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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두번째 수도, 난징

화로(火炉), 여름철 찌는 듯 더운 도시를 중국에서는 ‘화로’라고 표현한다. 이 말이 생겨난 건 민국시기다. 당시 매체에서 지칭한 ‘3대 화로’는 충칭(重庆), 우한(武汉), 난징(南京)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도시는 각각 창장(长江)의 상류·중류·하류에 자리한다. 세 도시에는 모두 창장대교가 놓여 있다. 창장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대교 중에서 우한과 난징의 것은 의미가 각별하다. 1957년에 개통한 우한창장대교는 제1호 창장대교다. 그런데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아서 만든 것이다. 중국이 독자적으로 건설한 첫 번째 창장대교는 바로 1968년에 개통한 난징창장대교다. 자동차가 달리는 위쪽 다리의 길이는 4589m, 기차가 달리는 아래쪽 다리의 길이는 6772m에 달한다. 중·소분쟁이 격화되었던 1960년대에 오롯이 중국의 기술로 건설한 난징창장대교는 ‘자력갱생의 본보기’이자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성취’로 평가되었다.

난징창장대교가 개통한 지 반세기가 지난 현재, 장쑤(江苏)성의 성회 난징은 어떤 모습일까? 최근 난징이 획득한 타이틀을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 2014년에 중국 문화 소프트웨어 도시 1위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2015년에는 전국 신용 모범도시, 전국 종합 운송서비스 모범도시,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 4위, 중국 소강(小康)사회 건설 모범상 1위에 선정됐다. 난징은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도시다. 2014년에 유스 올림픽을 개최한 데 이어, 올해 9월에는 세계롤러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난징은 또한 2015년 도시 기후 리더십 그룹(C40)이 수여하는 10개 분야의 상 가운데 ‘도시교통’ 분야에서, 런던·싱가포르·부에노스아이레스와 최종 경쟁 끝에 일등을 차지했다. 이는 유스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약 4000대에 달하는 신에너지 자동차로 대중교통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녹색 올림픽’을 구현한 덕분이다. 난징은 그해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약 2만5000톤이나 감소시켰다.

확실히 오늘날 난징은 기존의 노쇠하고 정체된 이미지에서 탈피해 젊고 역동적인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2016년 종합부동산서비스회사 존스 랑 라살르(JLL)가 발표한 ‘도시 역동성지수(CMI)’에서 난징은 15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20위에서 5단계나 상승한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상위 20위권에 든 중국 도시는 난징 외에도 상하이(6위), 베이징(9위), 선전(12위)이 있다. 우리나라 서울은 19위에 해당한다. 난징은 창장 삼각지대의 중심도시로, ‘일대일로(一带一路)’ 전략과 ‘창장 경제벨트’ 전략이 합류하는 접속점에 해당한다. 도시 영향력, 선진적인 고등교육 시스템, 과학기술력, 인구 증가 추세 등을 고려했을 때 난징의 발전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난징의 여러 타이틀 중에서 ‘3대 화로’는 이제 더 이상 명실상부하지 않다. 기존에 3대 화로라고 하면 충칭·우한·난징을 가리키고, 4대 화로라고 하면 여기에 난창(南昌) 혹은 창사(长沙)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중국 기상국 국가기후센터에서 최근 30년 동안의 기상 데이터를 근거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여름철 가장 무더운 도시에서 난징은 10위권 밖인 것으로 나타났다. 충칭(2위), 우한(7위), 난창(6위), 창사(5위)가 모두 10위권에 포함된 것과 비교하면 난징의 순위(14위)는 의외다. 물론 매우 ‘바람직한’ 순위권 밖이다.

여기에는 대기 흐름의 변화라는 변수 외에도 난징의 지속적인 식수조림(植树造林) 노력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녹색도시를 위한 노력이 난징의 무더위를 덜어준 것이다. 10위권 밖이긴 하지만 난징이 여름철 매우 무더운 도시임은 분명하다. 창장 연안에 자리한 충칭·우한·난징이 화로처럼 무더운 데는 아열대 고기압의 영향 외에도 지리적 영향이 크다. 세 도시 모두 해발이 낮은 하곡(河谷) 지형으로,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지면의 열을 사방으로 발산시키기가 어렵다. 게다가 수증기가 많아서 습도가 높은 탓에 땀이 쉽게 증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무덥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창장 연안에는 더 무더운 도시들이 있다. 그럼에도 도시의 지명도, 그리고 화로의 대명사로 통해온 기존의 관념 때문에 ‘화로’라는 난징의 타이틀은 지속될 듯하다. 중국의 역대 도읍지 가운데 항저우와 시안이야말로 되도록 여름철은 피해서 가는 게 좋다. 이 둘은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여름철 무더운 도시 가운데 각각 3위와 9위에 해당한다.

