 싫든 중국과 관련이 있어요. 중국을 모르고선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1969년 9월 워싱턴대에 짐을 풀었습니다. 베트남전 반전 데모가 치열했어요. 중국 깃발이 캠퍼스에 나부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적색기가 휘날리는 곳에 서 있는 걸 누가 알면 내 운명은 끝난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미국 신좌파(New Left)는 문화대혁명을 인류의 대실험으로 여겼죠. 정통 학파는 광기(狂氣)라고 봤고요. 세미나실, 학회에서 양쪽이 충돌하는데 어안이 벙벙하더군요. 한국이 아닌 곳은 이렇듯 논쟁을 벌이면서 사는구나 싶었죠. 당시 경험이 학문적,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해줬습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토론을 통해 균형 잡는, 동양식 표현의 중용지도(中庸之道)를 깨우친 겁니다.”
▼한중수교 25주년 기념식이 따로 열릴 만큼 한중 관계가 경색됐습니다. 경제, 사회 영역에서 중국과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 취해 전략적 인식 격차를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8월 22일 화정평화재단 강연에서 말했듯 앞으로 한중수교사(史)를 서술할 때 사드 이전, 이후로 양분해야 할 겁니다. 사드 배치 문제가 아니라 사드로 상징되는 한중 관계 변화 양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드 이전의 한중 관계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배경이 뭐였는지부터 살펴봅시다. 1992년 수교의 밑바탕에는 한국·미국·중국이 가진 전략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 같은 공감대 속에 한중 관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겁니다. 현재는 그 공감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는 “공감대가 약화한 것은 개혁·개방 성공으로 중국이 강대국이 되면서 미·중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라면서 “2008년을 경계로 아시아에서 전략 갈등이 노골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2년 한중수교 전후 한국·미국·중국이 공유한 전략은 세계화 흐름을 적극 활용하면 윈-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89~1991년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탈냉전이 일어납니다. 세계화와 탈냉전은 동전의 앞뒤죠. 중국은 이 같은 격동기에 톈안먼 사태(1989년 6월 4일)를 겪습니다. 미국 조야와 학계가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을 언급합니다. 체제 경쟁이 끝났다는 거였죠. 중국이나 북한, 쿠바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경제 제재를 통해 중국을 옥죄면 자본주의가 세계를 완전히 제압한다고 본 겁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아버지 부시(조지 H W 부시)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게 부시는 대(對)중국 관계를 확대·발전시키는 게 미국 국익에 맞고 세계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봤습니다. 여론, 의회 압력 탓에 베이징을 공격하면서도 비밀리에 특사를 보내 ‘너희들과 잘 지낼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한국은 비슷한 시기 북방 정책에 나섭니다.
“한국에서도 논쟁이 벌어집니다. 한중수교 하려면 대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대만을 어떻게 버리느냐, 중국에 다가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과 ‘중국과 무조건 수교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뉩니다. 나는 중국과 수교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봤고요. 외교부 관리들이 미국과 서방의 대(對)중국 제재가 한창인데 한중수교에 매달리는 것은 우습지 않으냐고 할 때입니다. 외교부 관리들에게 ‘미국에 알아봐라, 오히려 좋아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워싱턴은 이해한다(understanding)는 반응을 보였죠. 노태우 정부는 중국뿐 아니라 돈을 주고서라도 소련과 수교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내립니다. 소련이 붕괴하는 통에 차관으로 제공한 게 나중에 문제가 됐으나 적은 비용으로 잘 처리했다고 봐요. 북방 정책을 전략으로 삼은 것은 노태우 정부의 업적입니다. ‘베이징,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으로’가 북방 정책의 슬로건이었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와 한국 북방정책, 미국 대중 정책이 맞물려 교집합을 이뤘다는 거군요.
“한중수교가 이뤄진 1992년 덩샤오핑이 걸은 길을 봅시다. 톈안먼 사태 유혈 진압 최고책임자가 덩샤오핑 아닙니까. 자오쯔양(趙紫陽), 후야오방(胡曜邦)이 주도한 개혁의 시대는 끝났으며 중국은 보수 정권 아래에서 체제 옹호로 가리라고 서방이 내다볼 때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섭니다.”
남순강화는 덩샤오핑이 1992년 1월 18일~2월 22일 우한·선전·광저우·상하이를 돌면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을 가리킨다.
