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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재벌 리카싱의 중국탈출기


홍콩 최대 재벌인 리카싱(李嘉诚) 청쿵(长江)그룹회장의 ‘탈중국’ 행보 시점이 매우 절묘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6일 보도했다. 리 회장이 글로벌 투자자들이 중국 경제에 패닉에 가까운 우려를 보이기 전부터 중국 비즈니스에 대한 의존도를 조용히 줄여 나갔다는 게 WSJ의 분석이다.

리 회장이 지난 1월 발표한 구조조정이 대표적이다. 부동산 투자회사인 청쿵실업과 항만 및 통신사업을 하는 허치슨왐포아(Hutchison Whampoa)에 대한 구조조정안 핵심이 ‘탈중국’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조정안에 따라 리 회장은 허치슨왐포아를 지난 6월 CK허치슨홀딩스에 편입시키고, 이 가운데 부동산 사업부문은 따로 떼내 청쿵프로퍼티홀딩스라는 별도의 신설회사에 넘겼다.홍콩 항구건설과 통신 소매 등 기타 사업은 CKH홀딩스 산하로 들어갔다. CK허치슨홀딩스와 CKH홀딩스는 모두 홍콩이 아닌 영국령 조세피난처인 케이맨 제도에 등록했다.

리 회장은 2011년부터 글로벌 부동산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중국 비중을 본격적으로 줄여 나갔다. 리 회장의 탈중국 행보는 이 전부터 시작됐다. 2008년 상하이의 금융타운에 있는 40층 빌딩을 49억위안(약 9092억원)에 매각한 게 단적인 사례다. 2011년 이 빌딩의 가격은 5억 위안 수준으로 떨어졌다. 리 회장은 2012년 이후 중국에 눈에 띄는 부동산 투자는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백화점이나 주택개발 프로젝트를 과감히 매각했다.

리 회장이 본격적으로 중국 사업 비중을 축소한 것은 2011년부터다. 중국의 국제 무역과 금융 관문 역할을 해온 홍콩의 항구와 소매사업 부문을 처분했다. 리 회장은 2011년 홍콩 항만 사업부문인 허치슨포트홀딩스 트러스트의 지분 62%를 55억달러에 매각한 데 이어 2014년엔 소매사업 부문인 A.S왓슨앤코의 지분 25%를 56억8000만 달러에 팔았다.



그는 홍콩과 중국 사업을 줄이는 대신 최근 18개월 동안 200억달러가 넘는 돈을 유럽에 투자했다. 영국의 2위 이동통신사인 O2, 네덜란드 드럭스토어 체인인 덕스(Dirx)에 이어 영국의 철도회사를 인수했고, 이어 이탈리아에선 경쟁 통신사인 '윈드'를 사들여 자회사와 합병했다. 이는 리 회장이 최근 10년 동안 투자한 금액을 뛰어넘는다.

허치슨의 영업이익 중 유럽의 비중은 이미 2012년부터 중국을 넘어섰다.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이 회사의 영업이익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42%로 늘어난 반면 중국 부문은 30%로 급감했다.



리 회장의 ‘탈중국 친유럽’으로의 방향 선회를 두고 선견지명이라는 평가가 많다고 WSJ는 전했다. 홍콩중문대(香港中文大学)의 우디 우 회계학과 교수는 “리 회장이 자산을 매각한 시점이 정말 탁월하다”며 “적정한 가격일 때 팔았다”고 말했다. “리 회장이 금융에 있어서 만큼은 천재적”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리 회장의 ‘탈중국’ 행보를 시진핑(习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의 관계에서 찾는 정치적 시각도 있다. 리 회장은 덩샤오핑(邓小平)을 비롯 장쩌민(江泽民) 후진타오(胡锦涛) 등 시 주석 이전의 국가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리 회장은 중국 개혁 개방 이후 중국에 진출한 첫 번째 해외 투자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리 회장은 시 주석과의 관계가 소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중문대학의 조셉 팬 금융학과 교수는 “리 회장이 중국에서 발을 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에서 그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리 회장이 큰 아들인 빅터 리에게로 경영권 승계 작업을 준비 중인 것도 변수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정치권력으로 부터 특혜를 바랄 수 없는 상황이라 승계에서 불이익을 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홍콩에서 ‘센트럴 점령’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시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홍콩 기업인의 이름을 열거하며 시위대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리카싱도 이들 기업인 목록에 포함됐다.

