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이세민은 당의 2대 황제로 뛰어난 정치가이자 병법가였다. 재위 기간중 그의 치세를 역사에서는 '정관의 치'라고 추앙하며, 그를 천고일제(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라고 부른다. 그에 관한 역사 기록은 겨우 3백 자 정도로 치적과 과실에 치중되어 있다. 당서에는 이세민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연의 둘째 아들이 머지않아 태어나려 할 즈음이었다. 길을 가다 이연은 관상을 보는 한 서생과 마주치게 되는데 서생은 깜짝 놀라며 '귀인이시군요. 아드님 역시 귀하게 되시어 '제세안민(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중임을 맡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더럭 겁이 난 이연은 그를 죽이려 했으나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둘째 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이연은 '제세안민'이라는 뜻으로 '세민'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분명 '제세안민'의 중책을 감당해 낸 일대의 명군이요, 현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혈통에 관한 수수께끼는 간략한 정사의 기록 속에 영원히 파묻히고 말았다. 한 고고학자는 '보련도'에 남아 있는 당 태종 이세민의 가장 이른 시기의 화상을 근거로 일대의 영명한 군주 이세민이 선비족의 후예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말은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세민은 선비족일까?
당 태종 이세민의 일생을 들여다 보면 혈통에 관한 적잖은 의문이 생긴다. 이세민 일가의 원적지는 지금의 하북성 조현이다. 그런데 이연은 관농(산시와 간쑤성 동부 일대)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도 조상 때부터 관농에 살았으며 서량왕 이호의 후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본래 서위이전 산동 지역의 이씨는 명문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왕, 노, 최, 이, 정이라는 5대 명문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씨는 선비족의 대성이었다. 서위는 우문태가 관중을 근거지로 나라를 세우고 난 뒤에도 이씨는 명문으로 규정되었다. 이를 근거로 이씨 일문을 몰락한 귀족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비족 대야부의 성씨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당대에는 소수민족과 한족의 구분이 모호한 편이었고 당대 이전에는 북방의 여러 민족 간에 대융합이 이루어진 바 있다. 예컨데 수 양제 때에 돌궐인들은 한족의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고 북위의 효문제는 민족간의 우호적인 교류를 촉진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같은 신분이라면 통혼도 허락했다. 그 결과 일부 황실뿐만 아니라 대신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이들이 소수민족에 속하는 기이한 현상이 야기되었다. 그러므로 이세민은 선비족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 이연 집안의 이전 내력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이 없다. 둘째 이연은 서량왕 이호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지만 이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분을 과장하기 위해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고증 가능한 역사 자료에 따르면 당 태종 이세민의 조모 즉 당 고종 이연의 어머니 독고씨는 수 문제의 후비와 자매간으로 한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세민과 수 양제는 이종 사촌간이 되는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어머니 두씨도 선비족이었다. 그러나 이연의 부계 혈통에 관해서는 논증할 만한 역사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대야부 성을 하사받았는 설, 하남성의 몰락한 이씨라는 설, 노자 이이의 후손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이세민이 오랑캐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은 한족이라는 설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설은 당 태종 이세민이 여러 민족의 혼혈로 민족 대융합의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다. 그러나 더 이상의 연구는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당 태종 잇민이 일대의 명군으로 제왕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그의 혈통을 되도록이면 애매하게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많은 학자들은 당 태종 이세민의 혈통 문제를 고증하는 데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세민이 선비족 후손이라는 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측천을 후궁으로 삼은 것은 당조의 오랑케 풍속을 증명하는 것이다. 당나라 사람들은 비대하고 풍만한 여성을 좋아했다. 양귀비에 관한 전설이나 잠화사녀도 등은 당나라 사람들의 이러한 심미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 것은 당의 민족 융합과 관련된 것으로 소수민족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오랑캐의 풍속 중에는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서모를 취하는 습속이 있었다. 그뿐 만 아니라 한 집안의 남자들이 처 하나를 공유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국의 땅으로 시집간 왕소군은 남편이 죽자 본처가 낳은 두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당조 제왕의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일은 간혹 벌어지고 있었다. 당 태종 이세민과 무측천 그리고 당 고종 이치간의 관계도 거의 난륜에 가까웠다. 당 태종 이세민은 무측천이 묘령의 나이였을 때 입궁시켜 재인으로 삼았다. 