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진핑의 집권에 반기를 들었던 신4인방 제거완료, 성공적


중국 공산당은 부패 혐의로 조사하던 링지화(令计划) 전 통일전선부장에 대해 공직과 당적을 모두 박탈하는 '쌍개(双开)' 처분을 내렸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21일 보도했다. 이로써 저우융캉(무기징역) 전 정치국 상무위원, 보시라이(무기징역) 전 충칭시 서기, 쉬차이허우(방광암 사망)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 시진핑 국가주석의 집권에 반기를 든 것으로 알려진 '신(新) 4인방'은 모두 몰락했다. 시 주석은 집권 2년반 만에 정적(政敵) 처리를 끝낸 것이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비서실장을 지낸 링지화의 혐의는 뇌물수수, 기밀 규율 위반, 간통 등이다. 신화통신은 "링지화가 직무를 이용해 거액의 뇌물을 받았고, 당과 국가의 핵심 기밀을 대량으로 취득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수의 여성과 간통하고 '권색(全色·권력과 성) 교역'을 했다"고 밝혔다. 링지화 애인으로 알려진 CCTV 여기자 펑줘(冯卓)는 작년 12월부터 '실종 상태'라고 인민망 등이 전했다.(http://www.xilu.com/20150721/1000010000846108_2.html)​


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는 이날 '공산당과 부패는 물불처럼 섞일 수 없다'는 제목의 평론에서 "링지화 처벌은 '괄골요독(刮骨疗毒·뼈를 긁어내 독을 치료함)'의 용기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괄골요독은 삼국지의 관우가 독화살 맞은 팔을 치료할 때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에 앞서 시진핑 주석은 18일 탱크 호위를 받으며 쉬차이허우 근거지였던 동북의 16집단군(군단)을 시찰했다. 시 주석은 쉬차이허우가 근무했던 16집단군 장병에게 "사상·정치·조직·업무에서 쉬차이허우의 영향력을 철저히 숙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쉬의 기율 위반과 위법 행위가 중국군에 전면적 해를 끼쳤다"며 이같이 밝혔다.

작년 6월 하순 중국의 인터넷에 이런 글귀가 돌아다녔다. “정책에 문제가 생겼으니 방침이 어찌 좋으랴. 계획 완성이 어려우니 노선이 걱정이로다. 사람들을 불안케 하누나(政策出了问题 方针可好 计划难以完成 路线甚忧 令人不安).”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참요과 같이 민중들이 세도를 부리던 권력자 가문이 쓰러지는 것을 노래하는 듯 한대, 이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링지화(令计划) 가문을 말하는 것 정처(政策)·팡전(方针)·완청(完成)·루셴(路线)을 나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마지막 구절은 “링(令) 가문이 불안에 떠는구나”란 뜻이 된다.

누군가가 이 글귀를 지어 인터넷에 띄운 건 반부패 드라이브의 최선봉인 공산당 중앙기율위가 산시(山西)성 정협 부주석 링정처를 입건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작년 12월 22일 링 집안의 불안은 현실이 됐다. 가문의 영광이던 링지화 통일전선공작부장이 서슬 퍼런 기율위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신세로 추락했다. 저우융캉전 상무위원에 이은 다음 사냥감이 될 것이란 예상 그대로였다.

링지화 몰락의 발단은 후진타오 전 주석의 임기 말년인 2012년 3월 18일 오전 4시쯤 일어난 교통사고였다. 베이징의 북사환(北四环) 순환도로를 달리던 페라리 승용차가 갑자기 고가도로 교각을 들이받고 전파됐다. 즉사한 운전자 링구(令谷)는 링지화의 외동아들이었다. 동승한 여대생 2명 중 한 명도 치료 중 숨졌다. 20대 청년에 불과한 권력자의 아들이 수억원대의 페라리를 몰다 사고를 냈다는 소식은 동승 여대생들이 발가벗고 있었으며, 아마도 구강성교중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까지 보태져 인터넷에서 삽시간에 퍼졌다. 이와 함께 링지화의 형제자매들이 그의 권력을 뒤에 업고 부정축재를 했다거나 부인이 공익기금의 부이사장을 지내면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긁어모았다는 사실이 퍼져 나갔다. 링이 시진핑(习近平) 국가주석의 반부패 사정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이유다.