왕젠린(王健林) 완다그룹 회장 같은 중국 부동산 신흥 재벌과의 경쟁 심화도 중국 투자를 회수하게 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1990년대만 해도 리 회장은 부동산 투자 노하우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었지만, 새로운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경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리 회장은 올들어 왕젠린 회장에 아시아 최고 부호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홍콩의 청쿵실업빌딩 70층에 위치한 리카싱 회장 집무실에는 대련형식의 서예 표구가 하나 걸려 있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높은 곳에 임하되(择高处立) 검소하게 살며(寻平处住) 넓은 곳으로 가라(向宽处行)’고 돼 있다.

남의 가게 점원으로 시작해서 플라스틱공장과 에너지 항만 분야를 거쳐 아시아 최고 부동산 재벌로 성장한 그의 60년 비즈니스 인생 좌우명을 보는 듯하다. 한마디로 시류를 꿰뚫는 안목과 처신이 그를 화교권 최고 부자를 만든 셈이다.

아마존 창업주인 제프 베조는 리카싱 철학을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불변의 진리를 찾아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젊은이들은 “10년 간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에 주목하기보다 앞으로 10년 간 불변할만한 사업이 뭔가를 찾아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리카싱 회장이 안정적인 사업에만 투자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실리콘 밸리 벤처에도 관여했고 이세돌과 겨뤄 유명세를 탄 알파고의 아버지 격인 딥 마인드 개발회사에 투자해서 서너 배 씩 수익도 올린다.

중국에서는 리카싱 회장의 경영철학을 투자 지침으로 삼는 경영자도 많다. 그런데 최근 몇 년사이 리카싱 회장의 중국 사업에 대한 방향이 확 바뀌고 있다.

특히 허치슨글로벌텔레콤(HGC)을 145억홍콩달러(2조800억원)에 매각하자 중국에서는 이른바 ‘먹 튀’ 논란에 불을 당긴다. HGC 매각대금은 매각당일 7월 30일 시가총액인 141억6800만 홍콩달러를 넘어선다. 그룹의 핵심 사업인 텔레콤을 팔았기 때문이다.

홍콩의 1만4000가구에 유선 전화망을 운영하는 이 회사는 리카싱 회장으로 봐서는 애물단지다. 홍콩정부에서 텔레콤 독점 시대를 마무리한 1995년 이후 실적도 하향세다.

스마트폰이 이 등장한 최근 10년 간 수익 곡선은 더 꺾인다. 지난 회계년도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45%나 떨어진 120억 홍콩달러다. 순익도 7억홍콩달러로 같은 기간 23%나 하락한다. 이동 통신시대에 걸맞지 않은 유선 전화사업 매각은 지난해 2월과 10월에도 있었다. 그룹이 보유한 2개 텔레콤 회사를 각각 6억5000만홍콩달러와 95억 홍콩달러에 매각한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먹튀’ 논란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리카싱 그룹이 45억 유로를 들여 독일 에너지관리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스타(Ista)라는 회사를 사들이면서 논란이 시작된다.

그렇지 않아도 경기 전망에 대한 걱정이 큰 마당에 바로미터 역할을 하던 리카싱이 중국 사업을 하나둘 정리하는 듯 한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사람들의 우상격인 리카싱그룹의 중국 이탈에 크게 실망하는 눈치다.

리자청그룹 내부에서는 실제로 중국경제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보는 편이다. 최근 폭등을 거듭 하고 있는 부동산에 대한 우려에서다.

리카싱 그룹은 이를 의식해 7년 전인 2011년부터 중국내 부동산을 팔고 있다. 베이징(北京)의 둥팡(东方广场)광장을 지분 변경해 110억위안(약 180조원)을 현금화한 게 신호탄이다.


2013년에는 광저우(广州)에 있는 시청떠후이(西城都荟)광장과 상하이(上海)동팡후이진(东方汇金)센터를 매각한다. 이어 2014년에는 난징(南京) 국제금융센터와 베이징(北京) 잉커(盈科)센터를 비롯해서 상하이 성방(盛邦)국제빌딩,충칭(重庆)의 다더우후이(大都会)도 팔아치운다.