당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종이 즉위한 후 다시 입궁해 소의로 제수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당대 초기의 원로 대신인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배염, 정무정 등은 당 고종 이치에게 무측천이 선제를 모신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며 극간했지만 당 고종 이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양귀비의 일도 역사상의 예로 들 수 있다. 양귀비는 본래 당 현종의 아들 수왕의 부인이었지만 시아버지인 당 현종의 첩이 된다. 당대 대신들의 멸시를 받았던 이러한 관계들이 이씨 집안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오랑캐의 피 탓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당대의 이러한 풍속과 오랑캐의 혈통 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보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은 똑같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게다가 무씨가 14세에 입궁할 때에 이세민은 이미 50여 세의 노인이었기에 머지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치도 서모를 취하는 일이 불명예스럽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의지가 부족한 데다 미색의 유혹에 빠져 부도덕하는 것을 알면서도 행했을 것이니 억지스레 오랑캐의 혈통과 결부시킬 수만은 없다. 역대 왕조에서 난륜은 비도덕적인 행위로 당대의 사회가 이러한 도덕관에 찬동했을 리 없다. 오히려 개인의 도덕이나 의지와 관련된 부덕의 소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종합하면서 이씨 일가를 오랑캐 습속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족의 후예라고 보았다. 위진 시대에 한족은 장기간 오랑케와 잡거하면서 여러 면에서 오랑케의 풍속에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당나라 여인들의 옷차림이나 축국, 기마, 사냥 등의 생활을 통해 볼 때, 당시의 여성들은 이후의 여성들이 누리지 못했던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각 민족이 이미 상당한 정도로 융합되어 있는 개방되고 번영한 당나라에서 이러한 난륜 문제를 큰 문제로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당 태종의 성격을 통해 그의 혈통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세민은 흉악하고 잔인하며 야심만만한 성격으로 당나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정관 연간에 당 태종은 동돌궐을 평정하고 힐리칸을 포로로 잡아 북방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5년 후에는 토곡혼을 평정하고 칸인 모용복윤을 포로로 잡았으며 정관 14년엔느 고창국을 평정하고 그곳에 서주를 두었다. 그리고 교하성(지금의 투루판 서쪽)에는 안서도호부를 설치했다. 만년에도 당 태종은 전의를 불태우며 친히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당 태종은 평생 지칠줄 모르며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런 것들이 모두 그의 혈통을 의심하게 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생애에서 최대의 정치적 풍파라면 단연 '현무문의 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진왕에 책봉된 이세민은 태자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에 비해 두드러진 전공을 세웠다. 건성과 원길은 이세민을 질투하여 한편이 되어 곤명호 부근에서 이세민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민다. 이 일을 알아차린 이세민은 가만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기에 당 고조 무덕 9년 6월 4일 새벽 장안궁의 북문인 현무문에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활로 쏴 죽였다. 사흘 뒤 당 고조 이연은 진왕 이세민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라고 2개월이 지난 뒤 이세민은 이연을 태상황으로 물러앉히고 송덕전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 시기 흉악하고 잔인하며 야심 가득한 성정을 드러냈던 이세민은 '정관의 치'의 이세민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인 것 같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세민이 오랑캐라는 근거로 현무문의 변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자고로 황실 안의 권력투쟁은 잔혹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혈통과 관련지어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것은 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세에 끼친 영향을 따져봐도 이세민이 형을 대신해 황제가 된 것이 당조의 번영뿐 아니라 후대 중국의 번영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세민은 이씨 집안의 세 형제중에 가장 출중한 인물이었다. 상황을 파악해 현무문 정변을 일으킨 점은 그가 진정한 정치가라는 것을 반영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역사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분석했다. 공자가 춘추를 쓸 당시에도 황실안 권련투쟁이 잦았으며 서한과 동한 그리고 위진 남북조 시대의 기록에도 부친을 시해하고 형을 죽인 사건이 여럿 실려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이세민이 오랑캐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얘기다.
셋째 이세민의 무덤인 당소릉의 독특한 고분 양식은 돌궐의 습속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소릉은 내성과 외성이 있다고 한다. 외성의 유적은 현재 고증하기가 어려운 데 문 안의 헌전에는 이세민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현무문 또는 사마문이라고도 부르는 북문에는 원래 14개국 번왕(조공한 나라의 왕들)의 석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릉육준의 부조는 서안의 비림 박물관 석각예술실에 전시되어 있다. 소릉육준은 이세민이 남긴 또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중국 황제의 무덤 가운데 왜 이세민의 소릉 안에만 군마의 석각이 있는 것 일까? 소릉의 독특한 고분 양식은 정말로 돌궐의 습속에 따른 것일까?