그해 11월로 예정된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총 25명)으로의 발탁이 확정적이던 그의 출세가도도 끝이 났다. 그는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통일전선부장으로 옮기는 사실상의 좌천인사를 당했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에게 올라가는 모든 서류를 미리 챙기고 면담 일정을 조정하는 비서실장 역할이다. 양상쿤(杨尚昆)·차오스(乔石)·원자바오(温家宝)·쩡칭훙(曾庆洪) 등 쟁쟁한 역대 권력자들이 이 자리를 거쳤다. 시 주석은 핵심 측근인 리잔수(栗战书)를 이 자리에 앉혔다.

링은 철저히 후진타오의 사람이었다. 후는 월급 18위안(약 3200원)의 인쇄공장 직공 출신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링은 후의 10년 집권기간(2002~2012년)에 부주임과 주임으로 재직하며 ‘분신’ 역할에 충실했다. 후와 링을 잇는 정치적 고리는 공산주의청년단이다. 후는 공청단 제1서기를 지냈고, 링은 공청단 지방조직에서 시작해 중앙선전부장을 지내며 잔뼈가 굵었다.

 링지화의 몰락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공청단은 장쩌민 전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上海)방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최대 계보다. 따라서 시 주석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굳히는 과정에서 공청단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산이다. 시 주석은 취임 초기만 해도 당내 기반이 약한 편이었다. 7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왕치산(王岐山) 기율위 서기 이외엔 그의 정치적 맹우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공청단 출신이고 나머지 상무위원들은 대체로 장쩌민 전 주석의 추천이나 영향력으로 발탁된 경우였다.

시 주석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래 2년 동안 고위 간부 60여 명이 줄줄이 걸려들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호랑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과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군부 2인자)이다. 두 사람 모두 범 장쩌민 계열의 인맥으로 분류된다. 상하이 총서기를 지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당의 대권을 잡은 장은 쩡칭훙과 황쥐(黄菊) 등 상하이 시절의 부하들을 중앙정계로 끌어올려 파벌을 형성했다.

