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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시진핑의 콧털을 건드린 중국 완다그룹 왕젠린의 앞날은?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하라”는 금선탈각은 병법서상의 군사전략이거나 상경계에서 활용되는 경영전략만이 아니다. 한마디로 중국의 국가발전전략 또는 국가발전상황 그 자체이다.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우리의 눈길은 뒤의 ‘시장경제’보다는 앞의 ‘사회주의’에 쏠려 왔다. 중국이 오래전에 벗어놓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허물만 보고, 덩치만 클 뿐 관시와 만만디의 나라로 평하여왔다. 중국의 몸통, 시장경제의 매미는 이미 공중 저 만치 날고 있는데도.

지금 중국의 핵심 브레인들은 세계초강대국, 미국의 힘은 ‘공정한 자유경쟁’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하면서, 중국 사회주의의 영혼도 ‘공정’이며 시장경제의 본질도 ‘자유경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중국은 미국과 용어만 다를 뿐 실질은 비슷한 정향으로 질주하여 왔다.

그리하여 중국은 미국과 함께 이른바, ‘자본주의공생체’, ‘차이메리카’로 불리는 G2로서 글로벌 경제를 쥐락펴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갑부 상위순위 1500명의 총재산이 우리나라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5배에 육박하게 되었다. 2015년 글로벌 500대기업 중 중국기업이 106개, 세계TOP100갑부 중 중국인이 15명이 되었다(*한국인 0명). 그리하여 지금 중국 땅에는 8만명의 억만장자(개인자산 190억원 이상)를 비롯한 121만명의 천만장자 군단들이 ‘아직 나는 배고프다’ 식인지, 세상의 모든 돈을 싹쓸이 할 작정인지 계속 돈을 쓸어 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현 제12기 전국인민대회 대표(국회의원) 2987명 중 기업가의 수는 900여명에 달해, 당정관료(1500여명)와 함께 G2시대 중국을 웅비시키는 견인차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명목상 ‘노동자 농민 연맹국가’에서 중국은 영락없는 ‘당정관료 기업가 연맹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지금 중국 땅은 온통 시장이고 중국 사람은 모두 상인이다. 상인의 스타는 기업가이다.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목적은 선수들의 활약상을 보고 즐기려는 것에 있다. 중국 기업가들은 중국이라는 경기장의 선수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주로 구단(정부)이나 감독(정치지도자)의 동선에만 몰입해 왔다.

필자는 잘 알려지고 많이 논의되어 온 것보다는 새로운 것과 덜 알려지거나 잊힌 것을 사랑한다. G2시대 중국을 가능케 한 필드의 스타, 중국 기업가들의 꿈과 현실, 성공과 좌절, 환희와 비통,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삶의 궤적은 상생협력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타산지석 이상의 가치를 지닌 소중한 자산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이유이다.

현대 중국의 거성이자 거상, 기업가에 관한 것이라면 한·중 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모든 선행연구를 읽고 배우고 느끼며 재미있고 참신하게 쓰고자 한다.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거슬림과 모자람이 있더라도 독자여러분의 매몰찬 지탄보다는 따뜻한 격려 부탁드린다. 필자의 마음이 여기에 등장하는 그 어느 중국 기업가보다 가난하니.



국영의 철밥통을 민영의 법랑식기로 바꿔라

명군이 신하를 다스리는 바는 상과 벌 두 개의 권력 뿐 - 한비자

왕젠린은 국영기업사장 취임 첫날부터 군복을 입고 출근했다. 출근 첫날 그는 왕젠린식 성과급제도를 제정 시행했다. 즉 근무실적이 좋은 직원은 표창과 함께 돈다발을 안겨주고 실직이 나쁜 직원은 경고처분하고 월급을 삭감한다는 포고령이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던 빈사의 국영기업이 회생가능성이 보이자 연말에 시강구 정부는 왕젠린 사장 개인에게 1만 5천 위안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러나 왕젠린은 송년회에서 자신과 근무실적이 저조한 4명을 제외한, 15명의 직원들에게 1천 위안씩을 나눠 주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태공이 병사들을 이끌고 행군하던 중에 술 한 병이 생겼다. 강태공은 흐르는 개울물에 술을 다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그 물을 수백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

그러나 국영기업은 국영기업, 아직 소유도 국가, 경영도 국가가 하는 국영기업의 시대였다. 왕젠린은 사사건건 당과 정부의 간섭을 받았다. 기업의 인사는 구 정부1인자 당서기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구 산하 국영기업사장에게는 어떠한 인사권도 없었다. 왕젠린은 규율을 위반하고 행패를 부리는 문제 직원 2명의 해고를 구정부에 상신했으나 2개월이 지나도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참다못한 왕젠린은 다렌시 기율심사위원회 책임자를 찾아가 문제 직원을 해고시켜줄 것을 직접 요청했다. 그러자 구 정부는 그들을 해고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전근 조치하는데 그쳤다.

왕젠린은 1990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하여 버스 한대를 대절, 직원과 직원가족들을 태우고 다렌시 외곽 북쪽의 삼림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긴 노동절 연휴기간을 직원단합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버스가 교외로 빠지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바리케이드가 쳐 있었다. 공안 몇이 우르르 버스 안으로 들이닥쳤다. 완장을 찬 공안 하나가 왕젠린에게 다가와 삿대질하며 호통을 쳤다.

“너는 노동절 연휴기간에는 일체의 단체 행사를 금하는 당의 지령을 몰랐는가? 너는 당기율심사위원회에 고발당했으니 즉각 행사를 중단하고 응분의 처벌을 기다려라.”

