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진왕조의 개국황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세 개다. 첫째는 영정(嬴政)이다.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인 그는 '진나라 사람으로 성이 영(嬴)이다.' 정월(正月)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정(正)이라고 지었는데, 고대에는 정(政)과 같은 뜻으로 쓰였기에 정(政)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영정이다. 둘째는 조정(赵政)이다.진나라에서는 출생지가 성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진시황은 진나라 소양왕 48년(BC259) 정월에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성이 조가 되어 조정이라고 불렸다. 셋째는 여정(吕政)이다. 진시황의 성이 어떻게 여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진시황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
'사기 여불위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정의 부친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조나라의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진왕실의 빈틈을 노렸다. 여불위는 가무에 능한 조희와 동거를 한 연후에 조희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그녀에게 진나라 태자 자초를 유혹하라고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초가 조희를 사랑하게 되면서 여불위는 조희를 자초에게 바쳤다. 조희가 달을 채워 영정을 낳자 자초는 조희를 부인으로 삼았다. 훗날 자초는 고국에 돌아와 보위에 올라 아들 정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반고는 이 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서에서 영정을 아예 여정이라고 칭하였다. 동한의 고유는 여씨춘추에 주석을 달았는데, 그가 서에 기록한 내용과 사마천의 기록은 대체로 일치한다. '여불위가 한단의 조희를 취했다. 이미 임신했으나 자초가 그녀를 보고 달라고 청하자 자초에게 바쳤다. 자초에게 간 조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이 정이다, 자초는 조희를 부인으로 삼았다.'당대의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시황의 이름은 정이다. 여불위는 자신이 총애하던 조희가 임신을 하게되자 장양왕에게 바쳤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시황이니, 여정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설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다음은 '사기여불위전'의 기록이다. '조희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는 대기가 되어 아들 정을 낳았다.' 여기서 기는 1년을 가르킨다. 즉 자초가 조희를 취한 지 1년 뒤에 조희가 영정을 낳았다는 말이다. 임신한 지 열 달만에 아이를 낳는다고 따져볼 때 영정은 자초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한, 동한에서 송대와 원대에 이르기까지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설이 신봉되었을 뿐 결코 이의가 제기된 적은 없었다.
진시황은 정말로 사생아였을까? 영원한 수수께끼다. 까마득한 일이라 사실을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러나 그 동기를 따지며 사기의 기록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마천은 화를 당해 잔혹한 궁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의 붓끝에서 역대의 가혹한 관리와 푹군들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진시황을 기록할 때 반감으로 과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대에 이르면 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명대의 탕빙윤은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은 전국시대 호사가들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보았다. 청대의 학자 양옥승도 이의를 제기했다. 즉 사기는 사실의 고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해들은 말을 근거로 기록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명대의 왕세정은 한 발짝 더나가 독서후기에서 두 가지 이유를 들기도 했다. 첫째 여불위는 오랬동안 부귀영화를 누릴 욕심에 자신이 진시황의 아버지라는 얘기를 고의로 날조했다는 것이다. 둘째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킨 뒤 6국의 귀족들은 식읍을 잃거나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신공격 외에 진왕조에 보복할 방법이 없었던 그들은 극도의 분노와 원망 속에서 진시황의 출생에 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니 진나라 왕실의 대도 끊긴 셈이다. 6국이 멸망했지만 진나라 역시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 가?' 어떤 이는 '대기'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기는 1년 소위 '대기'란 12개월이 차서 출산하는 것을 가르킨다. 흔히 여성이 임신한 사실을 알려면 대개 1,2개월이 지나야 한다. 여불위가 '조희를 바치기'전에 이미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조희가 자초에게 시집간 지 12개월만에 정을 낳을 수 있겠는가? 물론 임신을 한 후 예정일이 지나 출산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희가 예정일을 넘긴 것은 그 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이들은 사기 여불위전의 기록을 의심스레 바라보는 것이다.
