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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의 비밀_이태백은 술에 취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백의 자는 태백이고 호는 청련거사다. 원적은 농서 성기인데 수나라 말기에 선대가 서역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면주 창륭으로 이사했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자유로이 유람하면서 보냈다. 천보 원년(742년)에는 도사 오균의 천거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가서 한림공봉이 되었고, 문학적 재능으로 한때 이름을 드날리며 현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권세있는 자들과의 갈등으로 장안에서 고작 3년을 보낸 뒤 관직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그 다음 해, 어지러운 시국에 분개한 그는 영왕 이린의 막료로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왕과 숙종간에 황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영왕의 군대가 패하면서 이백도 연류되어 야랑(지금의 귀주)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으나 도중에 사면된다. 만년에는 동남부 일대를 떠돌다 당도의 현령 이양빙에게 몸을 의탁한 후에 이내 세상을 떠난다.

이백의 시는 서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굴원이후 최초로 당시의 민간 문학과 진, 한, 위 이래의 악부민가에서 풍부한 영양을 흡수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한 시인으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고 예술적 힘이 충만했다. 그의 모든 시는 놀랄 만 했고 즐거움과 감동을 주면서 깊은 꺠달음을 주는 동시에 뛰어난 글재주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두보는 '붓을 대면 비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를 지으면 귀신을 흐느끼게 한다"고 평한 적이 있다. 굴원이후 중국의 가장 걸출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은 두보와 함께 이두로 병칭되기도 한다. 한유 역시 "이백과 두보의 문장은 눈부신 빛이 만장이나 뻗친 듯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재능이 뛰어난 저명시인의 사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백은 병사했다. 이백의 집안 아저씨인 이양빙은 '초당집서'에 이렇게 적었다. '이양빙이 당도에서 음악과 경서 등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보고자 하였지만 마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공은 나를 멀리하거나 저버리는 일이 없어서, 우리는 시간을 내어 작은 배를 타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마침 관직을 내놓으려 할 때에 공의 병이 다시 위중해졌다. 당시 공의 시문 원고가 만권이나 남아 있었지만 친히 문집 정리를 마칠 수가 없었다. 병석에서 나에게 정리되지 못한 원고를 책으로 편집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문집의 서문을 지으라고 하셨다.' 당나라 시대의 이화는 '고한림학사이군모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숙의 동남쪽, 청산의 북쪽에 당나라의 고사 이백의 묘가 있다... 62세에 임종가를 짓고 죽었다.' 이백이 죽고난 29년 뒤 당덕종 정원6년(791년)에 유전백이 지은 '당고한림학사이군갈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의 이름은 백이다. 천보 연간 초기에 집으로 돌아가라는 어명을 받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공교롭게도 이 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여기에 묻혔다. 어릴 때 시로 그 분의 관심을 끌었던 전백이 이 곳에 와서 제사를 올리는데. 쓰러질 듯한 황량한 무덤을 바라보며 그 분의 목소리와 모습을 회상하자니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다' 이백이 죽은 지 1백여 년이 지난 뒤 저명한 학자 피일휴는 '칠애사'에 '마침내 부협질에 걸려 술에 취한 혼백이 팔극으로 돌아갔다'라고 적었다. '병이 위중했다.', "임종가를 짓고 죽었다', '병으로 죽었다'는 고대 문헌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이백이 병으로 죽었노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곽말약은 문현에 기록되어 있는 '부협질'이라는 말에 착안해 의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 추론하였다. 이백은 61세에 금릉을 유람했고 선성과 역양 두 군을 오갔다. 이광필이 임회에서 진을 치자 이백은 종군을 결심하지만 안타깝게도 금릉에서 병이 나 도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부협질 초기로 아마도 농흉증을 부협질이라고 했던 것 같다. 1년 후 이백은 당도에서 요양했지만 농흉증이 만성화되어 흉벽에 구멍이 생기는 바람에 결국에는 당도에서 죽고 말았다.