돌궐문제 연구 논문집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돌궐 사람들에게 말은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평상 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전시에는 전쟁터를 누비면서 그들은 말과 함께했다. 돌궐에는 죽은 자들의 무덤 주위를 돌고 난 후에 말을 죽여 버리거나 무덤에 생매장시켰던 것이다. 돌궐의 귀족이든 유목생활을 했던 일반인이든 죽은 다음에 말과 함께 묻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단지 그 수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세민의 무덤인 소릉은 지금까지 발굴된 적도 도굴된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어떤 부장품이 들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추축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는 이세민이 잠들어 있는 소릉안에서 가장 확실한 해답을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李世民是鲜卑人还是汉人
唐太宗李世民(598~649),唐朝第二个皇帝,杰出政治家、军事家。他在位期间出现了历史上称道的“贞观之治”,被称为“千古一帝”。史书对李世民的记载,寥寥300字,功过论断,兼而有之。《唐书》记载了一个关于李世民命名的有趣故事:李渊二子即将诞生之时,李渊路遇一书生为其看相,书生惊呼:“李渊贵人也,其子也贵,有济世安民之大任。”李渊惧,欲杀此人,书生却不见了。归家,二子诞,故起名“世民”,取济世安民之意。唐太宗李世民的确胜任了“济世安民”的重任,堪称一代明君贤主。然而他的身世之谜却永远被湮没在简略的正史记载之中。有考古学家根据《步辇图》留下来唐太宗李世民的最早画像推测,一代英明的君主李世民,是鲜卑人的后裔。此言一出,立刻引起人们的议论,李世民是鲜卑人么?
唐太宗李世民的一生,关于他身世的疑点很多。李世民一家祖籍在今河北省赵县,而李渊生于关陇,自称祖居关陇,是西凉王李皓的后代,借以提高自己的身份地位。其中,在历史上还有这一段插曲,本来西魏以前以山东地区的李姓一门为望族,这一地区有五大望族姓氏--王、卢、崔、李、郑,其中李姓又是鲜卑族中的一大姓氏。而自西魏宇文泰以关中为根据地建国,由此就硬性规定了关陇李姓为望族。有人据此认为李氏一门是破落贵族,还有人说李氏是鲜卑族大野部的姓氏。
唐朝时候少数民族与汉族的界线划分不严格,唐朝之前,北方各民族大融合现象广泛存在,如在隋炀帝时,突厥人就曾强制改穿汉装,北魏孝文帝推行民族之间友好往来的政策,同一个等级的人可以被允许通婚。所以造成了有皇室是少数民族的情况,大臣中也有许多是少数民族。李世民是鲜卑族的后裔,这也是有可能的。然而这里边有几个疑点:一是李渊一门在此之前到底如何,无法从历史上考究得知;二是李渊自称为西凉王李皓后代,到底是事实如此还是自抬身价?
根据可考证的历史资料证明,唐太宗李世民的祖母、即唐高宗李渊的母亲独孤氏,是隋文帝的一名后妃的姐妹,属于非汉族,所以李世民和隋炀帝之间还有着姨表关系。唐太宗李世民的母亲窦氏也是鲜卑族人。而李渊一方的血统还没有足够的历史证据进行论证。历史上有以下几种说法:赐姓大野部、河南破落李姓、老子李耳的后代等。其中最有可能性的说法是李世民是受胡人影响比较深的汉族人。现在一般的习惯说法是,唐太宗李世民是各民族的混血儿,民族大融合的产物。然而在进一步的研究却步履维艰,主要是由于唐太宗李世民乃一代明君,可以称为帝王的模楷,后世人们想尽可能模糊其民族的概念。因此许多学者对考证唐太宗李世民身世问题并不积极。但是也取得了一定的成绩,认为李世民为鲜卑族后裔的观点主要有以下论据:
