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조 유방(刘邦). 그의 밑에는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이 즐비했다. 그 중에서도 진평(陈平)의 존재는 독특하다. 일종의 경력 사원으로 한나라에 입사한 그는 공채 출신들의 견제를 이겨내고 결국에는 한나라의 정통 승계를 이어간 충신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릴 때는 피하고, 해가 나면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농부처럼 그는 역사라는 밭에 인내와 계략의 씨를 뿌리고 그것을 거두어들인 성공한 처세학의 달인이었다.
기원전 210년,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국한 진 시황제(秦始皇帝)가 죽었다. 시황제의 뒤를 이은 아들 호해(胡亥)는 우매한 군주였다. 그는 이사(李斯)와 조고(赵高) 등 간신의 틈바구니에서 정사를 제쳐두고 주색잡기에 빠졌다. 민심은 진나라를 서서히 떠나기 시작했다. 곧바로 천하대란이 시작되고 군웅들은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그렇게 5년, 정국은 한의 유방과 초의 항우(楚项羽)라는 두 명의 걸출한 영웅의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일당백의 용맹과 범증(范增), 용저(龙且), 종이매(钟离眛)등의 참모를 거느린 항우는 무력과 기세에서 유방을 앞섰다. 유방은 항우에게 읍소하는 신하를 자처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한편 인재와 세력을 확장했다. 유방은 휘하의 소하(萧何), 장량(张良), 조참(曹参), 번쾌(樊哙), 주발(周勃), 관영(灌婴) 등의 기존 가신 그룹 외에도 한신(韩信), 영포(黥布), 팽월(彭越) 등의 세력과 합세해 항우와의 5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유방은 한나라 황제가 되었다. 역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치열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놓이게 된다. 토사구팽(兔死狗烹) 또한 횡행했다. 어제의 공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유방의 건국 3대 공신 중 한 명인 소하는 권력과 무관한 행정책임자로서 여전히 유방의 신임을 받았다. 장량은 무심한 듯 모든 권력과 부를 내려놓고 떠났고 또 한 명의 절대 공신인 한신은 제나라의 왕이 되어 호시탐탐 한 고조 유방 밑에서 독립할 꿈을 꾸고 있었다.
유방에게는 이제 전쟁을 하는 기술자보다 통치와 행정의 능숙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때 유방의 신임을 받으며 부각된 인물이 있다. 진평이다. 그는 유방이 발표한 한나라 건국 공신 137명 중 서열 47위의 인물이다. 1위가 소하이고 번쾌가 5위이며 장량은 62위였으니 만만치 않은 서열이었다.
진평은 본래 유방의 가신 그룹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유방의 적들을 도와 유방을 괴롭힌 전력이 있는 인물. 하지만 유방의 용인술에 의해 발탁되어 항우와의 전투에서 숨은 공을 세운 유방의 그림자 참모조직의 책임자였다. 결론적으로 진평은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일조를 했고 통일 후 유방의 통치 철학을 수행한 충실한 관리였으며 유방 사후에는 유방의 정비인 여태후의 잔혹한 통치기간 10년을 견뎌내고 다시 유씨 황조의 정통을 계승시킨 한나라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진평은 호유향 사람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농사를 짓는 형 진백과 같이 살았다. 진백은 동생인 진평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한 인물이다. 진백 자신은 뼈 빠지게 농사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라고 주문했다. 당연히 진평의 형수는 가만히 앉아 책이나 읽는 진평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매번 구박이 심해지고 심지어는 “시동생 진평은 아무 쓸모 없는 인물이다”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형인 진백은 진평을 선택했다. 그는 동생인 진평을 불평하는 아내를 내쫓고 진평에게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평은 큰 키에 체격도 좋고 더구나 꽃미남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책이나 읽으면서 무위도식하는 진평에게 “그 좋은 풍채를 갖고 어찌 저리 쓸데없는 짓만 하는가” 책망했지만 진평과 진백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놀고 먹고 책 읽는 것에 지친 진평은 공동의 몫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배급된 고기를 나눠주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이 일에서 진평은 자신의 능력 중 10%만을 발휘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탄복한다. 그는 누구에게 치우침 없이 똑같은 양으로 고기를 배분했고 그가 나누는 것에 마을 사람들은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기를 자르며 진평이 “천하를 나누는 일을 맡겨도 이처럼 나는 잘 할 수 있는데…”(得宰天下,亦如此肉矣!”)라는 푸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진평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결혼이다. 가난한데다 직업도 없이 책만 읽는 진평에게 시집을 올 처녀는 없었다. 진평은 생각했다. 어차피 인생은 모험이고 그렇다면 결혼도 자신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편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인근에서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장 씨 가문의 딸이었다. 장목의 손녀는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집에 있었다. 물론 장 씨는 자신의 박복함보다는 남편들의 사람됨과 그릇이 작은 것이 다섯 번 결혼의 실패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진평은 장목의 손녀딸을 자신의 아내감으로 목표를 정했다.