결국 왕젠린은 전체 직원들에게 1인당 200위안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명령과 함께 서면경고조치 당했다. 그는 한동안 극심한 배신감으로 가슴이 타서 밤잠을 설쳤다. 전근조치 당하여 앙심을 품은 자의 소행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데 만약 가족들과 오붓하게 지내려던 현직 직원의 밀고였다면 그것은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군대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는 국영기업에서는 작동되지 않았다. 그가 사장 취임초 시행했던 성과급 제도도 감독기관에 의해 직원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야기한다며 폐지를 지시받았다. 조직 수장의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의 기억에서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은 배신과 실의의 계절이었다.

1991년 초. 국가체육개혁위원회와 다렌시 체육개혁위원회는 다렌시 3개 기업을 동북지역 최초의 주식제 시범기업으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시범기업으로 선정된 기업은 정부편제내의 국영기업에서 정부편제내의 민영기업으로 바뀌고 국영기업의 관리자 신분 또한 공직자에서 민간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국영의 철밥통을 버리고 민영의 질그릇을 택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왕젠린은 마치 그 순간을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선착순 달리기 하듯, 득달같이 달려가 맨 처음으로 신청했다. 중국 주식회사의 초기형태, 주식제 시범기업의 사장이 된 그는 원래의 철밥통속 국유지분을 국물위의 뜬 기름 거둬 내듯 조금씩 덜어내었다. 몇 년 후 왕년의 국영기업은 왕젠린 개인의 완다(萬達)로 변했다. 국영의 깨진 철밥통을 민영의 고급법랑식기로 바꿔버린 것이다.

거성 덩의 비움과 거상 왕의 채움

1991년 말, 왕젠린은 시장경쟁의 낚시터에서 처음으로 돈맛을 보았다. 다렌시 남산 주택건설 프로젝트를 시정부 건설도급업자측과 이익금을 4:6 비율로 분배받기로 하는 건설공사계약을 체결했다. 그때 그가 계약금조로 거머쥔 200만 위안은 향후 대박을 줄줄이 두레박처럼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되었다. 다렌시는 1992년 6월 구 시가지를 중심업무지구(CBD, Central Business District)로 개조하는 청사진을 공표했다. 연이어 ‘신판베이징거리 프로젝트’로 이름붙인 CBD 1단계 공사구간에 참여할 시공업체 선정을 위한 공개경쟁입찰을 공고했다. 그러나 그 다렌시 역사상 최대의 재개발사업은 ‘고비용 저효과’의 위험성이 높아 입찰에 나서려는 건설회사가 없었다.

공개경쟁입찰신청시한 마지막 날까지 아무도 입찰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왕젠린 역시 고민했지만 신청 마감시간 몇 시간을 남겨놓고 입찰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약 2~3년 후, 단독시공사 완다가 완공한 2000여개의 상가 점포와 800여 채의 아파트는 분양을 시작한 지 1달도 채 안되어 매진되었다. 초단기간에 ‘공실률 0’을 달성하여 중국 부동산업계의 신기원을 열었다. 신판베이징거리 프로젝트는 1천만위안의 거금을 왕젠린에게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구청 단위의 중소건설회사 완다를 일약 다렌시 대표 민영 부동산기업으로 급부상시켰다.

정상에 오른 적이 없는 자는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하산이 더 어렵다한다. 왕젠린이 다렌시 부동산업계 정상 등정을 목전에 두고 있던 무렵. 1992년 10월, 한 노인의 역사적인 하산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20세기 세계사의 무대에서 각국 정상들의 퇴장 중 가장 빛나는 장면을 동서양에서 각각 1개씩만 든다면, 프랑스의 드골과 중국의 덩샤오핑의 하산장면이다.

덩샤오핑은 처음도 좋았지만 끝은 더 좋았다. 1978년 12월 개혁개방을 부르짖으며 노대국의 방향을 우향우!로 확 틀어버린 처음도 좋았고, 1992년 10월 초기버전 ‘중국특색적 사회주의’ 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버전 업그레이드시켜 상하이방 장쩌민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정계를 은퇴한 마지막은 더없이 좋았다.

덩샤오핑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주어를 차지하는 ‘중국특색적 사회주의’ 시대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사회주의’를 ‘시장경제’를 꾸며주는 수식어로 전환하여 버전 업그레이드시킨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진시황을 비롯한 제국시절의 황제들은 물론 쑨원이나 마오쩌둥 등 공화국 시대의 역대 통치자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었다. 그는 대권을 스스로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무대 뒤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전임자가 죽어야만 후임자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종신제를, 전임자가 죽지 않아도 일정기간 착실히 준비하면 자리를 차지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임기제로 제도화하여 정착시켰다.

요컨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라는 등산로의 적절한 선택과 그의 위대한 하산이 오늘날 G2시대 부국부민의 중국과 동북아의 IS격 빈국빈민 북한의 명운을 갈랐다.

1992년 가을, 스촨의 거성 덩샤오핑의 위대한 하산과 함께 스촨의 거상 왕젠린의 야심찬 상산이 시작되었다. 덩의 비움과 왕의 채움이 교차한 계절이었다.