이백이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술에 취해 익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이양빙, 유전백, 범전정은 이곳에서 죽었다고 기록에 남겼지만 모두 어떤 병에 걸렸다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피일휴의 '칠애시'에서 갑자기 부협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백 자신도 말한 적이 없고, 그를 위해 집서와 묘비를 지은 사람도 언급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피일휴는 이백이 죽은 지 1백년 후에 살았던 인물인데 이백이 부협질로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므로 곽말약이 이를 근거로 이백의 사인을 추측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백은 평생 술을 즐기며 그 것에 찌들어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취선옹'이라는 칭호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백의 시를 음미하다 보면 술 냄새가 진동한다. 시인은 '장진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양을 삶고 소를 잡아 즐겨보세. 한 번 마시면 의당 삼백 잔은 들어야지', '서증강양재육조'에서는 '크게 웃는 것은 한 번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평생 즐거움을 찾아보세나'라고 한다. '증유도사'에서는 '고상한 담론으로 자리를 놀라게 하고 하루 저녁에 술 천 잔을 마시네'라는 시구가 있고, '훈잠순견심위춴단구대주상대이시견초'에는 '활짝 웃고 좋은 술 따라 마시니 즐거움이 극에 달해 문득 취하게 되는구나' 는 시구가 있으며. '월하독작' 제4수에는 '취한 후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어느덧 나홀로 잠들어 버리면, 내 몸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니, 이게 바로 최고의 즐거움이야'라고 했다. 이백의 죽음이 술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오대의 왕정보는 '당척언'에 이렇게 기록했다. '궁금호를 입고 채석강에서 노닐면서 뽐내고 우쭐거리며 방약무인했는데, 취중에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다 그만 죽고 말았다' 여기서는 이백이 술에 취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사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문인들의 시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설이다.

북송 초기 매요신의 '채석월하증공보'라는 시에서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취중에 강바닥에 걸린 달을 사랑하여 손으로 그 달을 만지려다 제 몸 빠뜨리고 말았네' 술에 취해 배 위에서 강에 떠있는 휘영청 밝은 달 그림자를 보고 강물에 손을 넣어 그림자를 희롱하다가 그만 몸이 뒤집혀 물에 빠져 익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대의 대문호 소동파는 이 일을 어떻게 보았을까? 송대의 진선은 '문슬신하'에 이렇게 기록했다. '소동파는 또한 중반곡이라는 시에서 "어느 날 바다에 뛰어들어 이백을 찾았으나 세상의 화묵 신선은 찾아볼 수 없구나." 라고 읊었다.' 소동파 역시 이백이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보았는 걸 알 수 있다. 원대의 학자 신문방은 '당재자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백은 만년에 황노를 좋아했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즐기던 중 술기운에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애초 이백은 사조의 고가 근처 청산을 좋아했기에 이장해서 지금은 무덤이 그곳에 있다.'

남송의 축목은 '방여승람'에서 이백이 병사했다는 것과 익사했다는 두 설을 연구한 뒤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달을 잡으려 했다는 설에 대해 언급하자면 옛날에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조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인들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공연히 지어낸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백은 이 사람들이 기록한 것처럼 익사했을까? 만약 익사를 했다면 당대의 사람들은 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근대의 학자 곽계굉은 이백이 익사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이백의 죽음에 관한 고증'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봉건시대에 익사는 '횡사', 즉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의미했다. 고례에 의하면 불길한 일에 속해 친척이나 친구들은 글을 쓸 때 주저하면서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유전백은 이백이 죽은 지 20여 년 후에 '당고한림학사이군갈기'를 썻다. 당시 이백의 아들 백금이 여전히 당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유전백은 백금과 자손들의 앞길을 가로막을까 두려워 조심스럽게'병으로 죽었다'고 쓴 것이고, 그외의 사람들도 이런 이유로 말을 얼버무렸을 것이다.