“남순강화는 중국이 굴기하는 데 횃불을 밝힌 일대 사건이에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 나서기 이전까지 베이징은 한국을 ‘서방세계의 앞잡이’로 여겼습니다. 그런 한국과 수교를 통해 중국은 서방에 ‘앞으로 세계와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중국이 세계에 편입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죠. 요컨대 1990년대 초반 한국·미국·중국 전략가들 사이에 세계화 시대에는 체제, 이념의 차이를 넘어 협력하면 윈-윈이란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수교 이후 한중 관계가 역사상 유례없이 경이적으로 발전한 까닭도 그래서고요.”
▼현재는 전략적 공감대가 깨진 겁니까.
“탈냉전, 세계화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입니다. 한국도 이득을 봤고요. 상대적으로 수혜가 적었으나 미국도 덕을 봤습니다. 덩샤오핑이 가진 전략이 대단한 게 중국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과 구분되는 점이 그것이에요. 베이징은 서구가 만들어낸 시장경제 바깥에 사회주의 질서를 별도로 꾸립니다. 쉽게 설명하면 대형마트 안에 들어간 게 아니라 가게를 따로 차린 후 힘을 키워 굴기한 후 경쟁에 나선 겁니다. 워싱턴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중국이 들어오면 흐물흐물해져 서구화할 것이라고 내봤으나 베이징은 그들의 방식으로 성공합니다. 워낙 덩치가 큰 놈이 부상하니 미국도 혼란스러울 수밖에요.”
▼베이징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의지를 드러냅니다. 한국에도 힘을 투사하려 하고요.
“신흥 강대국 출현은 세력 개편을 촉발합니다. 베이징은 최소한 아시아 문제는 미국과 공동으로 처리할 만큼 강국이 됐다고 여깁니다. 세력 전이(Power Shift) 시대에는 도전국과 패권국 간 경쟁이 일어납니다. 전략적 공감대가 무너지는 터라 한중 관계, 미중 관계가 요동칠 수밖에요.”
그는 2008년이 분수령이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2008년을 ‘핀 포인트’해야 합니다. 중국이 올림픽을 치릅니다. 개막식에서 유교 문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화문명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리죠. 중화제국이 돌아왔다고 시위한 겁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합니다. 서구식 경제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요. 미국의 쇠퇴, 중국의 굴기가 엇갈린 해가 2008년이에요. 그때부터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거칠어집니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면서 싫은 건 싫다고 말하죠.”
▼한국과 중국은 경제로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계속 갈등을 빚으면 서로에게 손해죠.
“두 나라는 서로 필요한 게 많아요. 아직도 보완적 관계가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과장해 말하면 우리가 발전한 데는 일본 도움이 컸습니다. 경험을 복사해왔으며 자본과 기술을 들여왔죠. 일본을 따라잡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나 우리가 일본을 극복했다고 얘기할 순 없습니다. 한국과 중국도 비슷해요. 중국이 한국 발전 모델을 참고했습니다. 한국과의 경제협력은 앞으로도 중국에 필요해요. 위안부 문제 등으로 감정은 나쁘나 한국, 일본의 상호 의존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일관계가 갈등 속에서도 그럭저럭 이어지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드 이후 한중 관계도 한일 관계와 비슷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한중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 한국·중국·미국의 공감대에서 비롯했다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공감대가 사라지거나 약화하는 추세를 바꿀 수 있을까요.
“국제정치 양상은 복잡해요. 이중 구조로 이뤄졌습니다. 세계화가 하나, 권력 전이가 다른 하나예요. 세계화 시대는 윈-윈이 가능합니다. 협력할수록 이득인 거죠. 경제 분야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권력 전이는 제로섬 게임입니다. 윈-윈, 제로섬 두 세계가 복잡하게 얽힌 게 당대예요. 미중 관계를 봅시다. 파워 게임을 할 때는 굉장히 적대적인데, 경제 분야에선 굉장히 얽혀 있습니다. 협력, 갈등, 경쟁, 견제가 뒤섞였어요. 복잡한 관계를 단순하게 봤다간 큰코다칩니다. 트럼프 행보가 위험해 보이는 까닭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 들여다봐서예요.
한국 외교는 영리해야 합니다. 권력 전이만 들여다보면 중국 편들까, 미국 편들까 고민하게 됩니다. 어느 쪽 편들어도 손실이 납니다. 한국이 양자택일의 순간으로 몰려선 안 돼요. 출병을 거절하면 망하고 요구에 응해 전쟁에 나서도 망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사전에 준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미중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치명적 손실이 발생할 겁니다.”