축구와 함께 춤을, 스포츠 마케팅의 천재 왕젠린

다렌은 중국북방의 쾌적한 항구도시다. 다렌 도심을 벗어나 자동차로 약 한 시간 정도 달리면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이 나온다. 그리고 다렌은 피부색만 황인종이나 체격은 북유럽의 8등신 미녀들과 다름없는 여인들이 세련된 의상을 뽐내며 거리를 활보하는 미녀와 패션의 도시이다. 또한 다렌은 중국 최초로 축구를 접한 도시이자 근교에 유서깊은 축구촌이 있을 정도로 중국의 대표적 축구도시이다. 1913년 아시아 최초의 A매치인 중국과 필리핀의 경기에서도 중국대표팀은 대부분 다렌출신 선수들이었다. 현대 중국의 역대 국가대표축구선수도 다렌 출신이 제일 많다. 그래서인지, 지난 한 때 중국축구팀이 한국축구팀만 만나면 죽을 쑤는, 이른바 공한증에 13억 중국민이 감염되었던 시절에도 다렌시민 만큼은 “누가 누구를 겁네?”라며 호기 반 객기 반을 부렸었다.

1991년 말엽, 오랜 군과 공직생활을 통해 당정요로에 깊은 파이프를 심어두었던 왕젠린은 1994년부터 중국에 프로축구리그가 개시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원래 프로축구클럽은 기업가들이 스타 선수를 보기 위해서 모여드는 관중들을 자사 제품의 소비자로 만드는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왕젠린은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중국식자본주의 성장과정에서 프로축구리그는 필히 도입되고, 성행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프로축구를 자신의 기업과 정치권력층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등산고리(카라비너)로 삼아 정상에 오르는, 원대하고도 치밀한 로드맵을 작성했다.

1992년 초, 왕젠린은 공설운동장부근에 주택단지건설프로젝트를 건수삼아 다렌시 체육위원회와 접촉을 개시했다. 협상 중에 왕젠린은 느닷없이 체육위소속 다렌실업축구팀에 거금 400만 위안을 쾌척했다. 당시 다렌시장 보시라이(1949~)는 눈조리개를 확 펼치고 구청산하의 중소건설업체 사장 왕젠린의 행적을 주시했다. 그리고 왕젠린이 자신의 주요 스폰서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파악하고 대우하기 시작했다. 큰 꿈을 꾸고 있었던 보시라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렌시민은 축구를 좋아하니 자신도 반드시 축구를 좋아하겠다고 공언했다. 다렌시장 재임중 보시라이는 자주 당정 간부 전원을 동원하여 축구경기와 축구훈련캠프를 시찰했다. 다렌시 우편엽서에도 축구와 관련된 삽화를 넣기도 했다.

1993년 왕젠린은 거금을 들여 다렌실업축구팀을 인수, 다렌완다 프로축구팀을 창단했다. 왕젠린의 축구마케팅은 그의 회사경영전략과 흡사하다. 1994년 프로축구원년에는 선수전원에게 1실 2방의 아파트를 무상 제공했고 1996년에는 완다가 무패 우승하자 2년 전 아파트를 회수, 새로운 고급 아파트로 교체 제공했다. 왕젠린은 선수들에게 고급자동차와 호화아파트와 거액의 현금 등을 안긴다.

1골 당 10만 위안을, 경기의 중요성을 기준으로 60만 위안, 40만 위안, 30만 위안으로 3등분하고 승리시에는 전액을, 비기면 절반을 패배하면 한 푼도 없다. 그의 상금 지급속도는 경기중의 축구공 못지않게 빠르다. 선수들은 매주 경기가 끝나면 월요일 하루 쉬고 화요일에 현금과 아파트와 차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대부분 왕젠린 회장 자신이 직접 수백만 위안의 현금 가방을 축구 경기장 현장으로 들고 간다. 우승할 경우 팀에게는 순금으로 만든 축구공을, 선수 전원에는 300그램짜리 금괴1개씩을 지급한다. 이 모든 것은 왕젠린의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주는 것이 아니라 구단운영의 내규로 제도화했다.

1997년 왕젠린은 중국의 차범근이라고 불리던 스트라이커 호하이동을 영입하기 위해 군부대 팀인 ‘81팀’에게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거액의 이적비용 220만위안을 지급했다. 호하이동이 다렌완다로 실제로 이사해온 직후에는 별도로 그에게 최고급별장과 벤츠S600을 지급했다.

왕젠린의 다렌완다는 네 번의 리그 우승과 아시아클럽챔피언십 준우승 등의 위업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완다그룹도 다렌완다와 연전연승의 업적을 경쟁이라도 하듯 승승장구하여갔다. 다렌이 4번째 우승했을 때 완다그룹은 이미 랴오닝성을 넘어 중국의 대표적 건설업체로 등극하게 되었다. 왕젠린은 2004년 다렌 선수단이 승부조작 스캔들에 휘말리자 축구 사업에 일단 손을 뗐다.

2013년 그가 돌아왔다. 중국축구계의 마이더스의 황금 손, 왕회장이 돌아왔다. 열혈 축구광 시진핑이 2013년 국가주석으로 등극한 것과 보조를 맞추듯 왕젠린은 축구마케팅을 재개했다. 이제는 글로벌슈퍼리치답게 국내팀이 아니라 글로벌 프로축구팀 쇼핑에 나서고 있다. 왕젠린은 2014년 6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상징물인 ‘스페인 빌딩’을 2억 6천 500만 유로(약 3,400억원)에 사들이면서 그것과 함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명문팀 아틀레티코(AT)마드리드팀을 4500만유로(약 600억원)로 지분 20%를 인수했다. 그리고 올해 초 일제히 중국의 5개 도시에 AT마드리드축구 학교를 기공하고 , AT마드리드팀의 중국 투어 경기를 성사시켰다.