하루는 마을 사람이 상을 당했다. 온 동네가 상가를 챙기는데 진평은 가장 일찍 상가를 찾고 또한 가장 늦게 퇴근하면서 성실하게 상가 일을 도왔다. 이를 눈여겨본 이가 바로 장목이었다. 그는 하인과 함께 집으로 가는 진평을 미행했다. 성곽 외진 곳의 허름한 집이었지만 진평의 집 앞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동네에서 존경받는 어른들이 타고 다니는 수레가 자주 진평의 집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궁색한 생활에 비해 진평의 학식을 높이 산 장목은 아들인 장평을 불러 손녀를 진평과 결혼시키자고 말했다. 물론 장평은 “돈 한 푼도 없는 거지에게 딸을 맡길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장목은 진평의 앞날이 변화가 많을 것임을 설명하면서 결혼을 밀어 붙였다.
사실 진평 입장에서는 처가 덕을 보자는 노골적인 정략결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진평의 목적은 성사되었다. 이후 처가의 풍부한 자금지원을 받은 진평은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식견을 넓히고 그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체면과 수모는 잊어라
처음 진평이 종사한 사람은 위나라 왕 위구이다. 위구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여러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았지만 천성적으로 귀가 얇아 부하들의 참소와 모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위구 밑에서는 뜻을 펼칠 수가 없다고 판단한 진평은 초나라의 항우를 찾아간다. 그에게 맡겨진 첫 번째 중요한 임무는 은왕 사마앙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진평은 항우에게 반기를 들고 유방 편에 선 사마앙을 계책과 용병술로 격파해 초나라의 봉토로 삼는데 성공한다. 항우는 크게 기뻐하며 진평을 신무군으로 올리고 ‘도위’라는 직책을 하사한다. 하지만 곧바로 유방의 공격을 다시 받은 사마앙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유방에 투항한다. 항우는 진노했다. 항우는 “안에서 내통하고 배반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 쉽게 유방에게 질 수가 있느냐?”라고 의심하며 은나라의 모든 관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진평은 자신도 항우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모든 관직과 재물을 던져버리고 항우의 곁을 떠난다.