또 장쩌민의 집권기간 동안 함께 일했거나 발탁된 간부들도 상하이방과 함께 인맥을 이뤘다. 장은 이를 통해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태상황’으로 불려 왔다. 실은 시 주석이 대권을 쥐는 과정에서도 장쩌민 인맥인 쩡칭훙 전 부주석이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저우융캉 조사설이 나돌 때만 해도 ‘설마 잡아들이기야 하랴’며 반신반의하는 기류가 강했다. 이를 뒤집고 저우를 제물로 삼음으로써 장쩌민 파벌을 약화시키고 시 주석은 1인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 뒤 남은 세력은 공청단이다. 3년 뒤인 2017년 19차 당대회에선 상무위원 7명 가운데 시 주석과 리커창 총리를 제외한 5명은 물러나야 한다. 이른바 ‘육상칠하(六上七下)’, 즉 68세면 물러나야 하는 공산당의 내부 규칙 때문이다. 이 다섯 자리를 놓고 경합 중인 유력 인물 가운데 공청단 출신으론 리위안차오(李源潮) 부주석과 왕양(汪洋) 부총리, 후춘화(胡春华) 광둥성 서기가 있다. 특히 후춘화는 쑨정차이(孫政才) 충칭시 서기와 함께 2022년 20차 당대회에서 포스트 시진핑을 넘보는 주자다. 만약 이 세 사람이 모두 상무위원이 되면 리커창 총리와 함께 7석 중 4석을 공청단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시 주석으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 주석은 그전에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정치적 카리스마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굳이 공청단 출신을 배척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안거나 정치파벌로서의 응집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성역 없는 반부패 전쟁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신4인방에 대한 숙청을 직접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을 처벌함으로써 시 주석은 지배 체제를 한층 공고히 다졌다. 신4인방과 그들의 수족만 체포한 것이 아니었다. 저우융캉의 양대 지지 세력이던 ‘석유방’과 ‘쓰촨방’을 초토화시켰다. 쉬차이허우가 뒤를 봐주던 구쥔산 전 총후근부 부부장, 위다칭 제2포병 부정치위원을 비리 혐의로 낙마시켜 군부의 군기를 잡았고,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부부를 사법 처리해 태자당 내 주도권을 장악했다. 링지화를 몰락시켜 후진타오 전 주석이 구축한 퇀파이에 일격을 가했다. 특히 저우융캉은 장쩌민 전 주석의 후원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고, 링지화는 후 전 주석의 최측근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크다. 시 주석이 집권 2년 만에 전임 최고 지도자의 입김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 주석의 1인 지도 체제는 최근 진행되는 군부 인사와 내부 감찰 기구 설치에서 잘 드러난다. 2014년 12월 들어 시 주석은 중앙군사위 주석이라는 군 통수권자 신분으로 50명에 달하는 군단장급 장성 인사를 단행했다. 이 중 저우융캉이 통솔했고 66만명의 병력을 지닌 무장경찰 사령관과 정치위원을 모두 교체했다. 사령관에 왕닝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정치위원에 쑨쓰징 총후근부 정치부 주임을 내정해 저우융캉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렸다.

12월12일에는 중앙판공청·중앙조직부·중앙선전부·국무원판공청·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정치협상회의 등 핵심 권력기관 7곳에 내부 감찰 부서를 설치키로 했다. 즉, 이들 기관 내에 당의 사정·감찰을 총괄하는 중앙기율위원회의 상주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시 주석은 중앙기율위를 앞세워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과 행정 및 입법 기관 수장들을 수시로 감찰할 수 있게 됐다. 중국공산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전무후무한 체제다.

장쩌민 전 주석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당 총서기가 되고 1990년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물려받았다. 하지만 수년간 덩샤오핑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2년 공식 직책이 없었던 덩은 경제특구를 둘러본 뒤 남순강화를 발표해 국가정책을 바꿀 정도로 파워가 엄청났다. 1997년 덩이 죽기 전까지 장 전 주석은 군부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었고, 리펑·주룽지 전 총리와 권력을 분점했다.

이는 후진타오 전 주석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당 총서기에 선출됐지만, 중앙군사위 주석은 1년 10개월이 지나서야 계승했다. 2007년까지 장 전 주석의 간섭과 ‘상하이방’을 이끈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의 견제로 집단지도체제를 엄격히 준수했다. 이런 곤욕을 겪었던 후 전 주석이 2012년 11월 18차 전당대회에서 시 주석에게 당권과 군권을 모두 물려준 것은 뜻밖의 권한 이양이었다.

당·정·군의 실권을 모두 장악했지만, 시진핑 주석으로의 권력 집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3년 10월 당 3중전회에서 설립이 결정된 전면개혁심화영도소조와 국가안전위원회뿐만 아니라 뒤이어 출범한 사이버안전영도소조, 국방군대개혁영도소조 등 의사 협조 및 결정 기구의 수장을 시 주석이 모두 맡았다. 심지어 1998년 이래 총리가 맡아왔던 재경영도소조마저 장악했다. 시 주석이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1인 지도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시 주석의 무서운 독주에 권력의 쌍두마차였던 리커창 총리는 실무형 총리로 전락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명경’에서 발행하는 ‘정경’은 “퇀파이인 리 총리가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이징 정계에서도 “리 총리와 국무위원들의 불만이 높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새어나오고 있다. ‘의법치국’을 앞세워 집단지도체제를 유명무실화시킨 시 주석. 지금 그는 21세기형 황제 등극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