미녀와 함께 춤을, 미인계 마케팅의 귀재, 왕젠린

1993년 3월, 중국특색적 신자유주의자, ‘바다로 나아가자’의 상하이방의 방장, 장쩌민은 헌법을 일부 개정하여 ‘국영기업’을 ‘국유기업’으로 바꾸었다. 헌법까지 개정하여 국영기업조차 국가는 소유만하고 경영은 민간에 맡기는 국유기업으로 바뀐 마당에 원래의 민영기업들은 “이제 아무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며 신바람이 났다.

왕젠린은 그 시대의 신바람을 초고속 성장의 풍력발전으로 활용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수립에 돌입했다. 1993년 10월 광저우 주택박람회는 다렌의 대표 부동산기업 완다를 초청했다. 동북방의 다렌시 주택건설업체로서는 머나먼 동남연해도시 광저우 주택박람회에 참가하여 거둘 실익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보다 높이 보는 눈을 가진 왕젠린은 참가하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동서남북중에서 돈을 벌려면 동남쪽 광둥으로 가라.” 는 유행어대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동남풍이 부는 광둥에 진출함으로써 완다를 지방성기업에서 전국성 기업으로 업그레이드 하고자 했다.

우리는 지금 개혁개방 태풍의 진원지 광둥으로 간다. 남벌이다. 주택박람회 개최 2주전, 왕젠린은 완다의 수뇌부를 이끌고 현지로 날라 갔다. 광저우에서 전국의 주택건설 전문가를 초빙하여 1주일간 계속되는 마라톤 포럼을 개최했다. 이를 현지의 모든 언론매체에 기사화하고 전면기업광고를 게재하는 등 ‘튀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을 했다.

박람회장 부스 가운데 최대규모인 100평이 넘는 크기의 부스를 할당받아 이를 박람회장에서 제일 눈에 띄는 위치에 설치했다. 어디 그뿐인가? 비장의 전술핵무기, 8명의 미녀모델을 다렌으로부터 공수하여 완다의 부스 입구에 배치시켜놓았다. 180센티미터 늘씬한 8등신 8선녀들은 관람객들을 뇌쇄적 눈빛과 치명적 몸매, 살인미소로 무참하게 녹여버렸다.

완다의 부스 주변에는 관람객들의 ‘미녀에 의한 근사체험’에 합류하려는 일반시민들이 메뚜기때처럼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완다의 부스에는 다렌의 주택건설과 관련한 내용은 일절 없었다. 중국 전체의 부동산업의 미래전망과 중국 방방곡곡에 펼쳐질 완다의 비젼과 기업이념, 브랜드 이미지만 생동감 넘치게 전시되었다. 주택박람회 마지막 날 왕젠린 사장은 직접 전문가회의를 주재했다. 왕젠린은 귀로에 200여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다렌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완다기업을 시찰하게 했다. 그때 그 전문가들 중 약 120명이 완다의 고급관리자로 채용되었으며 4명의 현직 부총재를 포함 60여명이 여전히 완다그룹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왕젠린은 축구와 미녀를 통해 관방의 지원과 전문가의 인력자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개혁개방의 신바람을 자사의 부상에 필요 충분한 풍력발전으로 활용하는데 성공했다. 1998년부터 중국 각 도시에 완다광장을 기공함으로써 완다는 중국 정상급 건설업체로 떠올랐다.


완다그룹의 총수 왕젠린.ⓒ완다그룹

마카오 면적보다 넓은 상업용지를 보유한 완다제국

2000년 초, 어느 날 왕젠린 회장이 직접 주재하는 완다그룹 전체임원회의에서였다. 임원 하나가 장기근속 직원 둘이 각각 암과 간경화에 걸렸는데 국유기업직원만 받을 수 있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입원치료를 못하고 있다는 딱한 상황을 보고했다. 민영 완다그룹 총수 왕젠린은 즉각 두 직원의 의료비 전액 200만 위안을 지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재무이사는 회사 금고에 남아 있는 현금은 2만 위안도 채 안된다고 거의 우는 소리로 보고했다. 할 수 없이 왕젠린은 자신의 개인계좌에서 200만 위안을 꺼내 임시변통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왕젠린은 주력업종 주택건설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작업에 착수했다. 주택건설업의 가장 큰 단점은 현금유동성의 불안정이다. 기업의 현금유동성이 좋지 않으면 이익이 난다고 하더라도 부도가 날 확률이 높아진다. 주택경기는 불안정하고 프로젝트가 있으면 현금유동성이 좋지만, 공사가 완료되면 현금의 흐름이 중단된다. 대부분 국가의 도시화는 50년 정도가 걸린다. 도시화가 일단락되면 주택건설 위주의 부동산업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집한 채를 지으면 집한 채를 파는 방식으로는 정부의 토지정책 등의 내외부 환경이 자주 변화하는 상황에서는 현금유동성의 정상화를 유지하기 어렵다.

왕젠린은 현금유동성 안정을 추구하기 위하여 엘리베이터와 변압기 생산 등 제조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완다의 주력사업을 오피스텔이나 상가 등 수익형 부동산 건설 및 개발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수익형 부동산건설업도 초기에는 순조롭지 않았다. 랴오닝성의 중심도시 선양에 완다광장을 건설하는 3년 동안 222건의 송사에 휘말렸던 탓에 왕젠린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222만개가 빠져 반대머리가 되었다고 농담반 진담반 할 만큼 애를 먹였다.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권했으나 왕젠린은 5년을 시한으로 잡고 수익형부동산 사업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다른 사람들은 남쪽의 벽에 부딪치면 포기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황하에서 빠져 죽는다고 하는데 왕젠린은 황하에까지 내몰려도 포기하지 않고 황하에 다리를 놓아 건너려고 했다.

