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당 95주년의 중국 공산당

중국 공산당이 7월 1일로 창당 95주년을 맞았다. 원래 창당기념일은 중국 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린 1921년 7월 23일이지만, 1938년 5월 마오쩌둥의 제의에 따라 제1차 당대회가 열린 달의 첫째 날인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결정했다.



중국공산당 집계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당원 수는 8779만3000명. 전년에 비해 110만7000명 증가했다. 남성 당원과 여성 당원의 비례는 3 대 1 정도로, 여성 당원의 숫자가 전체의 24.7%에 해당하는 2167만2000명이다. 학력은 대졸 이상이 43%로, 3775만5000명이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들이다. 직업별로는 노동자가 734만2000명, 기술자가 1253만2000명, 국유기업과 민간기업 경영인이 901만6000명이고, 당정 기관 관료가 739만7000명, 학생이 224만7000명, 기타 직업 종사자 710만5000명, 은퇴자들이 1621만6000명이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중국 집권당이지만 정식 창당된 1921년에는 공산당이라는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베이징대 교수이던 리다자오(李大钊), 천두슈(陈独秀) 등 진보적 지식인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연구하는 비밀모임 정도로 알려졌다. 2016년 현재 9000만명이 넘는 당원 수를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이지만 95년 전 상하이에서 열린 제1차 당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의 숫자는 12명이었고, 전국의 당원 숫자는 50명에 불과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창사(长沙) 대표로, 12명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제1차 당대회를 개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베이징(北京) 대표 천두슈와 광저우(广州) 대표 리다자오는 참석도 못했다.그러나 새로운 이념에 대한 열정은 대륙을 뒤덮었다. 훗날 중국 공산당의 기초를 다진 역사적 인물이 되는 베이징 대표 류런징, 상하이 대표 리한쥔, 산둥성 대표 왕진메이, 후난성 대표 마오쩌둥 등이 당대회후 1921년 9월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창당 이후 한동안 눈에 띄는 발전은 없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위세에 눌려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는 계기가 된 1927년 4·12 백색테러 당시 공산당의 수많은 맹장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1936년 2차 국공합작으로 부활의 전기를 맞았고, 1945년까지 국민당과 함께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이후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면서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되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주도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3년 이내에 따라잡겠다’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잇달아 시행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의 정치투쟁을 10년 가까이 계속한 끝에 마오가 사망할 당시 중국 경제는 세계 최빈국의 나락에 떨어져버렸다.

마오의 사망으로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1978년 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사상해방(思想解放)’과 ‘실사구시(实事求是)’로 개혁개방 시대의 정책을 펴나갈 것을 강조함으로써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지난 38년간의 개혁개방에 따른 빠른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미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옷을 벗어버렸다. 이론적 배경은 장쩌민(江澤民) 전 당 총서기가 2000년 2월에 제시한 ‘3개 대표이론’으로, 당시 장쩌민 총서기는 “중국공산당이 전 인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제시하며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라는 이론적 기초를 제거하고 ‘전 인민의 대표’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결과 개혁개방 38년 만에 미국 다음가는 G2로 올라선 가운데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등장한 시진핑은 2012년 11월 선출되면서 ‘두 개의 100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1921년 이후 100년이 지난 2021년까지는 중산층이 충분히 확보된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를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 이후 100년이 흐른 2049년까지는 중국이 과거 당(唐)이나 청나라 초와 같은 세계 최강의 나라로 복귀한다는 내용의 야심 찬 구호다.

중국공산당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11년 만인 1989년 6월 천안문광장에서 반부패와 민주화 요구를 내건 시민·대학생들의 시위를 군대를 동원해서 유혈진압함으로써 ‘민중의 해방자’라는 공산당의 존립 기반을 잃고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정치 민주화는 보류하고, 경제의 민주화와 자유화라는 중국 특유의 ‘신권위주의’를 내세워 위기를 극복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인민의 불만 표시를 유혈진압한 과거를 남겨 아직도 그 그늘이 남아 있는 상태다.

공산당 강령은 여전히 당을 ‘중국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 규정하고 있으나 시장경제 개혁은 수많은 국영기업의 폐쇄로 수백만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공산당의 ‘중국 제패’에 결정적 도움이 된 농민들의 소득은 계속 감소되고 있다.

더욱 심해진 당 및 정부 관리들의 부패, 빈부격차,인권 탄압, 가치관의 혼란 등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는 당에 대한 불신을 낳고 있다.

인터넷, 위성 방송 등 첨단 통신기기의발달은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례없는 자유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당의 권위는 점점 추락했다. 요즘 이들에게 공산당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공직과 기업에서 더 나은 직업을 찾기 위한 경력으로서만 필요할 뿐이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내년 가을의 제19차 전당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전당대회를 할 때마다 새로 선출되는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정치국 상무위원, 당 총서기의 임기는 5년이다. 중국공산당은 대체로 1921년 창당 이후 5년마다 한 차례씩 전당대회를 개최해왔다.

이와 관련 중국의 인터넷 블로그에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글이 떠서 주목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우선 윤회(轮回)하는 문제를 남기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 방면에서 중국의 개인 재산은 국가 전체 자산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게 돼 있다. 중국공산당이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세수(税收)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당의 권력을 뺏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둘째는 사회주의적 정치제도 방면에서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5년 또는 10년마다 규칙적으로 정권교체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당교(党校)를 통해 인재와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고, 자신을 대신할 다음의 정치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중국공산당에서 체계화되어가고 있는 점은 중국공산당의 수명을 확장하는 데 커다란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반복해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진(秦)·한(汉)·수(隋)·당(唐)·송(宋)·원(元)·명(明)·청(清) 왕조가 그랬듯이 발전기와 쇠락기를 거쳐 왕조의 붕괴에 직면해온 것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거기에다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최대의 난제인 소수민족 문제는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라는 문제와 겹쳐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 근거까지 흔들어놓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시진핑이 두 개의 100년을 통해 2050년의 중국에 대한 그림을 그렸고, 덩샤오핑은 1980년대에 “중국공산당 100년 부동요(不动摇)”를 주문해서 2080년까지도 중국 사회를 중국공산당이 리드할 것을 요구했다. 과연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