▼미국, 중국 전략 갈등이 군사 충돌로 비화할 수도 있다고 봅니까.
“일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패권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깁니다만 ‘안 올 것이다, 안 올 수 있다’고 봅니다. 왜 안 오느냐? 핵무기에 의한 공포의 균형 탓에 미국, 중국이 전쟁하면 다 죽습니다. 승자가 없어요. 극단적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대목에 한국의 활로가 있습니다. 속된 말로 ‘복덕방 외교’를 해야 합니다. 중개 외교의 슬로건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겁니다. 복덕방은 사는 사람, 파는 사람이 윈-윈 할 때 잘 돌아가요. 어느 한쪽이 이익 보고, 다른 쪽이 손해 보면 중개 한 번 하고 문 닫아야 합니다.
균형 외교와 중개 외교는 다릅니다. 균형 외교는 19세기 영국처럼 우리가 한쪽 손을 들어주면 승패가 뒤바뀔 때 가능합니다. 한국이 중국을 편들면 베이징이 승리하고, 워싱턴을 편들면 미국이 승리하는 구도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거예요. ‘까불지 마, 둘 다 가만히 있어’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얘기라는 겁니다. 한국은 균형자(balancer) 구실을 할 힘을 갖지 못했어요. 우리는 어느 쪽에 서도 승패와는 무관합니다. 균형 외교는 이론적으로 뭔가 착각한 것입니다.
복덕방 외교는 자본금이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개 외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신용과 아이디어로 미국과 중국이 윈-윈 게임에 나서도록 하는 게 한국 외교가 지향할 길이에요.”
▼중국과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1990년대 중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중국이 북한과 특수 관계에 있다는 걸 잘 안다. 한국과 미국도 마찬가지다. 북·중 관계, 한미 관계에 대해선 서로 얘기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 때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서로 다른 점은 건드리지 말자는 겁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점이 뭐냐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한미동맹과 북·중 특수 관계를 왈가왈부하면 판이 깨진다는 상호 이해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같은 상호이해가 사라지는 형국입니다. 그게 큰 문제예요.”
▼중국 학자들이 북한을 두고 ‘조강지처(糟糠之妻)’라더군요.
“천안함 사건 직후 중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하려는데 아내가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아무 말하지 않는 나라가 무슨 친구라고 새벽부터 달려가느냐’고 힐난하더군요. 그 말이 맞아요. 칭하이(靑海) 대지진 조문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단상에 올라 지진으로 입은 피해에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측에서도 천안함 사건에 유감을 표명하리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아무 말도 없는 겁니다. 다음 날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오찬이 있었는데 인사말을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친구라면 벗이 돌에 맞아 피 흘리고 쓰러지면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묻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중국 정부만 아무런 코멘트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랬더니 중국 친구들이 난감해하더라고요.
그날 오찬을 함께한 중국 친구와 나중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때도 조강지처 얘기가 나옵디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한국은 애인이지만 북한은 조강지처다. 조강지처가 악독하고 포악해 이혼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혼이 그렇게 쉽냐. 고민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그런데 너희는 이혼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보고만 이혼하라고 하느냐, 그건 경우에 맞지 않는다.’ 그 얘길 듣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 싶더군요. 우리는 이혼 안 하고 재미만 보면서 상대에게는 이혼을 요구하는 게 상식으로도 맞지 않죠. 중국인이 말하는 조강지처 얘기의 함의가 이렇듯 큽니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베이징이 평양과 이혼할까요.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 중국이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이혼하든, 구박하든 제 마누라니 제가 알아서 하게 나둬야 합니다. 제3자가 이혼하라, 마라 하면 엇나갈 수 있습니다. 북한을 두고 중국을 압박해선 안 돼요. 다만 조강지처를 계속 데리고 살면 앞으로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 알려줘야 합니다.
누구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던데 중국은 1992년 북한을 한 번 버렸습니다. 두 번 못 버리란 법 없어요. 북한과의 관계가 국익을 위협한다면 평양을 포기할 겁니다. 미국이나 한국이 버리란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국익에 따라 결정하는 겁니다.