피와 땀과 눈물에 젖은 세월의 강물이 쉬지 않고 흐르자 길이 열리고 한 번 길이 열리자 순식간에 수많은 길들이 열렸다. 2004년에 상하이의 우쟈오창의 초대형복합쇼핑몰 완다광장이 첫 선을 보인 이후 중국 각지의 대도시들에는 우후죽순처럼 완다광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07년 5월, 완다그룹은 유통업계 소매업계인 완첸백화점을 설립하여 중국상업부동산업계에서 최초로 유통업계에 진출한 기업이 되었다. 현재 완첸백화점은 완다그룹의 사업영역중에서 뚜렷한 실적은 없다하겠으나 대형종합쇼핑몰인 완다광장에 사람의 물결을 몰아다주고 있다. 중국의 온라인 유통시장이 급성장하고 백화점과 마트 등 전통유통채널은 쇠퇴일로에 있으나 왕젠린은 백화점 분야는 전망이 밝은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중국 부동산업 서열 제2위 기업은 없다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완다는 중국부동산업계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백화점, 5성급 호텔, 영화관, 쇼핑몰이 구비된 26개의 완다광장을 비롯해 완다가 현재 보유한 상업용지 전체면적은 마카오전체면적보다 넓은 약29㎢이다. 세계 최대면적의 상업용지를 보유한 완다그룹은 세계최대의 상업영토를 장악한 완다제국으로 불리고 있다. 완다제국의 황제, 왕회장은 2015년 연두업무보고에서 2020년 완다가 보유 경영하는 상업용지면적은 세계부동산기업 TOP10을 전부 합친 것보다 넓을 것이라고 호언한 바 있다. 왕회장이 꿈꾸는 상업제국의 영토는 그가 제일 존경한다는 한무제의 서역개척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세계 TOP10을 모두 합친 면적보다 넓을 것이라니, 징기스칸의 대원제국 차원을 넘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고서화수집 마니아. 문화상품의 최고소비자가 최고생산자로

“내가 군복을 벗고 재계로 투신한 가장 큰 이유는 고서화 수집을 하고 싶어서였다.”

오랜 군생활 탓인지 왕젠린은 좀처럼 웃지 않는다. 항상 근엄한 표정이니 이런 농담(농담일 것이다)을 할 때도 진담 같이 들린다. 마오쩌둥에 비견되는 엄청난 독서량에서 우러나오는 유려한 언변과 지혜, 지략은 왕젠린의 최대의 자산이다. 그런 그가 골동품과 고서화 수집 마니아로서 문화예술 분야에 가장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은 중국의 슈퍼리치로 정평이 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상품의 최대 소비자인 글로벌슈퍼리치가 문화산업에 투자하여 최대의 문화상품 생산자의 길을 가려함, 역시 당연한 행로일 것이다.

2004년 10월, 완다그룹은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 타임워너의 계열사 워너브라더스와 함께 공동으로 영화상영관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워너브러더스는 중국정부가 영화상영관 사업의 외자진입 규제정책을 고수하자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여버렸다. 혼자 남은 왕젠린은 자신이 직접 영화관사업에 죽기 살기로 뛰어들었다. 완다그룹의 물적 인적 자원을 집중투입하여 2008년부터 완다영화관을 흑자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거행된 그 해부터 완다는 영화 및 엔터테인먼트 문화 여행 레저업체로 또 한 번의 변신과 함께 영역을 대폭 확장했다. 2015년 현재 완다영화관은 252개의 가맹영화관과 1350개의 스크린을 보유한 아시아 최대 영화관으로서 중국 박스오피스 수입의 18%를 점유하고 있다. 완다그룹이 영화 문화 여행 레저업종에서 벌어드리는 수익은 부동산업으로 벌어드리는 수익 다음을 차지할 만큼 급성장하고 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왕젠린은 완다영화관을 워너브라더스를 뛰어넘는 세계최대의 종합엔터테인먼트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2015년 완다그룹 종합업무보고에서 왕젠린 총재는 이렇게 밝혔다.

“완다가 왜 문화와 레저산업에 열중하고 있는가? 미국의 문화산업은 GDP의 24%를 차지한다. 미국의 최다 수출상품은 무기도 민간항공기도 아니다. 영화, 음악, 도서출판권 등등 문화상품이다. 그런데 중국의 문화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GDP의 3%에 불과하다. 2014년 미국레저 산업규모는 5천억 달러에 달하나 중국은 아직도 체육복, 운동화 제조업을 레저산업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로 레저산업이 낙후되었다. 하지만 낙후된 그만큼 중국의 문화레저산업의 전망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문화레저산업은 불경기가 없는 산업이다. 불경기일수록 문화레저소비가 늘어나기도 한다. 소비자 대부분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티비에서 스포츠를 시청함으로써 불경기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임기제를 실시하고 있는 중국에서 정치권력은 길어도 10년이고,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하에서 경제권력은 길어야 3대이지만, 반만년 유구한 문화국가 중국에서의 문화권력은 시한과 종점이 없다.

