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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피는 마을

중국인들은 흔히 “술이 없으면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无酒不成席”라고 말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술을 즐겨 마시며 특히 손님을 접대할 때는 술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이때 나오는 술은 고농도의 (보통 58도가 평균인) 백주이다. 고량이 주 원료이기때문에 한국에는 고량주라고 통칭되기도 하는 술이다.

특히 술 자리에 참석한 모든 중국사람들이 초대된 한국인에게 한잔을 동시에 권하는(중국인 다섯 명이면 한국인은 다섯 잔을, 여섯명이면 여섯 잔을 차례로 원샷해야하는) 중국인들의 희한한 ​수작(酬酌)​에 한국인들은 이런 중국 술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불성으로 취해버리기 일 수 이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술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뜻의 '천지미록'(天之美禄)이라 칭송했다.


술의 신선(酒仙)이라 불리는 이태백(李白)은 장진주(将进酒)에서 “예로부터 성현들은 죽고 나면 모두 잊혀지지만 오직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은 이름을 남겼다.(古来圣贤 皆寂寞,惟有饮者留其名)”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언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까?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한족들이 자신들의 시조라 여기는 황제(黄帝)가 처음으로 술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는 한나라 때의 황제내경(黄帝内经)이란 책에 황제가 술 담그는 방법을 놓고 신하들과 토론했다는 내용에 근거한다. 또 하나의 유력설로는 두강(杜康)을 가장 먼저 술을 빚은 사람으로 여긴다. 이는 후한시기의 설문해자(说文解字)라는 사전에 소강이 수수로 술을 만들었는데 소강은 두강을 말한다(少康始作作穗酒 少康杜康也)라는 풀이가 있다.

두강은 역사적으로는 소강(少康)으로 불리며 3000년 전 하(夏)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하나라가 망하자 두강은 유우씨(有虞氏)에게 도망가 주방과 곳간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어느 날 곳간에 넣어둔 음식에 곰팡이가 슬어 벌을 받게 되었는데 새끼 양 한 마리가 곳간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핥아먹고 쓰러져 버렸다. 두강이 신기하여 그 액체의 맛을 보았더니 단 맛이 났고 계속 마신 두강은 취하여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두강은 몸에 기운이 도는 것을 느꼈고 계속 연구하여 마침내 양조기술을 개발해 내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주신(酒神)으로 떠받들었고 지금도 중국에서 두강은 술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1983년 섬서성(陕西省) 미현(眉县) 양가촌(杨家村)에서 신석기 시대 앙소(仰韶) 문화의 유물로 알려진 술 전용 도기(陶器)가 출토되면서 술의 역사는 바뀌게 된다. 지금부터 대략 6000년 전부터 이미 술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추정이 맞다면 중국 술의 역사는 서양의 맥주와 포도주의 역사와 거의 비슷해진다.

처음 중국에서 빚어진 술은 곡물을 발효시켜 만들었고, 이후 하(夏)나라 때부터 진(秦)나라 때까지는 누룩을 이용하여 술을 빚었는데, 이 때의 술은 주로 제사용으로 쓰이거나 일부 특권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술을 뜻하는 한자 주酒에서도 알 수 있는데, 주酒는 유酉라는 글자에서 비롯됐다. 酉는 밑이 뾰족하고 목이 긴 항아리에서 온 상형문자로 이 항아리에 물을 뜻하는 삼수 氵변이 붙어 酒가 된 것이다. 한 부족의 우두머리를 추장酉长이라하는데, 이는 추장의 추酉가 항아리의 주둥이 위로 향기가 올라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즉 추장은 술을 담그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바로 술을 담궈 제사를 받드는 사람으로 무리의 으뜸이라는 소리다.

이후 위진(魏晋) 무렵부터는 민간에까지 술이 널리 보급되었고, 북송(北宋) 시기에 이르러서는 황주(黃酒), 과주(果酒), 약주(药酒), 포도주와 같은 특색 있는 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의 중국술은 알코올 도수가 대략 15도 내외인 비교적 도수가 약한 술이었다.