곽말약의 십비판서에서도 여불위가 진왕 정의 생부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그는 세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첫째, 사기에서만 볼 수 있을 뿐 전국책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기타 방증 자료도 없기 떄문에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국책은 전국시대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고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중요한 국가 가운데 하나다. 어째서 여불위의 사기 협잡과 진왕조의 혈통에 대해 전국책에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다가 서한 시대의 사기에 비로서 기재되었을까? 둘째, 진시황에 관한 이야기와 춘신군과 여환의 이야기가 마치 한 판목에서 인쇄한 문장처럼 줄거리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춘신군과 여환 얘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나라에 이원이란 사람이 자신의 여동생 환을 초나라 왕에게 바치고 싶어했다. 그러나 초나라 왕이 생산을 할 수 없는 몸이라는 말을 듣고 이원은 여동생이 궁중에 들어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오래 총애받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여동생과 상의한 끝에 그는 먼저 여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친 뒤 임신하게 되면 다시 초나라 왕에게 바치기로 했다. 일은 과연 뜻대로 이루어져 이원의 누이는 춘신군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원의 누이는 춘신군을 부추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첩이 임신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습니다. 소첩이 서방님의 총애를 받은 지는 얼마 안되었으니 지금 초왕에게 소첩을 바치면 왕은 틀림없이 이 몸을 총애할 것이옵니다, 만약 하늘이 도와 소첩이 아들을 낳게 되면 서방님의 자식이 왕이 되는 것이지요.' 마음이 움직인 춘신군은 마침내 여환을 초왕에게 바쳤다. 여환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초나라의 유왕이다, 이 이야기는 여불위, 조희 얘기와 흡사하다. 곽말약은 이를 근거로 여불위와 조희 이야기는 아마도 서한 초기 여후가 집권할 당시 널리 퍼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바로 여씨 도당 사람들이 춘신군과 여환의 이야기를 모방해서 꾸며 냈을 것인데 목적은 여씨 섭정을 위한 여론 조성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사기 여불위전'에는 진시황의 어머니가 한단의 무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자초가 진나라에 돌아왔을 때의 기록을 보면 '자초의 부인은 조나라 세도가의 딸이다'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희와 세도가 딸의 차이는 너무 크기 때문에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사기의 역사적인 지위를 고려 기재된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쉽게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 명청시대의 학자와 곽말약 의 논단은 그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종의 억측일 뿐이며, 논거도 부족하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잇다. 사마천이 기록한 내용 중에 비록 모순된 점은 있으나 사기는 엽기가 아닌 준엄한 직필로 유명하기 때문에 여불위와 조희에 대해 근거없이 말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곽말약과 동시대에 살았던 한 학자는 곽말약이 제기한 세 의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첫째, 사기의 기록 가운데에는 전국책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이 적지 않은데, 사기가 오랫동안 전해지면서 칭송받은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그 떄문이다. 예컨대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은왕조의 세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살던 시대와 은대사이에는 천 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으며 사기 이후에는 실증할 만한 기록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이전의 많은 학자들 특히 서방의 학자들은 은왕조의 실재에 대해 의심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은허에서 갑골 문자가 발견되면서 사마천의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둘째 여불위와 조희의 얘기와 춘신군과 여환의 얘기가 비슷하다는 사실은 당시의 적잖은 정치 풍운아들 사이에서 그런 방법이 통용되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셋째 사기의 기록 중에 모순된 곳이 있지만 사실은 결코 모순되지 않았으며 양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만약 자초가 정말로 여불위의 첩에게 반했다면 여불위에게는 이것이 또 다른 기회가 될 터였다. 일단 자초가 귀국해서 즉위하게 되면 무희 뱃속의 아이가 황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불위의 야심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냉정한 사람이었던 여불위는 여러 관계에 능란했고 또 그런 관계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초가 무희에게 반하고 무희 뱃속의 아이가 보위에 오를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그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무희의 진짜 신분을 감추고 좋은 가문의 여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기에 기록된 조나라 세도가의 딸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시 왕손이었던 자초는 어느 정도 뼈대가 있는 집안의 여식을 아내나 첩으로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제후 위에 군림할 수 있겠는가? 무희에게는 어느 정도의 배경이 필요했을 테니 앞뒤 기록이 모순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밖에도 사기나 전국책에는 진왕 정이 황제가 되고 난 뒤 여불위와 태후가 사통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만약에 여불위가 이전에 태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면 자신의 정치 생명을 나 몰라라 하고 태후와 사통했을 리는 없다.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거나 예전에 사통한 적이 있어야 비로소 위험을 무릎쓰고 태후와 밀통할 엄두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쇠털같이 많은 미녀를 거느린 승상이 뭐가 아쉽다고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쓴 채 태후와 사통을 하겠는가? 이해가기 어려운 일이다.