경제권력을 장악한 왕젠린은 정치권력 대신 문화권력을 장악하여 문화의 힘을 기업경영 발전전략에 이입시켜 영업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은 아닐까?
다보스포럼에서의 우문현답

2009년 설날 무렵, 왕젠린은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에 즉 속칭 동계다보스포럼에 참가했다.

다보스포럼은 영어, 중국어, 불어, 독일어 등 4개 국어 동시통역 서비스를 제공했다. 일본어는 동시통역에서 빠져있었는데 이에 대해 일본대표마저 항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대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왕젠린은 다보스포럼을 통하여 세계속의 중국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보스포럼은 별도로 왕젠린과 중국은행 부행장 등 중국대표 2인, 미국의 시티뱅크 부행장 미국대표 1인이 참여하는 3인의 미니 토론회를 마련했다.
방청석에서 베이징에 주재중이라는 이태리기자가 왕젠린의 말꼬리를 잡고 삐딱한 어조로 따졌다.

“너희 베이징의 쇼핑몰에 입점한 절대다수의 상점이 부진을 면치 못하여 점원이 고객보다 많다고 한다. 또한 나의 베이징 친구가 5년 전에 산 집이 현재 반값으로 폭락하고 있다고 한다. 미스터 왕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미스터 왕이 알기로는 최근 몇 년간 개업한 베이징 쇼핑몰이 많지 않다. 쇼핑몰 직원이 고객보다 많다는 베이징쇼핑몰을 내게 알려주라, 완다는 지난달 베이징의 근교에서 대형마트를 개업했는데 고객이 너무 많아서 베이징시 공안국은 인근의 까르푸에 영업을 중단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내 말이 거짓인가 지금 당장 그대가 인터넷을 검색해보라. 또 소정의 정보제공비를 지급하겠으니 그대는 지금 당장 내게 반값으로 폭락한 베이징의 아파트를 알려 달라, 나는 이 아파트단지를 몽땅 매입한 후 되팔아서 떼돈을 벌 것이다.”

이러한 왕젠린의 우문현답에 장내에 폭소가 터졌고 이탈리아 기자는 얼굴을 숙인 채 종적을 감췄다.

왕젠린은 2012년 5월 세계 2위의 영화관 체인업체 AMC를 26억 달러에 인수했다고 선포했다. 미국의 영화, 레저, 엔터테인먼트 기업 인수사상 최대의 인수액이다.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던 AMC는 완다로 흡수합병된 2012년 말 곧바로 흑자전환했으며 2013년에는 뉴욕증시에 상장되었다. 왕젠린은 AMC가 흑자전환하게 된 최대 동인은 AMC가 이윤을 창출하기만 하면 그 이윤의 10%를 AMC 관리층에게 보너스로 나눠 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완다의 해외 원정은 기분 좋게 출발했다.

정부와는 가깝게, 정치와는 멀게

“왕젠린,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뇌물을 당정간부에게 바쳤기에 완다가 이처럼 급성장할 수 있었는가?”

'포브스'의 한 기자가 말의 꼬챙이로 왕젠린의 급소를 찔렀다.

“금품을 바치다니, 중국에서 공직자에게 뇌물을 준 기업가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기자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 기자 개인 특유의 인터뷰 기법으로 받아들이겠다. 한마디로 말하겠다. 당정간부에 대한 금품은 낫싱(nothing), 당정 정책에 대한 지지는 에브리싱(everything)이다.”

2012년 9월 8일 왕젠린은 하버드대학 강연시 그의 친구이자 정치관련 발언을 절대 하지 않기로 유명한, 리우촨즈와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정부와는 가깝게, 정치와는 멀게”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의 속내는 왕젠린 자신은 개인적 정치적 야심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 당과 정부의 정책노선에 최대한 부응하겠으니 변함없는 지원과 배려있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008년 완다그룹은 본사를 다렌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원래 다렌시 중심가의 완다 빌딩의 대부분은 다렌의 현지 기업에 임대해주고 13층과 23층 2개층만 완다의 사무실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13층 전층은 완다그룹의 당연락사무소와 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부사장급 위단을 관리책임자로 잔류시켜 놓고 완다그룹의 성지화하여 특별관리 하고 있다.

시가 4천만 위안에 달하는 연면적 1300여 평방미터의 파노라마관 전층을 시련과 극복의 완다그룹 20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중국공산당과 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표창과 감사패, 왕젠린과 역대 최고정치지도자급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진열해놓고 있다.
완다가 베이징으로 본사를 이전한 이듬해 2009년 베이징 남부 근교에다가 7억 위안의 거액을 투자하여 16만평의 부지에 3성급호텔식 숙소를 완비한 완다학원을 설립했다. 매년 연인원 80만명의 임직원을 합숙 훈련시키고 있다. 이름만 완다학원이지 순전한 사관학교식 운영을 하고 있다.

민영기업의 연수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사, 당정주요정책해석 등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색 선연한 과목을 필수교과과정으로 채택하고 있는 민영기업연수원은 중국에서 완다학원이 유일하다.

왕젠린이 베이징으로 간 까닭은?