이때도 일화가 있다. 진평은 홀몸으로 항우를 떠나 배를 탔는데 뗏목을 젓던 사공이 진평의 외모만 보고 그만 욕심을 품은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비단 옷을 입은 진평이 돈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 것. 사공의 눈치를 살피던 진평은 ‘내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곧바로 비단옷을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사공의 노 젓는 일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사공이 가만히 살펴보니 허울만 멀쩡한 속빈 강정의 거지가 아닌가. 사공은 진평을 죽여 재물을 취할 욕심을 버렸다. 순간의 기지가 진평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명분과 체면을 중요시하던 시대에 진평의 몇몇 행동들은 사실 파격에 가까운 것이다. 다섯 번 결혼한 여자를 선택해 결혼한 것, 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거지꼴임을 밝히는 것 등은 두둑한 배짱과 뚜렷한 목표 의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진평은 자신이 계획하고 원대하게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면과 형식을 과감히 벗어던질 수 있는 실용을 중시했다. 또한 그는 목적과 결과를 위해 과정의 고단함은 감내하는, 철저히 목표지향적 인물인 셈이다.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승진이 목표라면, 그 결과에 따르는 통과의례 같은 직장생활의 고단함은 군대 훈련소에서 피할 수 없는 각개전투와 화생방 훈련처럼 치러내는 단순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하지만 세상사, 직장일 모두 발생할 수 있는 경우는 한 두 가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민과 번민의 세계일 뿐이다. 사물과 상황을 단순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직관이겠지만 원칙을 받아들이는 힘, 거대한 파도에는 저항하지 말고 그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파도를 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진평은 그 점에서 아침마다 점령군의 깃발이 바뀌고 법과 왕조가 새로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살겠다’ 그리고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목표 외에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주어진 환경이라면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동력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선전과 여론전의 고수 진평, 유방의 목숨을 구하다
한나라로 온 진평은 유방의 참모 위무기의 천거를 받는다. 하지만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하고, 유방이 한신을 모셔오는 듯한 대접은 아니었다. 유방은 천거된 인물들을 한 곳에 모아 면접을 보았다. 모두 9명이었다. 일면식이 끝나자 유방은 “됐다. 모두들 가서 쉬어라”하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다 일어나 유방의 처소를 떠났지만 진평은 남달랐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라고 자리에 남았다. 진평은 유방과 독대 면접을 치룬 것이다. 진평의 탁월한 혜안과 식견에 탄복한 유방은 그 자리에서 진평에게 ‘호군중위’란 중책을 맡겼다. 호군중위란 유방의 장수들을 감시하는 역할로 유방의 신임을 받는 자만이 그 자리를 맡아온 중책이다. 그만큼 진평과의 첫 만남에서 유방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 뒤 유방은 진평을 총애했다. 진평의 뛰어난 계책과 용병술이 항우와의 전투에서 효과를 발휘한 것은 당연하고 진평의 성실함과 영민함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자 유방의 가신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졌다. ‘위구와 항우 밑에서 도망쳐 나온 주제에 주군의 총애를 믿고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중 주발과 관영이 주축이 되어 유방에게 “진평은 두 사람이나 모시던 사람을 바꾸었고 불성실하고 뇌물도 받는다”고 말한 것이다. 유방은 진평을 불러 책망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억울하다고 항변했겠지만 진평은 담담하고 정연하게 자신의 견해를 유방에게 설파했다.
“신이 위구를 떠난 것은 저의 진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항우는 자신의 일족 외에는 사람을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뇌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금을 받아 군자금으로 유용하게 썼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유방은 진평을 재신임하며 ‘다시는 진평에 대해 내 앞에서 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진평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바로 항우와의 전투에서다. 관중을 손에 넣은 유방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항우에게 대패하고 패잔병과 함께 형양성으로 쫓기듯 들어왔다. 본국에서 지원군이 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항우는 정병을 거느리고 형양성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유방은 급하게 항우에게 강화사절을 보냈지만 항우는 거절했다.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유방에게 진평이 나섰다.
“본디 항우는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수만 냥의 금을 주시면 그 금을 이용해 항우가 장수들을 의심하게 하겠습니다.”