하지만 남송(南宋)시기에 서역(西域)으로부터 증류기(蒸餾器)가 유입되어 백주(白酒)가 정식으로 선을 보이게 되면서 알코올 도수가 30도 이상인 독주가 만들어졌다. 이 때부터 중국인들은 독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국 술이 다 독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미주(米酒)라고도 불리는 중국의 황주(黃酒)는 포도주 그리고 맥주와 더불어 양조기술로 만든 세계 3대 술로 알려져 있다.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찹쌀, 북부지방에서는 차조를 주원료로 발효에는 보리 누룩을 써 색깔이 짙은 황색을 띠기에 황주라 부른다. 알코올 도수는 비교적 낮아 14-16%정도로 맛이 진하면서도 부드럽다. 대표적인 황주는 절강성(浙江省) 소흥(绍兴) 지방에서 생산하는 소흥주(绍兴酒)이다. 소흥주중에서도 다른 소흥주보다 찹쌀을 좀더 많이 사용하여 밥을 더 넣었다는 뜻을 가진 가반주(加饭酒)를 가장 고급품으로 친다. 소흥 지방에서는 예부터 딸을 낳으면 가반주를 빚어 미녀나 꽃을 그려넣은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 두었다가 딸이 혼례를 치루는 날 꺼내어 손님에게 접대를 하는 풍습이 전해진다. 이렇게 담근 술을 일컬어 여아홍(女儿红)이라고 한다. 꽃을 조각한다는 의미의 화조주(花雕酒)라고도 하는데 이는 ‘꽃이 떨어진다’는 의미의 ‘화조(花凋)’의 의미도 가지고 있어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애석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한국에서 중국 식당에 가면 “빼갈을 마실까? 아니면 고량주를 한 잔?”과 같은 대화를 종종 듣게 된다. 그러나 사실 빼갈이나 고량주 모두 중국의 백주(白酒)를 지칭한다. 즉 중국의 북방지역에서는 처음 백주가 나왔을 때 그 색이 맑고 투명하여 白干儿(báigānér)라고 불렀고, 이후 이 말이 산동지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음변이 현상이 나타나 ‘빼갈’이 된 것이다. 또한 백주의 주원료가 高粱(gāoliáng, 수수)이기 때문에 백주를 高粱酒라고도 불렀는데, 이 역시 음변이 현상이 나타난 우리나라에서는 ‘고량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모두 백주(白酒)라고 부른다.

최근 시진핑-김정은 오찬때 건배주로 이름을 떨친 귀주성(贵州省)의 마오타이주(茅台酒)나 한국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사천성(四川省)의 우량예(五粮液), 수정방(水井坊), 무협지 영웅호걸들의 술인 죽엽청(竹叶青)주, 진시황과 시진핑의 술이라는 싼시성(西省)의 시펑주(西酒)​등 이름난 중국 백주들의 뿌리이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술은 산시성(山西省) 분양(汾阳)현 행화촌(杏花村)에서 나오는 펀주(汾酒)다.

펀주가 나오는 행화촌​은 중국사람들에게 술의 고향으로 인식되는 곳인데, 이를 세상 널리 알리는데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 803-853년) 만큼 큰 이바지를 한 이는 없다. 지금도 세상 널리 음송되는 그의 시 ‘청명(清明)’ 때문이다.

청명을 맞았는데 빗방울 분분히 떨어지니 (淸明時節雨紛紛)

길 가는 나그네는 가슴만 더욱 아프네.
(路上行人慾斷魂)

어디쯤 비 피할 곳이 있는가 물었더니
(借問酒家何處有)

목동 녀석은 말없이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는구나. (牧童遙指杏花村)

이 시는 천 년 넘게 거듭 사람들에게 읊어지면서 살구꽃 피는 마을 행화촌과 더불어 ‘행화촌의 술’ 펀주를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게 해주었다.

술에 대한 역사가 그 어느 나라보다 오래 기록에 남아 있는 중국, 그러나 현재 중국은 과거와 달리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 술을 곁들이는 것이 보통이며, 생맥주 전문점을 제외하면 술과 안주만 파는 술집도 거의 없다. 또한 밤늦게까지 밖에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드물고, 술집을 몇 차례 순례하는 습관도 없다. 오히려 음주가무가 민족의 전통인 우리나라가 ‘술의 천국’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곳은 우리나라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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