第一,立武则天为后印证了唐朝的胡俗。唐朝人对肥硕丰腴的女子情有独钟。像杨贵妃的传说、《唐代仕女图》的记载,都证明了唐人有这方面的审美倾向。这与唐的民族融合大有关系,带有明显的少数民族趋向。在胡人的风俗中有父死子娶母为妻的习俗,也有一家的男人共用一妻的故事。在昭君出塞的故事里,王昭君在死了丈夫后就嫁给了自己的两个儿子。而在唐朝帝王史中,也有一些类似的关系尴尬的角色。唐太宗李世民、武则天与唐高宗李治之间的关系近乎乱伦。唐太宗李世民在武氏则天正值其雏女妙龄之际,召其入宫为才人。他死之后,武则天入感业寺做了尼姑。唐高宗即位后,“复召武氏入宫,拜昭仪,进号宸妃”。几年后,竟做了唐高宗李治的皇后。期间,唐初的元老重臣如长孙无忌,褚遂良、于志宁、裴炎及程务挺等人曾力谏唐高宗李治,武则天“曾侍先帝,众所共知”,但是唐高宗李治根本没有在意。历史上杨贵妃也是一例。杨贵妃本是唐玄宗之子寿王的妻子,却被身为公公的唐玄宗讨来做了妃子。这些为李唐王朝大臣们所不齿的关系是不是李氏家族身体里流淌的胡人的血液在作怪呢?然而有的学者认为唐朝的这种风俗与胡人血统毫无关系。他们认为人性古今都是相同的。并且,在武氏14岁入宫后唐太宗李世民都已经是50多岁的老人了,而且行将就木,唐高宗李治自身也应该明白娶母本身就是一件不光彩的事情,但他可能因为意志薄弱受了武则天的摆布,也可能是受了美色的诱惑,最终知其不道德而为之,这不能牵强的和胡人的血统联系起来。历朝历代中,乱伦都是一种反道德的行为,决不会为社会所尊奉,决不是唐朝社会赞同这种道德观念,而是这跟个人的道德和意志有关系,是一种个人缺失了德行的表现。还有的学者综合了这两种对立的观点:认为李氏一家是深受胡人习俗影响的汉人后裔,由于在魏晋时期长期与胡人混住,从各方面都沾染了大量的胡人风俗;而且从唐朝女子的穿着以及蹴鞠、骑马打猎的生活来看,当时女性享受了以后历代女子不曾享受的解放;所以对于开放、繁荣、各民族已有了相当程度融合的大唐朝而言,这种乱伦关系不应该算大问题。
第二,从唐太宗的性格来判断他的血统。李世民性格凶残、野心勃勃,为李唐打下天下的战功赫赫,贞观年间,唐太宗平定东突阙,俘虏颉利可汗,解除了北边的威胁;5年后,平定吐谷浑,俘其王慕容伏允;贞观14年,有平定高昌氏,于其弟置西州,并在交河城(今新疆吐鲁番西)置安西都护府。晚年时,唐太宗战志尤存,亲征高句丽。唐太宗善骑射,一生过着不倦的戎马生涯。这些都可以作为质疑他的血统问题的证据。在他的一生中,最大的政治风波莫过于使他得以登上王位的“玄武门之变”。当时,被封为秦王的李世民军功甚多,超过了太子李建成和其弟李元吉。他们早就心怀嫉妒,结成同伙。定下阴谋,决定在昆明湖畔杀死李世民。李世民对此早有觉察,自然也不会坐以待毙,于是于唐高祖武德九年6月4日黎明,在长安宫的北门玄武门布下了伏兵,射死兄弟李建成、李元吉。3天后,唐高祖李渊便册立秦王世民为太子。再过两个月,李世民逼使李渊退居太上皇,自己在颂德殿即帝位。这一段历史为我们揭示出了一个性格凶残、充满野心的唐太宗李世民,与“贞观之治”中的李世民判若两人。然而有学者中对将“玄武门之变”作为唐太宗李世民是胡人的依据持不同的态度。他们认为:自古宫廷皇室的权利之争都是很残酷的,这和他的血统没有什么必然的联系。唐太宗李世民发动玄武门之变也是形势所迫,身不由己。并且从对后世的影响来看,李世民取代其兄当上皇帝,对唐朝的繁荣和后世中国的繁荣都是有积极推动意义的。李世民是在李家三兄弟中是最具实力的一位,他审时度势,发动玄武门之变,这恰好反映了他是一个真实的政治家。也有的学者从历史学的角度分析了这个问题:孔子写《春秋》时,皇室内部争权夺势的事件就屡有发生,两汉、魏晋南北朝的杀父弑兄的事件都有记载,因此这还不能作为佐证李世民是胡人的证据存在。
第三,李世民的唐昭陵独特的墓葬显示了突阙习俗。史书中关于昭陵记载,昭陵为唐太宗李世民的坟墓,有内外两城。外城遗址已难以考证,门内当年建有献殿,存放李世民生前服用器物。北门称为玄武门,又称司马门。原有14个“蕃酉”的石雕像现在已不知何处,石雕像到底有些什么来历?现在已是无人知晓。但是驰名中外的“昭陵六骏”浮雕还保存在西安碑林博物馆石刻艺术陈列室里。
“昭陵六骏”的确是李世民留下的有一个疑点:中国所有帝陵中,为什么只有李世民的昭陵里有战马石刻?唐太宗独特的墓葬形式是否真的显示了突阙的习俗?根据《突阙问题研究论文集》上面记载:马是突阙人不可离开的伴侣,平时生活游牧,战时驰骋沙场。在突阙的葬俗中,有一种奇特的祭祀悼念马功劳的习俗,一般有三种仪式。主人死后,随从会骑着马绕着死者墓地转圈,然后把马杀掉或者活埋到坟墓里。无论是突阙贵族,还是一般牧民,死后都要与马共葬,只是数量多少不同。然而李世民的坟墓昭陵至今未被打开,据称也未被盗过,所以里面的陪葬物品到底是些什么现在只是猜测,或许若干年以后,我们可以从昭陵里睡着的李世民自己那里得到最真实的答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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