진평은 유방에게 받은 금을 초나라 진영에 뿌렸다. 그리고 소문을 냈다. 범증과 종이매, 용저 등이 항우를 배반한다고. 이 소문은 항우의 귀에도 들어갔고 항우는 형양성 앞에서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유방과 시간을 벌기 위한 강화협상에 돌입했다. 진평은 꾀를 냈다. 항우의 사자가 도착하면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대접하다가 갑자기 “사자로 오신 분이 범증이 보낸 사자가 아니고 항우가 보냈군”하면서 상을 치우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내놓았다. 사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항우에게 그대로 보고했고 항우는 범증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확신했다. 범증은 계속해서 항우에게 형양성을 공격해 유방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을 의심하는 아들 같은 항우의 마음을 읽은 범증은 항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다 그만 화병에 등창이 나 죽고 말았다. 진평의 계략이 항우의 최고 참모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범증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기세를 몰아 형양성 탈출을 계획한 진평은 2000명의 여자들에게 갑옷을 입혀 일제히 동문을 열고 항우군을 공격했다. 깜짝 놀라 허둥대는 항우군의 시선을 피한 유방은 진평과 함께 서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천하는 유방의 차지가 된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곧이어 공신사냥에 나선다. 최대의 목표물은 한신이었다. 항우와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한신은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제나라 왕으로 봉해줄 것을 유방에게 건의했다. 유방은 대노했지만 진평은 장량과 함께 이 제안을 수락해야 한다고 유방을 설득했다. “한신을 적으로 만들면 대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는 이들의 의견에 유방은 한신을 어쩔수 없이 일단 제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유방은 진평을 불러 다시 한신을 공격하자고 말하지만 진평은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유방이 지방을 순례하는 자리에 한신을 불러 사로잡자는 제안을 한다. 거사는 이루어졌고 한신은 진평의 계교로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머지 공신들도 한신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한신을 제거하고 정세가 안정되자 유방은 진평의 공을 높이 사 상을 내렸지만 진평은 자신을 유방에게 천거한 위무기에게 그 공을 돌렸다.
유방은 제위 7년 만에 한신을 포함한 팽월, 영포 등의 모든 공신을 숙청했다. 장량도 떠나고 유방 옆에는 진평만이 남아있었다. 그때 북방의 강력한 세력인 흉노가 한나라를 침공했다. 유방은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흉노와 대결했지만 계략에 걸려 그만 포위되고 만다. 생사의 위기에서 또 한 번 유방의 목숨을 구한 것은 진평이었다.
이번에도 진평은 많은 뇌물을 써 흉노왕의 부인을 움직였다. 즉 흉노왕이 한나라 여자를 취하고 싶은 욕심에 한나라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흉노왕의 부인은 질투심에 흉노왕에게 철군할 것을 매일 종용해 그만 흉노왕은 유방을 사로잡을 기회를 눈앞에 두고 철군하고 만다. 그만큼 진평의 선전선동술은 대단히 치밀하고 효과적이어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정도였다.
승승장구하던 진평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바로 유방의 정비인 여태후와 유방이 총애하는 후궁인 척부인과의 세력싸움이었다. 유방은 척부인 소생의 왕자 유여의를 잡아 죽여야 한다고 번쾌가 주장했다는 참소를 듣고 격노한다. 곧장 진평과 주발을 불러 노관의 반란을 진압하러 변방에 있는 번쾌를 찾아가 참수하라고 명령한다. 진평과 주발은 고민한다. 유방의 명을 받아 떠나면서 최대한 천천히 행보를 이끌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번쾌가 누구인가. 한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자 고향 친구이고 동서지간이며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인물이다. 즉 여태후의 동생 여수가 바로 번쾌의 부인인 것이다. 만약 유방의 말대로 번쾌의 목을 쳤다가 유방이 후회하거나 여태후가 원한을 품는다면 그 화는 고스란히 진평과 주발에게 돌아올 것은 뻔한 일이다.
진평은 꾀를 낸다. 번쾌에게 저항치 말라고 슬쩍 이르고 번쾌를 압송한다. 그리고 진평은 번쾌를 데리고 장안으로 떠나고 주발은 그곳에 남아 군대를 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진평은 번쾌의 포승을 풀고 성심성의껏 대접한다. 그리고 천천히 이동한다. 수도인 장안이 지척에 다다를 즈음 유방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진평은 홀로 여태후를 찾아가 자신이 번쾌를 살리려 노력한 사실을 알린다. 기뻐한 여태후는 진평에게 물러가라 말하지만 진평은 머물기를 자처한다.