학자 안기의 관점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는 '종횡무진 이백을 탐구하다'에서 이백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패관 애사는 전혀 믿을 만한게 못되는 것일까? 당시 거의 실성에 가까운 이백의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그런 상황(익사)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이백이 임종할 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밤이 깊었다. 사람은 이미 취했고, 노래는 이미 끝났고, 눈물도 다 말라 버렸다. 이백의 생명도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달은 중천에 솟아 있었고 물결은 일지 않았다. 강에 비친 달은 백옥의 쟁반같았는데 한바탕 미풍이 지난 간 곳에는 은빛이 흩어졌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눈부시고, 얼마나 매력적인가!...취해서 뱃전에 기대어 있던 이백은 두 손을 뻗어 은색의 찬란한 빛을 향해 달려들었다. ....뱃사공이 정신이 얼떨떨해 쳐다보니 방금 그에게 술 석 잔을 권했던 이태백이 고래등 위에 앉아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 멀리 사라져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안기가 묘사한 것처럼 전설에서는 이백이 익사했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고래를 타고 승천했다'고 말하고 있다. 고래를 탓다는 설은 만당시기의 시인 관휴가 쓴 '관이한림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두공부가 고래를 탔다고 한 말은 그릇된 게 아니다.' 북송시대에 들어서면 문인들은 고래를 탄 것과 달을 잡은 것을 결합시켜 노래하고 있다. 예컨대 매요신은 '채석월증곽공보'에 이렇게 적었다. '굶주린 교룡에게 갑자기 먹혔을 리 없으니 아마도 고래 타고 푸른 하늘에 올라갔으리' 곽상정은'채석도'에서 '고래를 타고 달을 잡으로 간 이는 돌아오지 않고 푸른 풀의 한림묘만 덩그러니 남아있구나'라고 했고, 금대의 이준민은 '이태백도'에서 '무릇 몇 년을 인간세상에 유배된 신선은 시인중에 호걸 주중선이라오. 채석강 위에 뜬 달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고래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있었으리오'라고 했다. 당연히 이 것은 문인들의 아름다운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믿을 필요는 없다.

이백이 익사하리라는 걸 두보는 어렴풋이 예감했던 것 같다. 그는 사흘 밤을 내리 이백의 꿈을 꾸고 나서 '몽이백' 두 수를 지어 자신의 걱정을 되풀이해 말했다. '강호엔 모진 풍파 잦으니, 배젖는 노 떨어뜨릴까 두렵다 하네.' '물은 깊고 파도 높으니, 교룡에게 해 당하지 않게 하소서.' 두보는 이백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만년에 병이 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취하거나 병이 날 것을 걱정한 게 아니라 그저 배의 노를 떨어뜨릴까 걱정했던 것이다. 전혀 근거없는 걱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두보가 이백과 왕래하던 중에 얻은 경험의 소산이라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백이 병사했는지, 익사했는지 확증할 방법이 없기에 그의 사인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李白死因迷案



  李白,字太白,号青莲居士。祖籍陇西成纪(今甘肃天水附近),先世于隋末流徙西域,李白即生于中亚碎叶。(今巴尔喀什湖南面的楚河流域,唐时属安西都户府管辖)。幼时随父迁居绵州昌隆(今四川江油)青莲乡。

  他的一生,绝大部分在漫游中度过。天宝元年(前742年),因道士吴筠的推荐,被召至长安,供奉翰林。文章风采,名动一时,颇为玄宗所赏识。后因不能见容于权贵,在京仅三年,就弃官而去,仍然继续他那飘荡四方的流浪生活。安史之乱发生的第二年,他感愤时艰,曾参加了永王李璘的幕府。不幸的是,永王与肃宗发生了争夺帝位的斗争,兵败之后,李白受牵累,流放夜郎(今贵州境内),途中遇赦。晚年漂泊东南一带,依附当涂县令李阳冰,不久即去世。