무더운 난징을 꽃에 비유한다면? 접시꽃·봉선화·수련 같은 여름철 꽃이 얼핏 떠오른다. 그런데 난징의 시화는 다름 아닌 ‘매화’다. 매화의 도시 난징에는 ‘매(梅)’자가 들어간 지명이 60여개나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게 ‘매화산’이다. 매화산은 자금산(紫金山)의 일부로, 자금산에는 손권·주원장·쑨원의 무덤이 있다. 주원장의 명 효릉(孝陵)과 쑨원의 중산릉(中山陵) 사이에 자리한 매화산에는 무려 3만5000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는데, 품종은 350개에 달한다. 난징에서 매화를 심기 시작한 건 1500여년 전 육조시대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매화산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건 불과 반세기 남짓이다. 그전에는 내내 ‘손릉강(孙陵岗)’이라고 불렸다. 바로 오나라 손권의 무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1929년에 쑨원의 유해가 중산릉에 안장된 이후, 손릉강에 매화를 대규모로 심었고 점차 그 면적이 확대되면서 매화산이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손릉강 대신 매화산이 정식 명칭으로 확정된 건 왕징웨이(汪精卫)가 이곳에 묻히면서부터다.


개통 이듬해(1969)의 난징창장대교


현재 매화산에는 왕징웨이의 무덤이 없다. 무슨 사연일까? 1942년 청명절에 중산릉을 참배한 왕징웨이는 쑨원이 묻힌 중산릉 곁 매화산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바 있다. 1944년 11월 10일에 왕징웨이가 일본에서 병사하자 일본군은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 난징에 묻힐 수 있게 했다. 왕징웨이의 장례가 치러진 11월 23일, 난징은 임시 휴일이었다. 게다가 장례식에 참가하는 난징 시민에게는 20위안의 채권이 발급되었다. 돈을 내는 게 아니라 돈을 받고 장례식에 참가하다니! 20위안은 당시 노동자 월수입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한간(汉奸), 즉 매국노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대가였던 것이다. 일본 군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왕징웨이의 유해가 매화산에 묻혔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협상에 주력했다. 일본군이 난징을 포위하기 전에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피했고, 이후 왕징웨이는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한다. 왕징웨이 정권은 친일 괴뢰정권이었다. 난징대학살이 자행된 현지에서 수립된 친일 괴뢰정권!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陈璧君)은 무려 5톤의 철강 조각을 콘크리트에 섞어서 왕징웨이 무덤에 붓도록 조치했다. 지은 죄가 많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터. 하지만 결국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매화산의 왕징웨이 무덤을 없애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장제스는 결국 육군총사령관 허잉친(何应钦)을 보내 왕징웨이의 무덤을 없애도록 했다. 무덤을 폭파하는 데 150㎏의 독일제 TNT 폭약이 사용되었다. 무덤에서 꺼내진 왕징웨이의 시신은 청량산으로 옮겨져 불태워지고 그 재는 길가 웅덩이에 버려졌다. 매화산에 묻힌 지 겨우 열 달 남짓 지나서였다.

왕징웨이의 무덤이 있던 곳에는 정자가 세워졌다. ‘관매헌(观梅轩)’이라는 이름의 이 정자는 매화산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해마다 2월 20일부터 3월 말까지 난징에서는 매화 축제가 열린다. 1996년부터 개최된 ‘난징 국제 매화절’의 주요 장소가 바로 매화산이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날은 1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겨울의 끝자락 봄이 도래하는 시기야말로 난징을 찾아가기에, 그리고 난징을 추억하기에 제일 좋은 때다. 강인함과 지조의 상징인 매화로 가득한 매화산에 왕징웨이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대지가 아직은 추위에 얼어 있을 때, 매화는 봄의 도래를 알린다. 차디찬 겨울을 이겨내고 피는 매화, 난징을 상징하기에 그야말로 제격이다. 모진 근현대사를 이겨낸 그 힘이 오늘날 난징의 성장 동력이 아닐까. 아편전쟁 패배로 중국이 외국과 체결하게 된 첫 번째 불평등조약은 ‘난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난징조약 이후 난징은 줄곧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곳이었다. 지상천국을 꿈꾸었던 태평천국운동의 좌절, 일본의 만행, 국민당과 공산당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난징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다. 또한 단단한 옹이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생겨난 옹이는 아픔을 이겨낸 징표다. 난징 기행은 아픈 역사를 상기하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역사 속에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깃들어 있다.