한미동맹도 똑같습니다.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점을 중국에 노골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한중 관계는 구동존이로는 안 됩니다. 요즘엔 구동화이(求同化異·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해 나가자)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구동화이가 말이 됩니까. 다른 점이 어떻게 같아져요?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구동화이를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더욱 노골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너하고 나는 달라, 이것도 다르고 저것도 달라, 그럼에도 잘 지내자’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서로 조화를 이루나 같아지지는 않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이좋게 지내되 의(義)를 굽혀 좇지는 아니한다가 돼야 해요. 화이부동 원칙으로 한중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절정기의 70%까지 복원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을 향해 “초심을 잃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나 역시 초심을 강조합니다만 내가 말하는 초심과 중국이 말하는 초심은 다릅니다. 구동존이에 따라 사드는 핵심 이익을 위협하는 문제니 그만두라는 게 중국이 말하는 초심인데, 나는 ‘존이’에 방점을 찍습니다. 사드 배치는 우리의 주권적 사안입니다. 북한이 중국을 어떻게 하든 그것이 중국의 주권적 사안인 것과 똑같습니다. 상대국의 주권적 결정을 존중하는 게 내가 말하는 초심입니다.”
▼평양은 세력 전이 상황을 적극 활용해 핵 개발에 속도를 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 강대국 간 갈등을 확대·재생산합니다. 전략적 공감대의 붕괴로 인한 세력 개편 양상이 함축적으로 표출된 게 사드 문제예요. 사드 이전, 이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봄날은 갔다’입니다. 봄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다만 최절정기의 60~70%까지는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북한 핵을 결국 용인할까요.
“중국 내부에 고민이 많을 겁니다. 북한이 핵무장을 완성하면 동아시아에 주는 파급이 상당합니다.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날지 지켜봐야겠으나 최대한 버티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수준에서 움직일 겁니다. 북한이 응답하지 않으면 원유 공급 중단까지도 갈 것이라고 봅니다. 제재와 설득에도 북한이 막무가내로 나오면 끝까지 버티다가 북한을 버릴 겁니다. 북한을 포기할 확률이 60%가량 된다고 봐요. 중국 국력이 커졌으나 앞으로 10년은 미국과 협력해야 합니다. 미국과 틀어지면 중국이 입을 상처가 큽니다.”
▼베이징이 평양을 포기하게 하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 전술핵 배치, 더 나아가 핵무장을 하겠다고 베이징에 명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핵무장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핵무장 의지를 밝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북한을 포기하는 쪽으로 중국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시진핑 체제가 반(反)부패운동을 광범위하면서도 과감하게 진행합니다. 베이징은 청렴정부 건설을 위한 단호한 개혁이라고 말하고 국민 대다수도 환호하고 있지만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됨으로써 정치 발전이 퇴행하거나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습니다. 서구 언론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21세기 중화제국’ 황제 격이 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마저 나옵니다. 현재 시진핑의 통치 방식을 보면 지나치게 정적(政敵)을 많이 만들면서 자기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합니다. 이전까지 중국 정치를 들여다본 틀에서 보면 중국 정치가 불안정해야 정상인데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오쩌둥 시대를 차이나 1.0, 덩샤오핑 시대를 차이나 2.0, 시진핑 시대를 차이나 3.0으로 나눠봅시다. 차이나 2.0을 받쳐준 것은 개혁·개방이었습니다. 개혁·개방을 통해 체제 옹호 세력을 키워냈고, 그것이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차이나 3.0 시대, 베이징은 개혁·개방이 심화·확대·발전한다고 말하지만 진행이 잘 안 됩니다. 차이나 2.0 때까지만 해도 개혁·개방을 주도한 게 공산당이었습니다. 차이나 3.0 시대에 진입한 후 공산당이 기득권 세력이 돼버렸습니다. 말로만 심화·확대·발전이지 공산당이 개혁·개방에 저항하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개혁·개방을 심화·확대·발전시키겠다는 구호가 안 통하죠.
공산당이 기득권 세력이 된 결과가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입니다. 권력 집중을 통해 더 큰 개혁을 하자는 게 중국 논리인데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어요. 1인에게 힘이 집중되면 권력 자체가 불안정해집니다. 개혁·개방을 심화·확대·발전시키려면 권력 집중이 필요한데, 권력 집중을 하려니 개혁·개방이 안 되는 딜레마에 봉착한 겁니다. 시진핑 1인 체제가 구축되느냐는 지켜볼 일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공산당이 몰락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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