이것은 진평이 권력투쟁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진평은 자신보다 누군가가 먼저 여태후에게 그동안의 일을 말하는 것을 꺼려한 것이다. 그만큼 ‘첫 보고의 중요성’을 파악한 것이다. 문고리 권력이라는 것이 있다. 직급에 상관없이 최고 권력자를 만날 수 있는 권한을 장악한 비선의 힘을 말하는 것으로 진평은 여태후의 문고리 권력들이 자신을 참소하고 왜곡할 것이 두려워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세상은 이제 여 씨의 천하가 되었다. 여태후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친인척을 고위직에 임명했다. 유방의 뒤를 이은 혜제는 그저 명목상의 황제였다. 이렇게 8년의 시간이 흐른 뒤 혜제가 죽었다. 여태후는 혜제의 뒤를 이을 황제를 여 씨로 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상국인 왕릉은 결사반대를 했고 진평은 주발과 함께 여태후의 뜻에 찬성했다. 여태후는 왕릉을 실권 없는 태부로, 자신의 심복인 심이기를 우승상으로 교체했다. 모든 정사는 심이기의 결제를 받아 여태후에게 보고된 뒤 결정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일제히 왕릉을 칭찬하고 진평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역시 진평은 위구와 항우를 버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유 씨 주인을 배반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지만 진평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린 것이다. 허울 좋은 감투인 재상 자리에 앉아서 진평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를 노리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번쾌의 부인이자 여태후의 동생인 여수가 옛날 유방의 명으로 번쾌를 죽이러 갔던 진평을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그 즈음 여 씨 가문은 유방의 측근들을 모두 제거할 계획이었고 그 대상의 일순위가 진평이었다. 여수는 여태후를 찾아 진평이 매일 술이나 마시고 부녀자를 희롱한다고 모함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은 소문대로 술 마시고 객기를 부리면서 쓸데없는 농담이나 늘어놓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것은 진평의 고도의 생존 기법이었다. 그가 여태후의 서슬 퍼런 감시망 하에서 기개를 내보이고 영리한 재상 노릇을 했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를 다 가졌어도 어찌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천년을 살 것 같았던 여태후도 병들어 죽고 말았다. 후사를 둘러싸고 모든 관리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사이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진평이었다. 그는 주발 등 유방 휘하에서 녹을 먹은 창업공신들을 모아 기습적으로 궁궐을 점령하고 여 씨 일가를 숙청했다. 그리고 유방의 후예인 유황을 새 황제로 모시니 이가 바로 한 문제이다. 그야말로 하룻밤 만에 일어난 거사였다. 10여 년을 술이나 마시던 뒷방 늙은이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이 치밀하고 대담한 거사였다. 문제는 공을 인정해 진평을 우승상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진평은 “주발이 더 공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양보하며 자신은 주발의 아래인 좌승상을 맡았다. 이처럼 진평은 유방의 주는 상은 자신을 천거한 위무기에게, 문제의 상은 주발에게 양보하면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는 처세의 달인다운 행보를 보였다.
하루는 문제가 진평과 주발을 불러 물었다. 한 해의 세수 수입과 하부 행정조직에 관한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주발이 쩔쩔매며 답을 못하자 문제는 진평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자 진평은 “폐하, 그런 질문은 담당관을 불러 하시지요”라고 답했다.
문제가 약간 역정을 내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재상의 역할은 무엇인가?”
진평의 답은 거침이 없었다.
“재상은 황제를 도와 천하의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또한 만물이 제대로 크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밖으로는 오랑캐와 이리 같은 제후들이 경거망동하지 않게 잘 다스리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케 하는 것이 재상의 본분입니다.”
문제는 크게 기뻐하면 진평을 칭찬했고 곧이어 주발이 물러나자 바로 진평에게 우승상을 맡겨 한나라 모든 살림을 맡겼다.
