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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에서 환율로 전장의 폭을 넓히다

“한 국가가 자국 통화를 다른 국가의 통화보다 경쟁력을 얻게 하려고 가치를 평가 절하시키는 통화 전쟁은 국제 경제에 가장 파괴적이고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

베스트셀러 “Currency Wars: The Making the Next Global Crisis(번역서: 커런시워)”에서 제임스 리카즈가 한 말이다. 미중 간의 무역 전쟁이 심화되면서, 최근 중국이 미국 달러 대비 위안화의 가치를 평가 절하했다는 점에서 현재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리카즈는 계속해서 통화 전쟁은 “국가들이 앞다퉈 이웃 국가를 거지로 만들기 위해 통화 평가 절하에 나섰고, 관세를 부과해 세계 무역을 붕괴시켰던 대공황의 유령을 떠올리게 한다. 통화 전쟁에 절대 긍정적인 요인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월요일 중국 중앙은행은 기준 환율을 미국 달러 대비 7위안 ‘근접’(破七)으로 고시하면서, 2008년 이후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평가 절하했다. 위안화의 가치가 하락할수록 생산한 제품이 외국 구매자들에게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등과 같이 중국이 미국에 비해 우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산 수입품 3,000억 달러 상당에 추가로 10%를 부과할 것이며, 9월 1일부터 발효될 것이라고 발표한 이후 나온 것이다. 2,50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이미 부과된 25% 관세에 추가될 예정이다.​이로 인해 전 세계 주식 시장은 급락했는데, 투자자들이 중국의 결정을 보고 양국 간의 무역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부 장관은 중국이 위안화를 평가 절하한 목적은 “국제 무역에서 불공정한 경쟁 우위를 갖기 위한 것”이라면서, 중국을 통화 조작국으로 지정했다.

​미국이 중국을 통화 조작국으로 지적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를 떠올려 보면, 트럼프 대통령 역시 선거 공약 중 하나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선임 중국 이코노미스트 줄리안 에반스-프리차드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선제적으로 위안화 가치 절하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환율을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 리서치 회사에서는 올해 말 달러 대비 7.3위안까지 가치가 더 절하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코웬 워싱턴 리서치 그룹의 크리스 크뤼거는 트럼프의 관세 위협에 대한 중국의 보복 강도는 1에서 10까지로 매기자면, 11에 해당하는 “과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닐 쉬어링은 여기에 덧붙여 투자자와 소비자들에게 잠재적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맞대응 전략 일색의 무역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중요한 특징이었던 세계화 확산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면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위안화 평가 절하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국영 기업들에게 미국 농산물 구입을 완전히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미국산 대두, 면화, 피혁, 곡물, 돈육 또는 유제품을 더 이상 수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피해를 입고 있는 미국 농가에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상된다.
​2019년 상반기 미국은 중국에 590만 톤의 대두를 수출해 2년 전 동기 70%나 줄었으며, 2004년 이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의 다른 주요 농산물 중에서 대두를 가장 많이 수입해 왔지만, 최근 들어 브라질을 포함한 남미 국가들로부터의 수입 물량을 높이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10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은 미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 지위에서 내려왔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미국의 중국 제품 수입 물량은 전년 대비 12% 감소한 한편, 수출 물량은 18% 감소했다. 양국의 무역 총량은 약 2,900억 달러로, 캐나다와 멕시코 보다 낮아졌다.
​미국 내 중국의 해외 직접 투자 역시 지난 몇 년 동안 가속화되었지만, 최근 들어 급감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내 중국의 투자 금액은 지난해 54억 달러를 기록해, 2016년 455억 달러에서 8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역 전쟁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서, 미국 장단기 국채 금리차가 2007년 이래 볼 수 없었던 최대 수준으로 역전되었다. 지난 월요일 3개월 만기 국채 금리가 10년 만기 국채 금리보다 28bp 더 높아졌고, 금융 위기 이전 이후 가장 큰 역전 현상을 보이고 있다. (베이시스 포인트(bp)는 금리의 일반적인 척도 단위로, 1bp는 1%의 100분의 1(0.01%)을 의미한다.)