어느 직업이나 그렇지만 경력이 쌓이고 안목이 열리면 ‘감’이라는 것이 생긴다. 정치, 경제, 법제, 사회, 문화, 역사,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융합인문사회과학인 중국학도 마찬가지다. 온갖 자료를 살피다 보면 아주 짧은 구절, 단어 하나도 중요한 사실을 내포, 시사하고 있다는 감이 올 때가 있다. 왕젠린도 그렇다. 필자가 감촉한 왕젠린의 특이사항 두 가지만 고른다면 완다그룹의 베이징 본사 이전과 근대 중국의 상성이라 불리는 호설암(후쉐엔 1823-1885)에 대한 그의 비난에 가까운 신랄한 비판이다. 따라서 지면관계상 왕젠린의 이야기를 ‘베이징’ 과 ‘호설암’ 키워드 2가지로 압축, 평가와 전망을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선 베이징 본사 이전문제이다. “지방의 중소기업이 글로벌대기업으로 성장하면 본사를 수도로 이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도대체 문제일까?” 우리나라 독자들 일부는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왕젠린은 중국민영기업사상 아주 이례적인 행태를 보였다.

우리나라 100대기업의 본사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것과는 달리 중국의 100대 민영기업 중 베이징에 본사를 둔 기업은 레노보 등 불과 3개뿐이다(2014년 중국민영기업500강 순위표 참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알리바바, 완샹그룹, 송청, 와하하(항저우), 완커그룹,동팡시왕(상하이),화웨이(선전), 다렌홀딩스(다렌), 하이얼(칭다오),,야그얼(닝보), 메이디(광둥포산), 신시왕(청두), 왕이(광저우)등 중국 100대 민영기업의 본사는 저장, 광둥, 상하이, 장쑤, 산둥, 스촨, 랴오닝 등 중국전역에 골고루 산재되어 있다.

20세기 중국의 대표적 문학가 라오서는 베이징 사람은 정치병환자라고 개탄했다. 베이징 시민은 모두 정치가며 시사평론가이다. 그들에게 정치는 소금이나 다름없다. 정치 없이는 삶의 의욕을 잃는다. 주자학에 유풍에 젖어있는 남부의 안후이사람(호설암의 고향)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편이지만 베이징사람에 비한다면 큰 무당 앞에 선 작은 무당격이다.
문화대혁명시대 중국인이 정치적 열정을 불태워야 했을 적에 베이징 시민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최선봉에 섰다. 마오쩌둥의 신격화운동을 주도하고 베이징을 온통 혁명의 용광로로 만들었다. 이제 문화대혁명이라는 광기의 세월은 갔다. 개혁개방이 개시된 지도 40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황제와, 지금은 주석과 이웃하며 산다는 정치적 우월감은 아직도 베이징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정치와 관련된 화제를 싫어하는 광둥에서 정치 이야기를 했다가는 얼치기상인 취급받기 쉽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베이징에서 잘만 하면 하루아침에 우국충정이 충만한 거상으로 승격도 된다. 베이징상인의 머리에는 주요 정치지도자의 인사편람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력과 학력, 인맥과 가족관계, 특기사항 등이 술술 나온다. 정치의 광인은 경제의 백치를 낳는다. 기업의 목표는 이리저리 흔들린다.

베이징 상인의 몸에서는 좀처럼 상인의 냄새를 맡기가 어렵다. 규칙만능형식주의, 무사안일주의, 비밀주의, 세력권의식, 직책의 사적이용, 비능률의 관료냄새 만이 진동한다. 황실에서 말단까지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권력을 이용해 돈을 긁어모았던 옛날의 영광이 눈에 삼삼한지, 그들은 한마디로 관료적 상인, 관상이다. 실제로 현재 활약중인 베이징의 기업가들의 출신 비율은 대략 전통상인 50, 정부관료 50이다. 그들의 경영방식은 공권력 행사와 다름없다.

왕젠린이 호설암을 욕하는 까닭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설암은 상성이기는커녕 전형적인 안후이의 유상일 뿐이다. 그에 과장된 이야기는 후세의 소설가들이 조작한 신화일 따름이다.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지모와 사상의 이치를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지고한 상덕과 환상적인 상술을 발휘했다는 호설암에 관한 책들이 중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초 그와 같은 성씨며 동향인 후진타오가 중앙정치무대의 샛별로 뜨면서부터 더 유행을 탔다. 그 중 몇몇 책은 한국에도 번역되어 알려졌다. 하지만 그 책들 가운데 호설암 본인이 쓴 것은 하나도 없다. 후이저우 산골의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 출신인 호설암은 저술을 남길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격식과 체통을 매우 중시하는 주자학의 문화적 토양에서 극히 적은 분량의 어록, 그마저 직접 그가 했는지 후일 소설가에 의해 각색되었지 모를 몇 마디만 전해질 뿐이다. 상인으로서의 그의 행적도 실상은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 더 많다. 권력과 결탁한 덕택으로 그는 한 20년간 반짝했다가 말년에 폭삭 망해 일전 한푼 없는 가난뱅이로 세상을 떠났다. 호설암은 왕유령이라는 유생의 손에 500냥을 쥐어주며 상경하면 매관할 뇌물로 쓰라고 했다. 후일 성공한 왕유령은 호설암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정경결탁의 달콤한 맛을 본 호설암은 유망하다고 생각되는 관리들에게 지속적으로 다량의 쥐약(금품)을 뿌렸다. 관리들의 지원으로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고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도록 이용했다. (이것도 후세의 소설가들에 의해 그가 인물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다고 미화된다.