시골에서 고기를 썰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진평. 위구와 항우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떠나고 유방의 휘하에서도 일종의 ‘경력 사원’으로 공채 출신들의 모함과 견제를 당했던 진평. 그가 드디어 한나라 황실의 정통을 이은 만고의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며 관리들의 우두머리 자리에 우뚝 선 것이다. 이런 진평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평은 한나라의 종묘를 평안하게 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주인공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평은 머리도 좋고 계책도 뛰어나지만 특히 균형감각과 형세 분석에 능란한 사람이었다. 그는 빠른 판단으로 위구와 항우에게서 나와 새로운 주인인 유방을 찾았다. 그리고 유방에게는 자신의 장점을 내보이며 깊은 인상을 심어주면서 단박에 측근의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유방이 적들에게 포위되어 사지에 빠졌을 때는 천하의 둘도 없는 기묘한 방법으로 유방의 목숨을 보존케 했다. 그보다 진평이 칭찬받아 마땅한 처사는 여태후 치하의 10년이다. 만약 진평이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쿠데타를 모의하거나 후일을 도모하는 것처럼 행세를 했다면 진평의 목숨은 물론이고 유 씨의 부활은 요원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진평의 처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오늘의 수모는 목적 달성의 기쁨을 뛰어넘지 못한다>
한 순간의 분함과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처세학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처세학의 달인이라 일컫는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남의 가랑이를 기어갈 수 있는 용기, 모함과 이간질을 견뎌내는 인내심 그리고 쓸모없이 소리만 요란한 만용에 가까운 객기의 경계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모욕과 창피함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아마도 위대한 성인이거나 바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수모를 한 순간 허허로움으로 넘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수모를 잊지는 말아야 한다. 되돌려 주자는 것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한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것이다.
직장인들에게 직책, 계급, 기수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작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10년 후 이 직장에서 뿌리내린 성공한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냈다면 순간의 수모는 당신에게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상사의 인사평가에서 업무능력, 대인관계 등 여러 항목 중에서 의외로 중요한 것은 ‘이 직원이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는가’라는 평가이다. 이 부분에서 매순간 파르르 하며 얼굴에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당신의 평가난에 분명 ‘부적격’이란 도장이 찍혀 있을 것이다.
<기다림을 이길 수 있는 재주는 아무것도 없다>
진평의 승리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그는 유방 밑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다렸고, 여태후 치하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웅대한 꿈을 숨긴 채 기다렸다. 물론 그 기다림은 어쩔 수 없기에 행하는 목적지 없는 기다림이 아니다. 순간의 폭발을 위해 실력을 쌓고 천하의 민심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물은 100℃에서 정확히 끓는다. 99℃에서도 물이 뜨겁다는 것을 손을 대보지 않고는 모른다. 물론 기다리는 자는 정확히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편향되지 않은 날카롭고 객관적인 상황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여태후 사후에도 천하의 민심이 여 씨에게 있었다면 진평의 거사는 분명 실패했을 것이다. 진평은 민심이 유 씨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대담하게 궁정 쿠테타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평의 팔이 항상 하나는 호랑이 입 속에 들어있는, 즉 언제 물릴지 모르는 신세였지만 또 하나의 팔은 민심이라는 서서히 달궈지는 물 안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기다림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한이다. 그것은 기다림의 끝을 예상할 수 있는 예지력도 필요한 것이다. 진평이 무조건 위구 밑에서, 혹은 항우 밑에서 ‘언젠가는 내 재주를 알아주겠지’하고 기다렸어도 그 끝은 그냥 서생으로 끝났을 것이다. 기다림과 기다림을 멈출 줄 아는 판단을 동시에 갖추기는 힘들지만 그 점에서 진평은 뛰어남을 보인 것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 하지만 수백, 수천 명의 직원들 가운데서 가만히 앉아있는 당신에게 영화에서 흔히 보던 천재일우의 기회는 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사장실을 문을 박차고 들어가 “회사의 명운을 건 프로젝트를 준비해왔습니다” 외쳐봤자 ‘이상한 놈’ 소리 듣기 십상이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집중해 회사의 방향을 우선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회사의 긴 여정에서 ‘준비된 내가’ 언제쯤 손을 번쩍 들지도 자신이 판단해야 한다. 그래도 이것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왜? 최소한 당신은 준비를 했을 것이고 그것은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것이니까. 안된다면? 다시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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