경고 신호가 조금 더 커지면서, 투자자들은 금과 지방채 같은 안전 자산을 찾고 있다. 화요일 금 가격은 온스당 1,481달러로 2% 상승해 6년 내 고점을 기록했고, 1,500달러 저항선에 도전하고 있다.

​미국 지방채 가격도 상승하고 있다. 주 및 지방 정부 채권 금리는 지난 4월 이후 최대 일간 움직임을 보였고, 2011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국채와 마찬가지로, 지방채도 금리가 하락하면 가격이 상승한다. 과거 지정학적, 경제적 혼란 시기가 되면, 지방채가 투자자들에게 훌륭한 역할을 해왔다.


미 재무부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것은 예상 밖의 조치였다. 환율조작국 지정 요건과 제재 방법을 가장 구체적으로 담은 2015년 교역촉진법상으로는 중국은 아직 여기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①대미 무역흑자 200억달러 이상 ②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3% 이상 ③GDP 대비 2% 이상의 달러 매수 개입이라는 세 필요 요건 중 첫 번째에만 해당한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이번에 꺼내 든 것은 1988년의 종합무역법이었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국이자 유의미한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이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종합무역법 규정을 환율조작국 지정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31년 전 법을 근거로 삼아서라도 중국에 '환율조작국' 간판을 붙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9월부터 아직 보복 관세를 부과하지 않은 3000억달러어치 중국산 제품에 대해서도 10%의 추가 관세를 매기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직후 중국의 위안화 환율은 달러당 7위안 선을 넘어, 위안화 가치가 금융위기 때인 2008년 이후 11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중국 정부가 위안화 약세를 방치해 미국의 대중 보복 관세 효과를 상쇄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일어나자,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환율조작국 지정이라는 새 칼을 빼든 것이다.
이번 미·중 충돌은 외형상 무역·통화 전쟁이지만 그 본질은 현재의 패권국가와 이에 도전하는 신흥 부상국가 간의 패권 전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경제·군사·과학 등 각 분야에서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미국의 GDP(국내총생산)는 20조달러, 중국은 13조달러로 경제 규모로 중국이 미국의 3분의 2 수준이다. 그러나 물가 등을 감안한 구매력 평가(PPP) 기준으로 계산하면 중국이 오히려 23조달러로, 19조달러인 미국을 이미 넘어섰다.

중국이 미국에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관세 부과와 환율조작국 지정뿐 아니라 화웨이 제재, 과학·기술 인력의 미국 입국 제한, 영유권 분쟁이 있는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 작전' 등 전방위로 중국을 압박하는 것도 패권 전쟁의 속성을 말해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급하게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이면엔 내년 대선에 대한 이해관계도 깔려 있다. 중국은 이날 미국산 농산물 구매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 기반인 아이오와주 등 팜벨트(Farm Belt·농장지대)를 겨냥한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조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선두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비해 10%포인트 안팎 밀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팜벨트가 무너질 경우 재선은 물 건너가게 된다.

미국은 중국과 1년여 무역 전쟁을 벌여왔지만 지난해에도 미국이 기록한 9000억달러의 무역적자 가운데 중국이 4190억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중국은 우리 사업과 공장을 훔치고 일자리를 해치며 우리 노동자의 임금을 떨어뜨리는 한편 농부들의 (농산물) 가격에 해를 끼치기 위해 환율 조작을 항상 활용해왔다"며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비난한 것은 미국 내 표심을 겨냥한 것이다.

반면 집권 이후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내걸고 G2 지위에 걸맞은 대접을 미국에 요구해 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으로서도 호락호락 물러설 수 없는 처지다. 무역·환율 전쟁에서 자칫 패장으로 비칠 경우 홍콩 시위나 대만 문제를 포함한 대내외 현안을 해결할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미·중이 당장 포성을 울리며 환율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미국으로선 환율조작국 지정이 이뤄졌다고 당장 중국을 제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도 2020년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풍족함)사회'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6.2%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 양측이 상호 궤멸적인 손상을 입는 파멸적인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의 이번 조치는 상징적(symbolic)인 차원"이라고 풀이했다. FT는 코넬대 무역학과 에스와르 프라사드 교수를 인용해 "환율조작국 지정은 중국에 더 많은 관세를 때리기 위한 정치적인 정당화 수단"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