어느덧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진시황 출생에 관한 논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조희가 임신을 하고 시집갔든 영정이 정말로 황실의 혈통이든 이런 문제들이 중국 역사 에서 차지하는 진시황의 위상과 역할을 퇴색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진시황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 뚜렷이 알 수 없는 그 출생의 비밀.. 이때문일까? 그를 소재로 삼고있는 tv드라마가 끊이지 않고 있다.
秦始皇“生父”悬案
秦始皇(前259~前210),中国统一的秦王朝的开国皇帝。史书记载,他有三个名字。一曰嬴政,他是秦庄襄王之子,“秦人赢姓”,由于生于正月,故起名为正,古代通政,因此写作政,所以追根而论为嬴政。二曰赵政,先秦时,有以出生地为姓的习俗。秦始皇以秦昭襄王四十八年(公元前259年)正月生于赵国首都邯郸,故以赵为姓,称赵政。三曰吕政,秦始皇又怎么会姓吕?这就牵扯到了秦始皇的身世问题。
据《史记?吕不韦列传》记载,赢政的父亲子楚在赵国做人质时,当时赵国的政治投机商吕不韦钻了秦国宫廷的空子。吕不韦先与一个能歌善舞的赵姬同居,知道赵姬有身孕后,让赵姬去勾引秦太子子楚。不久子楚爱上赵姬,吕不韦便把赵姬献给子楚。赵姬足月后生下赢政,子楚于是立赵姬为夫人。后来子楚回国继承王位,死后把王位传给子政。这种说法被班固所接收,于是《汉书》直接称赢政为吕政。东汉高诱为《吕氏春秋》作注,他的序记载的情形跟司马迁的记载基本一致:“不韦取邯郸姬,已有身,楚见说之,遂献其姬,至楚所,生男,名之曰正,楚立之为夫人。” 唐司马贞《史记索隐》这样解释:“吕政者,始皇名政,是吕不韦幸姬有娠,献庄襄王而生始皇,故云吕政。”
这种说法似乎有一定的道理。《史记?吕不韦传》记载,“姬自匿有身,至大期时生子政。”期(古音为ji)即一周年。就是说子楚娶了赵姬一年后,赵姬才生赢政。十月怀胎,一朝分娩,按照这样计算,赢政应该是子楚所生。从两汉到宋元时期,一直都信奉秦始皇私生子之说,未有异议。
秦始皇果真是私生子?这是一个千古之谜,由于年代久远,事实已无法查实。然而有人从动机上开始怀疑《史记》记录的真实性,由于司马迁因祸遭到残酷的宫刑,在他的笔下,历代酷吏、暴君多少被涂上不良的墨迹,所以也不能排除司马迁在记录秦始皇时,因反感而夸大其辞。
在明代,便有人开始对《史记》提出异议。明人汤聘尹以秦皇乃吕不韦之子,是“战国好事者为之”。清代学者梁玉绳也提出异议,认为《史记》系从传闻得来,非从考实得来,并从行文剖析,以为司马迁在记述中即有所保留。明朝的王世贞则更进一步,他在《读书后记》提出两条理由:一是吕不韦为使自己长保富贵,故意编造自己是秦始皇的父亲的故事;二是秦灭六国后,原六国的贵族或失去他们的食邑、或家破人亡。但他们除了进行言论攻击外别无办法对秦朝进行报复。于是在极端的愤恨中他们散播对秦始皇的身世进行攻击的这一言论:“秦始皇是吕不韦的私生子。秦宗室的香火到了这里也就熄灭了。六国虽亡,但秦国也同样灭亡”。另外,还有人对“大期”的解释提出疑问。期,一年也,所谓“大期”,是指过十二个足月之后分娩(一说十个足月)。按照常情,女子发现“有身”,一般在孕后一二个月,既然吕不韦在“献其姬”前已经“知有身”,据生育规律,赵姬何以能在归子楚后十二个月方分娩生政?怀孕超期分娩的情况也有,但赵姬的超期未免超得过于异常。所以他们认为《史记?吕不韦传》所述值得怀疑。