호설암은 청나라시대의 금융기관인 전장을 개설하고, 그 이익을 토대로 거상으로 부상했으며 환전상, 찻집, 견직물 가게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왕유령이 병사하자 잠시 언덕을 잃은 호설암은 태평천국 진압군 사령관 좌종당에게 반란군 진압성금 명목으로 내밀히 군량미 10만 석을 바쳐 그를 자신의 백그라운드로 삼는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1882년 이홍장과의 권력투쟁에서 좌종당이 패배하여 실각당하자 호설암의 기업도 급작스레 파산해버렸다. 서든대스! 무수하게 따르던 여인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 그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다. 호설암은 정경결탁으로 일어나 정경결탁으로 쓰러졌다. 시작도 좋지 않았고 끝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러한 그를 상업의 성인, 상성으로 받들며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상은 필자가 졸저 '중국인의 상술' “주자님의 방귀향은 향긋한가-안후이 상인”에서의 호설암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필자의 견해를 소영웅주의의 발상으로 나무라며 호설암을 옹호하는 한국독자들의 글을 적잖게 받았다. 공자의 유학 아닌, 주자의 유학을 유교라는 일종의 종교로 떠받들며, 격식과 체통을 중시하는 유교(주자학)의 문화적 토양에서 살아온 우리 지식인의 오랜 관념을 어찌 하루아침에 바꾸겠는가? 하며 논쟁을 피하고 살았었다. 그런데 호설암을 가장 경멸하고 혐오하는 쓰레기 같은 인물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중국본토인, 그도 보통 중국 사람이 아닌 중국최고부자 왕젠린이라니, 필자는 꼭 껴안아 주고 싶도록 그의 출현이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마치 백만대군의 원군을 만난 것 같았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언행을 한 꺼풀 벗겨보니 그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언행불일치, 표리부동, 이율배반의 극치이다. 왕젠린은 말로는 호설암을 경멸하고 혐오한다면서 왜 행동은 호설암의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왜 정경결탁으로 일어나 정경유착으로 망한 호설암을 비난하면서 대부분의 민영기업가들이 기피하는 정치광인, 경제백치, 관상들의 소굴이라는 악평을 듣고 있는 베이징으로 본사를 옮겼는가?

어느 시대에서도 어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공산당 1당독재의 정치권력중심국가 중국에서 기업가들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해야 살아남는다. 시종일관 국가에 충성하고 집권정부의 방침에 적절히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과유불급, 지나치면 오히려 해롭다.

왕젠린과 완다여, 부디 살아남아라

“우리들의 겨울은 /가을에 벌써 다가 왔다고 /겨울엔 우린 겨울을 모르죠.” -조해일 '겨울이야기' 끝부분

“내 친구가 왼쪽 눈이 애꾸라면 나는 그 오른쪽 얼굴만 보겠다”라는 옛말도 있듯이 필자는 당초 중국기업가들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 단점보다는 장점을, 비판보다는 칭찬을 많이 하여야지 작정했었다. 특히 마무리는 반드시 험담보다 덕담으로 끝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번 왕젠린 편 끝자락에 이런 썰렁한 구절을 늘어놓은 까닭은 “완다그룹은 시진핑 누나의 회사, 시진핑과 왕젠린의 커넥션 의혹” 등의 제목을 단 충격적인 기사를 접했기 때문이다.

"10월 31일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왕젠린 회장은 29일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강연에서 시 주석 친누나인 치차오차오와 매형 덩자구이가 다롄완다상업부동산에 투자했지만 지난해 12월 홍콩 증시 상장을 두달 앞두고 주식을 처분했다고 밝혔다. 중국 기업가가 최고 지도자 일가의 재산 문제를 언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날 왕 회장의 발언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이는 강력한 부패척결을 벌이는 시주석에게 복병이 될 수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 확립 후 중국정부는 원활한 창업과 효율적인 기업경영을 위해 최적화된 법제인프라 구축에 매진하여왔다. 그러나 만일 기업이 국법을 위반하거나 국가정책의 궤도에서 일탈할 경우 예외없이 가차없이 가혹한 제재를 가해왔다. 그 얼마나 많은 중국기업가들이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국법을 위반한 죄목으로 사형, 무기징역의 중형을 받고 하루아침의 이슬처럼 사라졌던가.

시진핑 주석이 누구던가? 부패척결에 성역이 없다며 보시라이는 물론 저우용캉 정치국상무위원마저 부패혐의로 단칼에 제거해버린 포청천 스타일 주석이 아니던가. 이번 왕젠린의 발언은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를 부담하면서까지 성역없는 부패척결에 대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왔던 시진핑의 행보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병살타와도 같다는 생각이다. 왕젠린의 발언 의도는 시진핑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시진핑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인척의 실명이 세계적 미국 일간지에 정경유착의 음습한 이미지로 오르내리게 한 왕젠린의 주제넘고 방정맞은 입을 그대로 방치하겠는가?

혹자는 반문할 지도 모른다. 중국당국이 설마 중국최고부자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 특히 중국의 ‘설마’는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공포의 킬러이다. 중국특색적 자본주의 개발독재국가 정치체제상 지금쯤 왕젠린은 무릎을 꿇은 채 장문의 반성문을 쓰며 관대한 처분만을 바라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끝으로 필자는 왕젠린에게 그의 동향출신 20-20(20년 연속 20위권내) 중국최장수 갑부 리우용하오의 고언, “승리에 도취되어 지뢰를 뜀틀로 착각하지 말라. 성공은 쉽지만 성공의 관리는 어렵다” 를 들려주고 싶다.

아울러 “왕젠린과 완다여, 부디 살아남아 번창하라” 축원의 한마디를 보낸다.

이러한 축원을 보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필자가 평소에 남이 잘되길 바라는 한국 사람인 까닭이겠고, 다른 하나는 혹시 그가 연재를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버려 그의 이야기를 하느라 밤잠을 설쳐가며 애쓴 필자의 노고를 헛되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강효백 경희대 중국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