난징이라는 이름의 생명력 역시 대단하다. ‘경(京)’ 자가 들어간 역대 수도 가운데 오늘날에도 그 이름을 지키고 있는 곳은 남경(난징)과 북경(베이징) 두 곳뿐이다. 주나라의 호경(镐京), 장안(长安)으로 불리며 한당성세(汉唐盛世)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시안, 서경, 오대십국과 북송의 수도였던 동경, 요나라의 상경(上京), 후금의 성경(盛京), 만주국의 신경(新京), 이들 이름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태평천국의 천경(天京) 역시 그렇다. 난징에 도읍한 태평천국은 “모두가 평등한 지상낙원의 건설”을 모토로 내세웠고, 그에 걸맞게 수도의 명칭 역시 천경, 즉 ‘하늘의 수도’라고 이름했다. 하지만 천경도 결국 태평천국의 멸망과 더불어 지나간 이름이 되고 말았다.

천경 외에도 금릉·말릉·건업·건강 등이 모두 난징의 또 다른 명칭이다. 각 이름의 사연을 알아보자. 춘추전국시대에 이곳을 가장 먼저 차지한 건 오나라다. 이후 월나라가 새로운 주인이 되고, 이어서 초나라가 이곳을 차지했다. 예로부터 풍수가들은 이곳을 왕기(王氣)가 서린 땅이라고 했다. 기원전 333년, 초나라 위왕(威王)은 난징 서쪽 석두산에 성을 쌓는다. 그리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금을 묻었다. ‘금릉(金陵)’이라는 명칭은 이때 생겨났다. 이곳의 왕기를 누르려 했던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진시황이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산언덕을 절단하는 것이었다. 왕기의 맥을 자르고자 산언덕을 끊어내고, 이름도 ‘말릉’으로 고쳤다. ‘말’이란 마소를 먹이려고 잘게 썬 여물을 뜻한다. 여물을 썰 듯 산언덕을 절단한 데서 말릉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왕과 진시황은 난징의 왕기를 제거하고자 했지만, 이와 반대로 난징의 왕기를 적극 흡수하고자 했던 이도 있다. 바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해 조조를 물리쳤고, 유비에게 누이동생을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손권에게 말릉 쪽에 본거지를 두라고 권한 이가 바로 유비다. 결국 손권은 석두산에 석두성(石头城)을 쌓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건업(建业)’이라는 이름은 이때 생겨났다. 북쪽은 창장과 접하고, 동·서·남은 각각 자금산, 청량산(석두산), 우화대로 둘러싸인 이곳은 천연의 요새다. 건업, ‘업을 세운다’는 의미에 걸맞게 손권이 도읍한 것을 계기로 난징은 역사의 중심 무대로 부상하게 된다. 오나라를 비롯해 동진(东晋)·송·제·양·진(陈)의 육조가 이곳에 도읍하여 눈부신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오나라 때 건업이라 칭했고, 동진 때부터는 황제 사마업의 이름을 피해 ‘건강(建康)’이라 칭했다. 오나라와 동진, 송·제·양·진의 수도였기에 난징을 ‘육조고도(六朝古都)’라고 한다. 또한 난징을 ‘십조도회(十朝都會)’라고도 하는데, 이는 앞의 육조에 오대십국시기의 남당, 명나라, 태평천국, 국민당 정부를 더한 것이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이곳을 수도로 삼은 1368년, 바로 ‘난징’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때다. 명나라는 270여년 지속되었지만, 난징이 명나라 수도의 지위를 누린 건 불과 반세기 남짓이다. 1421년, 주원장의 넷째아들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난징은 여러 왕조의 수도였으되, 그 어느 왕조도 난징에서 길게 도읍하지 못했다. 또한 베이징으로 천도했던 명나라를 제외하면 죄다 단명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시황의 저주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여물을 썰 듯 산언덕을 절단한다는 의미의 ‘말릉’으로 명명했던 진시황, 그는 이곳의 왕기를 없애고자 산언덕을 끊어냈을 뿐만 아니라 강물의 흐름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강물이 도시를 관통하여 흐르게 함으로써 왕기를 씻어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 강이 다름 아닌 난징의 ‘어머니 강’이라 불리는 진회하(秦淮河, 친화이허)다. 진회하는 진시황의 전설에 근거해서 당나라 때 생겨난 명칭이다. 진회하의 본래 이름은 용장포(龙藏浦, 용이 감추어진 강)였다. 자신의 제국이 영원하길 바라며 난징의 산을 잘라내고 물길을 돌린 진시황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난징의 왕기 때문이 아니라 진나라가 쌓아온 폭정의 결과였다. 난징에 도읍했던 여러 왕조의 단명 역시 어찌 진시황의 저주 때문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