  李白的诗以抒情为主。屈原而后,他第一个真正能够广泛地从当时的民间文艺和秦、汉、魏以来的乐府民歌吸取其丰富营养,集中提高而形成他的独特风貌。他具有超异寻常的艺术天才和磅礴雄伟的艺术力量。一切可惊可喜、令人兴奋、发人深思的现像,无不尽归笔底。杜甫有“笔落惊风雨,诗成泣鬼神”之评,李白是屈原之后我国最为杰出的浪漫主义诗人,有“诗仙”之称。与杜甫齐名,世称“李杜”,韩愈也说:“李杜文章在,光焰万丈长”。然而,这样一位才华横溢的著名诗人在死因上后人却存在着争议。

  一种观点认为,李白是病死的。李白族叔、当涂令李阳冰在他的文集《草堂集序》中写道:“阳冰试弦歌于当涂,心非所好。公暇不弃我,乘扁舟而相顾,临当挂冠,公又疾亟,草稿万卷,手集未修,枕上授简,俾予为序。”唐代李华《故翰林学土李君墓志序》云:“姑熟东南,青山北址,有唐高士李白之墓……(李白〕年六十二,不偶,赋临终歌而卒。”李白死后二十九年,刘全白在唐德宗贞元六年(791)作《唐故翰林学士李君碣记》也说:“君名白,天宝初诏令归山,偶游至此,以疾终,因葬于此。全白幼则以诗为君所知,及此投吊,荒墓将毁,追想音容,悲不能止。” 李白死后一百多年,著名的学者皮日休在《七爱诗》中也曾说过“竟遭腐胁疾,醉魄归八极。”古代文献所谓“疾亟”、“赋临终歌而卒”、“以疾终”,都明白地告诉人们,李白是病卒的。

  现世学者郭沫若从文献记载的“腐胁疾”得到启发,从医学角度进行研究推测,认为李白六十一岁曾游金陵,往来于宣城、历阳二郡间。李光弼东镇临淮,李白决计从军,可惜行至金陵发病,半途而归。此为“腐胁疾”之初期,当是脓胸症。一年后,李白在当涂养病,脓胸症慢性化,向胸壁穿孔,由“腐胁疾”致命,最终死于当涂。但是,这也仅仅是推测而已。

  但是,另一种观点认为,李白不是病死,而是醉酒后溺死。李阳冰《草堂集序》说“疾亟”,刘全白《李君碣记》说“疾终”,范传正《李公新墓碑序》说“卒于此”,都不说得的什么病;到了皮日休《七爱诗》中才突然冒出个“腐胁疾”,李白自己也从未提起,为他撰集序与撰墓碑者也从未言及,皮日休生活的年代离李白死去已有一百多年,他从何得知李白是死于“腐胁疾”呢?郭沫若据此推断李白的死因是不妥当的。

  李白一生嗜酒成性是出名的,因有“醉仙”之称。玩读李白诗作,就能闻到一股浓浓的酒味。诗人的《将进酒》有“烹羊宰牛且为乐,会须一饮三百杯”。《叙赠江阳宰陆调》有“大笑同一醉,取乐平生年”。《赠刘都史》有“高谈满四座,一日倾千觞”。《训岑勋见寻就元丹邱对酒相待以诗见招》有“开颜酌美酒,乐极忽成醉”。《月下独酌四》之三有“醉后失天地,兀然就孤枕,不知有吾身,此乐最为甚”。李白的死会不会与他喝酒有关呢?

  五代时期王定保在《唐摭言》中记载:“(李白)著宫锦袍游采石江中,傲然自得,旁若无人,因醉入水捉月而死。”这种说法认为李白是醉酒溺死的,此说正史虽然没有记载,但屡见于文人歌咏。