뿐 만 아니라 창웬(长原)그룹과 야저우(亚洲)컨테이나부두등 핵심 사업도 정리한다. 2015년에도 잉후이후이(盈晖荟)라는 홍콩 부동산을 비롯해 캉덩(港灯)지분을 매각한다.

지난해에는 상하이 푸둥지역에 있는 루자쭈이스지후이(陆家嘴世纪汇)라는 프로젝트를 팔아넘긴 데 이어 올 들어서는 홍콩의 텔레콤 사업까지 말끔히 정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매각한 자산만도 1200억 홍콩달러에 이른다. 팔아치운 분야가 주로 부동산에 집중되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거품 위기에 처한 중국 부동산에 대한 우려도 깊어지는 모양새다.

중국 부동산 거품이 너무 심한 데다 부동산을 사고팔 때 여러 가지 제한이 많은 중국 시장 특성상 미리 미리 정리를 하고 있다는 게 그룹내부의 판단이다. 최근에서야 급하게 부동산을 내다 팔다가 당국의 미움을 받고 있는 완다(万达)그룹 왕젠린(王健林)회장이나 앞서 팔아치운 SOHO의 판스치(潘石屹)회장 등과는 셈법이 달라 보인다.

중국서 처분한 자본은 고스란히 다른 화교권으로 흘러들어간다. 대표적인 곳이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다.

리카싱그룹이 본격적으로 해외 자산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영국 가스공사인 WWU사와 킨로트(Kinrot)를 매입한다.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의 오랜지라는 회사와 네덜란드의 폐기물 처리회사인 AVR도 사들인다.

이어 2014년에는 파크앤플라이(Park N Fly)의 캐나다 벤쿠버 법인을 산 데 이어 2015년에는 영국 에버숄트 레일(Eversholt Rail)과 포르투갈 풍력 발전회사인 이베르윈드(lberwind)를 매입한다.

지난해에는 허스키에너지의 캐나다 오일수송 자산의 지분 65%도 사들인다. 올 들어서도 호주 에너지업체인 DUET와 캐나다건축설비서비스회사와 독일의 에너지 관리 공급상인 이스타도 사들인다.

지난 8월3일 발표한 상반기 실적을 보면 이미 홍콩기업이 아니다. 홍콩에서 발생한 매출은 12%이고 총자산도 그룹 전체 비중의 9%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은 자산 43%에 매출 47%의 비중을 차지한다.

사들이는 종목은 부동산이 아니다. 고정수익이 있는 인프라 항목 위주다. 에너지나 기반시설 이나 수도 등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이 분야 투자를 많이 했다. 장강기건(长江基建)이나 뗀넝(电能)실업 등이 대표적이다.

민생에 기반을 둔 기초 인프라 사업은 하루아침에 큰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이다. 경기가 수익에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국사업 매각으로 장강실업은 순 부채를 거의 제로 상태로 낮춘다. 공식 부채율이 23.2%에 불과하다. 대신 현금자산은 1577억 홍콩달러다.

자기자본이익률(ROE)를 보면 놀랍다. 2007에서 2016년 까지 장강그룹의 10년 평균치가 12.24%다. 중국서는 가장 돈을 잘 번다는 금융업의 ROE가 18.7% 정도이고 각 부동산 업체들은 평균 10.6%정도다. 물론 금융업체도 중국경제 부진에 따라 올해 ROE는 13%에도 미치지 못할 전망이다.

지금은 아예 부동산 재벌이라는 타이틀도 떼어낸 상태다. 지난 3월 22일 홍콩에서 열린 연차 총회에서 는 아예 모든 명칭에서 부동산이란 단어를 빼기로 한 것이다.

홍콩의 북부 12층짜리 빌딩에서 장강공업이라는 플라스틱 제조업체로 시작한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여기에는 7월말로 89세 생일을 맞은 리카싱회장과 63세인 장남 리쩌쥐간 승계 계획도 숨겨져 있지만 2011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탈 중국 구조조정 속도는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