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일 난징을 출발하여 충칭에 도착할 예정으로 창장 유람에 나선 ‘둥팡즈싱’(东方之星)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건 그날 밤 9시 28분쯤이다. 456명을 태우고 운항하던 유람선은 강한 회오리바람과 폭우를 맞고 휘청이더니 이내 깊은 강물 속으로 침몰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배는 인양됐고 사망자 434구의 시신이 수습됐다. 민관군이 참여한 추모 행사도 3분간의 묵념으로 마무리됐다. 이제 실종자 8명을 찾기 위한 수색작업만이 진행되고 있다.
'둥팡즈싱’호 처리 과정을 보면 중국 정부는 배가 침몰하자마자 작년 한국의 세월호 사고를 완벽 분석하고 작성해둔 여객선 사고처리 메뉴얼이 있는 듯 신속하게 사고수습을 했다. 그리고 사고 발생 1주일 만에 충격과 애도의 분위기가 채 가실 새 없는 짧은 일주일만에 중국인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렇치만 짧은 일주일새 안한 것도 없다. 희생자를 추도하기위한 애도의 날을 정해 6월 6, 7일 첫 주말엔 CCTV를 비롯해 상하이의 둥팡위성, 장쑤위성, 장시위성 등 다수 TV 방송들은 오락 프로그램 방송을 중단했다. 이제 중국 언론엔 여객선 침몰사건은 사라지고 대학입시(가오카오, 高考)와 중국인들관 그리 큰 연관도 없는 한국의 메르스(MERS) 뉴스로 채워지고 있다.
‘둥팡즈싱 호’가 침몰했을 때 중국 구조당국은 처음부터 3가지 구조 방안을 확정했다. 잠수요원을 동원한 수중 수색과 수면 위에 떠 있는 배 밑 바닥을 뚫고 구조하는 방안, 크레인선을 동원해 배를 통째로 인양하는 방안으로 일사불란하게 3가지 구조 방식이 동시에 진행됐다.
가장 먼저 잠수 요원 13명이 현장에 도착한건 사고 발생 14시간이 지난 뒤인 6월 2일 오전 11시 20분쯤이다. 이후 중국 전역 각 부대 구조 병력 약 230여 명이 침몰 현장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주로 구조와 의료 지원 임무를 맡았다. 그 중에서 잠수 요원은 150여 명 정도였다. 이들은 수중 작전을 펼치는 해군 잠수요원들로 음파탐지기를 비롯해 수중 탐색과 천공 장비 등 전문 구조 장비를 갖췄다. 이들 잠수요원의 수중 탐색으로 초기대응을 했다. 최종 생환자 14명 가운데 2명이 뒤집힌 선박 안에서 잠수요원이 진입해 구조한 것이다. 나머지 12명은 배가 전복될 당시 헤엄쳐 뭍으로 올라오거나 강물에 표류하다 발견돼 구조된 사람들이다.
사고 발생 36시간이 지날 무렵인 3일 오전 9시, 침몰 현장에서 두 가지 구조 방안이 잠정 결정됐다. 선체에 구멍을 내는 절단과 선체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인양 방침이다. 하지만 잠수 요원은 선체로 계속 투입됐다. 골든타임 72시간이 경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48시간을 전후해 구조당국은 선체 절단과 인양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 시작했다. 3일 오후부터 2척의 500톤급 대형 크레인선 와이어로 선체를 묶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선체 절개 작업이 3일 저녁에 바로 시작됐다. 구조당국은 전복돼 물 위에 드러난 선체 바닥 3곳의 절개 지점을 확정하, 이날 밤 9시경 첫 번째 구멍을 절단했다.
하지만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탐색 이후 곧바로 절단면을 다시 봉합했다. 선내 공기가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다. 두 번째 탐사 구멍은 사고 발생 58시간이 지난 4일 오전 7시 20분 전후로 절개했다. 하지만 역시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다시 3번째 탐사 통로를 냈지만 생명의 흔적은 역시 찾지 못했다.
선체 절개도 실패하면서 남은 카드는 선박 인양으로 모아졌다. 4일 오전, 이미 침몰한 선박의 수중 부분 8개 지점에 와이어를 묶는 용접이 시작됐다. 선체를 인양하기 위한 준비작업이 시작된 셈이다. 이후 골든타임인 사고 발생 72시간이 막 지난 4일 밤 10시 무렵, 허젠종(何建中) 중국 교통운수부 부부장은 현장을 돌며 인양을 직접 지휘했다.
이날 밤부터 선체를 바로잡아 인양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사실상 생존자가 없음을 선언한 셈이다. 구조당국은 사건 발생 닷새째인 5일 오전 침몰 유람선을 인양했다. 인양하자마자 바로 선체 수색에 나서 사망자 시신을 대부분 수습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군사작전이었다.
한국의 세월호 사고를 철저히 분석하여 중국은 이미 구조 매뉴얼을 가지고 사고 초기부터 대응한 듯 보였다. 한국의 ‘세월호’ 구조방식과 중국의 ‘둥팡즈싱 호’ 구조 방식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것이 낫다고 결론 내리기도 쉽지 않다. 처한 상황과 환경, 나라의 정책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중국 당국의 언론통제다. CCTV에게만 현장취재를 허용했고, 기타 매체들의 기자들은 철저히 격리시켰다. 어차피 정부발표를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받아쓰는 기자들은 필요없다는 투였다. 한국 기자들을 포함한 외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또 다른 재난에 직면해 있다. ‘메르스’(MERS)다. 중국은 이미 2003년 ‘사스’(SARS)로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우리가 당시 중국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그 당시 교훈 삼아 만든 전염병 대처 매뉴얼은 과연 있을까. 중국을 보고 배우지않는 허세의 한국 정부와 한국을 보고 배우는 실리의 중국정부.. 어쩌다 우리나라가 이지경까지 되어버렸을까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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