  北宋初期梅尧臣《采石月下赠功甫》一诗说得最为明白:“醉中爱月江底悬,以手弄月身翻然。”醉中在船上爱江中皎洁月影,以手于江水中戏弄月影而翻身落水溺死。这不是比兴,而是实写。那么,宋代大文豪苏东坡持何看法呢?宋朝陈善《扪虱新话》记道:“坡(苏东坡)又尝赠潘谷诗云:‘一朝人海寻李白,空看人间画墨仙。’”可见,他也认为李白是醉入水中溺死。元朝时候的学者辛文房在《唐才子传》中说:“(李)白晚节好黄老,度牛渚矶,乘酒捉月,沉水中,初悦谢家青山,今墓在焉。”元代祝成辑《莲堂诗话》也说:“宋胡璞,闽中剑南人,曾经采石渡题诗吊李白:‘抗议金銮反见仇,一坏蝉蜕此江头,当时醉寻波间月,今作寒光万里流。’苏轼见之,疑唐人所作,叹赏不置。”

  南宋祝穆《方舆胜览》卷十五《太平州?祠墓》在研究了李白病死与溺死的两种说法后提出疑问:“而捉月之说,岂古不吊溺,故史氏为白讳耶?抑小说多妄而诗老好奇,姑以发新意耶?”那么,李白可能不可能像这些人记载的那样是溺死呢?假若是溺死,为何时人并不加以记载?

  近代学者郭启宏力主李白是溺死的,他在《李白之死的考证》一文中写道:“溺死在封建时代被认为‘横死’非‘善终’,依古礼属不祥,亲友不能吊唁,还有碍子孙前程,为了掩饰真相,往往当作病故。于是,既顾及忌讳又不甘造假的亲友提笔行文之际未免踌躇,不得已而闪烁其辞。”刘全白于李白死后二十多年撰写《碣记》,当时,李白的儿子伯禽仍然在当涂,于是刘全白恐有碍伯禽及子孙前程,为他避讳而写作“疾终”。其他的人也因为这个原因闪烁其辞。

  学者安旗的观点与之相同,他在《李白纵横探》“李白之死”一节中写道:“稗官野史就完全不足凭信吗?从李白当时近乎疯狂的精神状态来看,这种情况(指溺死)是可能的”。在他的著作中,他还描绘了李白临终的情景:“夜,已深了;人,已醉了;歌,已终了;泪,已尽了;李白的生命也到了最后一刻了。此时,夜月中天,水波不兴,月亮映在江中,好像一轮白玉盘,一阵微风过处,又散作万点银光。多么美丽!多么光明!多么诱人!……醉倚在船舷上的李白,伸出了他的双手,向着一片银色的光辉扑去……船夫恍惚看见,刚才还邀他喝过三杯的李先生,跨在一条鲸鱼背上随波逐流去了,去远了,永远地去了。”

  正像安旗描写的那样,在传说中,李白不仅是溺死的,而且在死后,他“骑鲸升天”了,骑鲸之说,最早见于晚唐诗人贯休的《观李翰林真》:“宜哉杜工部,不错道骑鲸。”到了北宋,文人歌咏便将骑鲸与捉月连起来。如梅尧臣在《采石月下赠功甫》中还写道:“不应暴落饥蛟涎,便当骑鲸上青天。”郭祥正《采石渡》中写道:“骑鲸捉月去不返,空余绿草翰林墓。”金代李俊民《李太白图》:“谪在人间凡几年,诗中豪杰酒中仙。不因采石江头月,那得骑鲸去上天。”当然,这只是文人墨客的美好想象,我们不必信以为真。

  对于李白有可能溺死,杜甫在冥冥之中仿佛有预感。他在“三夜频梦”李白之际,作《梦李白二首》,反复提出自己的担心:“江湖多风波,舟楫恐失坠。”“水深波浪阔,无使蛟龙得,”杜甫深知李白嗜酒,也知李白晚年正“病起暮江滨”。但醉与病都不使他担心,唯担心有舟楫失坠的可能。这种担心不能说事出无因。起码可以说是杜甫在往年与李白交往的实践得出的体验。李白之死难道真的被杜甫的担心所言中吗?

  对于李白是否是病死或溺水无论肯定或否定都无法加以确证,他的死因只能成为千古疑案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