郭沫若在《十批判书》也怀疑吕不韦为秦王政生父之事,他指出三个疑点。其一,仅见《史记》而为《国策》所不载,没有其他的旁证,这未免不让人产生怀疑。《战国策》是研究战国时期的重要史料,而秦国是战国时期重要的国家之一,为什么对于吕不韦偷天换日,有关秦朝血脉的事情只字不提,一直等到西汉时期的《史记》才来记载?其二,关于秦始皇故事的情节与春申君与女环的故事如同一个刻板印出的文章,情节大类小说。春申君与女环的故事大致梗概是这样的:赵国有个人叫李园,他想把自己的妹妹环献给楚王,但是听说楚王不能生育,惟恐妹妹进宫由于没有子嗣而得宠爱不长久。于是他跟妹妹商量,先将她献给春申君,等到怀孕的时候再献给楚王。事情果真如愿,春申君果真使李园的妹妹怀上了孩子。事情至此也就到了关键时刻,这时李园的妹妹引诱春申君说:“今妾自知有身矣,而旁人莫知。妾之幸君未久,诚以君之重而进妾于楚王,王必幸妾。妾赖天而有男,则是君之子为王也,楚国封尽可得,孰与其临不测之罪乎?”春申君被说服,遂将女环献于楚王,生了个儿子,即后来的楚幽王。这段故事与吕不韦与赵姬的故事如此之相似,郭老据其推断,吕不韦与赵姬的故事可能流行于西汉初年吕后执政时期,是吕氏集团成员仿春申君与女环的故事编造的,目的是为吕氏称制制造舆论。其三,《史记?吕不韦传》记载秦始皇的母亲是邯郸的歌姬,但是记载子楚回到秦国时候又说:“子楚夫人,赵豪家女也”,歌姬和豪家女,这二者之间的差距实在是太大,难于自圆其说。
但《史记》的历史地位还是让许多学者不肯轻易怀疑它记载事件的真实性,他们认为,明清学者以及郭沫若先生的论断都只是对于史实的一种臆测,论据不足。司马迁的记述虽然有矛盾之处,但他的著书风格一向以严谨、直笔而不是猎奇而著称,所以他对于吕不韦和赵姬不可能是空穴来风。当代有的学者就对郭沫若的三点质疑,作了针峰相对的批评,认为:第一,《史记》的记载有不少是《战国策》没有载过的,这正是《史记》流传千古,受人称颂的原因之一。没有旁证,照样能保持《史记》的真实性。例如,司马迁的《史记》详细的描述了夏朝的世系,然而司马迁距商代已有千年之遥,以后也基本没有实证。所以二十世纪之前许多学者尤其是西方学者对夏代的有无产生怀疑,但是二十世纪初发现的殷墟甲骨文献,却雄辨地证明了司马迁记录的高度准确性。第二,吕不韦与赵姬的故事跟春申君与女环的故事类似,只能说明这种斗争手段,在当时是被不少政治上的风云人物所运用;第三,关于《史记》记载矛盾的地方,其实并不矛盾,二者还是有相通之处。假如子楚果真看上了吕不韦的小妾,这无疑给吕不韦提供了另外一个机会,因为一旦子楚回国即位,他和歌姬肚子里的孩子就有可能成为皇帝,这一想法符合吕不韦的野心。吕不韦是一个冷静的人,他善于处理各方面关系,也知道如何利用这种关系。他能想到异人看上了歌姬,也就想到歌姬肚子里的孩子能够有承国的希望。所以他会尽一切能力掩饰歌姬的真实身份,为歌姬营造一个良好的家庭背景,所以出现《史记》记载的那样“赵豪家女也”。另外,根据常理分析,当时的子楚作为一名王孙,娶妻纳妾总要有一定的排场的,否则又怎能名誉盛于诸侯?这也会要求歌姬有一定背景,所以就出现了称谓前后矛盾的地方。
另外,不论《史记》也好,《战国策》也好都记载了秦王政当上皇帝之后,吕不韦与太后私通。如果吕不韦以前和太后没有任何关系的话,吕不韦必然会爱惜自己的政治生命,不会去和太后私通。只有吕不韦有所依仗(包括吕不韦认为秦王政就是自己儿子),或者和太后早有私通,才会冒险与太后私通的,否则,一个后庭美女如云的丞相,如不是有什么隐情,冒着生命危险与太后私通,让人难以理解。
转眼间,两千多年过去了,有关秦始皇身世的争论仍未取得一致看法。但不论赵姬是否是有娠而嫁,还是嬴政真为皇室血脉,这些诌议均无法掩映他在中国历史上的重要地位及作用。也许正是由于秦始皇的雄才大略和扑朔迷离的身世,才使得许多电视剧一部一部的“戏说”下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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