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일명 서불)이 동쪽으로 건너갔다는 동도에 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 28년(BC219)에 '제나라의 서불 등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저 멀리 바다에 봉래 방장 영주라는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다합니다. 재계하고 동남동녀와 함께 그 곳에 가서 모셔 오겠나이다." 그래서 동남동녀 수천 명을 뽑아 서불에게 주고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했다.' 진시황 37년(BC210) 서복은 다시 한 번 시황을 알현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9년 전 선약을 구하러 처음으로 바다에 나갔을 때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도 아무 성과없이 돌아온 이유는 큰 물고기가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쇠뇌를 잘 쏘는 사수와 함께 다시 바다로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서복의 거짓말을 곧이들은 진시황은 다시 한 번 그를 바다로 내보냈다. 이에 서복은 동남동녀 3000명과 온갖 종류의 장인인 백공을 거느리고 '오곡의 씨앗'을 챙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동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 기록상 최초로 동쪽으로 건너간 사람이 되었다. 그가 동쪽으로 건너간 일에 대해서는 '사기 회남형산열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은 동남동녀 3000명을 파견하고 오곡의 종자와 백공을 하사하며 길을 떠나게 했다. 그런데 서복은 평원광택을 손에 넣은 뒤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동쪽으로 건너간 서복은 진대 문명을 일본에 전파시켜 일본사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서복을 농경의 신, 양잠의 신, 의약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천 년동안이나 그를 기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서복의 동도를 처음으로 언급한 이래 서복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의심스러운 점중의 하나는 서복이 동쪽으로 건너가 일본에 도착했느냐는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서복이 동쪽으로 건너가 정말로 일본에 도착했다고 보고 있다. 개중에는 서복이 일본에 도착해 일본 왕조를 세웠으며 신무천황이 바로 서복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해남도나 한반도 심지어는 미주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기 회남형산열전'에는 '서복이 평원광택을 얻은 뒤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복이 상륙한 곳이 평원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은 3천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다. 그중에는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가 4대 섬으로 총면적이 37만 6700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전국에서 평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24%인데, 그중에서도 간토평야, 노비평야, 가나이평야 등을 비교적 너른 평원으로 꼽을 수 있다. 일본 열도 외에 기타 섬에서는 '평원광택'이라는 지리적 특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밖에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은 후세의 역사책에도 실려있다. '삼국지 오주전'에는 '나이 많은 이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이 방사 서복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봉래 신산과 선약을 찾도록 했으나 그곳에 도착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후한서'에는 서복이 바다를 건너 신선을 찾은 일을 '왜국' 뒤에 덧붙여 기록하였다. 오대 시기의 승려 의초가 쓴 '의초육첩'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본국은 왜국이라고도 하는데 동해 가운데에 있다. 진나라 때 서복이 동남 500명과 동녀 500명을 거느리고 이 나라에 도착했다.' '신황정통기', '임나산문집', '이칭일본전', '동문통고' 등 일본 학계의 적잖은 사료에도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간 일이 기재되어 있다. 마쓰시타 겐린은 '이칭일본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주와 단주는 모두 일본을 말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이노쿠니 구마노의 산아래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구미노 신궁 동남쪽에 봉래산이 있고 산앞에는 서복의 사당이 있다.' 아라이 긴미는 '동문고'에서 '지금의 구마노 부근에는 하타스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현지인들에 의하면 옛날 서복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7,8리 떨어진 곳에 서복의 서당이 있다. 이처럼 옛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고 진씨 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나라 사람이 왕래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일본 민간에서 서복은 농신, 양잠신,의약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일본인들 중에서도 자신이 서복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일본어에서 진(하타)과 우전(하타)의 발음이 서로 같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일본의 전 총리 하타 쓰토무도 자신이 서복의 후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나는 진나라 사람의 후손이다. 우리 성은 아주 오래전에 '진'이라고 썻다. 내가 총리가 되었을 때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우리 집안에 대해 조사했는데 조상의 묘비에서도 '진'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그저 전설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고문헌 가운데 서복의 전설이 최초로 보이는 '신황정통기'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17,18세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송원이래 중국 문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사실 수당시기에도 일본과 중국의 왕래는 매우 빈번했지만 문헌에서 서복이라는 두 글자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한편 서복의 동도를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아니라 미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서복이 동도한 시기와 미주의 마야 문명 흥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전 상하이 기남대학 교수이자 남경고물보존소 소장이었던 대만의 위취현은 '중국인, 미주를 발견하다'에서 미주의 특산물인 40여종의 동식물과 광산물을 선진 시대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고증한 바있다. 예컨대 '춘추'에는 '익새 여섯 마리가 뒤로 날아 송의 수도를 지나갔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익새'는 미주 고유의 '벌새'라는 것이다. 은이 멸망하자 은나라 사람들 중의 일부가 북미로 도망갔다가 귀국하면서 벌새 여섯마리를 가지고 돌아오자, 제환공이 이떄의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벌새 그림을 그려 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위취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많은 중국인들이 미주에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서복이 미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보았다. 오나라 사람의 '외국도'에서도 '단주는 낭야에서 만 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리로 따져 분석하더라도 일본이 아니라 미주라는 것이다. 왜국에 대해 최초로 기술한 '후한서'에서도 단주와 일본을 구별하였다. '단'자에는 큰 섬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아메리카 대륙은 '단'자를 닮았기 때문에 글자의 모양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호놀룰루에는 중국의 전서체 글자가 새겨있는 정방형의 암석이 남아 있고 샌프란시스코 부근에서도 중국 전서체 글자가 새겨있는 옛 화살 등의 문물이 출토되었다. 이 모든 것이 서복이 미주로 건너갔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두번 째 의심스러운 점은 서복이 왜 동도했느냐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거액을 아끼지 않고 서복의 동도를 지원한 목적은 선약을 찾고 장생불로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적혀 있다. '십주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때의 일이다. 서역의 대원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많은 이들의 시체가 길가에 널브려 있었는데 까마귀가 풀을 물고와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에 덮어주자 모두 살아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벼슬아치가 진시황에게 이 일을 아뢰자 진시황은 사자를 보내 이 풀을 가져오게 할 요량으로 귀곡선생에게 물었다. 귀곡 선생은 ' 동해의 조주에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풀이 자랍니다. 경전이란 밭에서 자라는 그 풀은 양신지라고 합니다. 양신지의 잎은 줄풀과 닮았습니다. 다른 풀들과 무리지어 자라지 않고 풀 한 포기로 1000명을 살릴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이 풀을 찾기 위해 서복과 동남동녀 각 3000명을 큰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냈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그렇다고 모두가 이 의견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잖은 역사서에서는 화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서와 후한서에는 이에 상응하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먼저 '한서 교사지' 하편의 기록을 보면 '서복 한종 등에게 수많은 동남동녀를 주고 바다에 가서 선약을 구해오도록 했는데 그들이 도망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은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이다. " 또 이주 , 단주라는 곳이 있다. 풍문에 따르면 진시황이 방사 서복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내주며 바다로 나가 봉래에서 신선을 찾아 선약을 구해 오도록 했으나 얻지 못했다고 한다. 주살을 당할까 주려웠던 서복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 당 시인 왕준은 '동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출렁이는 배 하이얀 물결은 꽃같은 얼굴 비추고 서복이 거느린 무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네. 위태울 때 진을 피한 것은 매한가지거늘 이번 길이 어찌 무릉도원 같으리까' 작자는 서복이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도원명의 '도화원기'에서 무릉군의 어부가 진의 난리를 피해 도화원으로 간 일에 비유하고 있다. 원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남송의 승려 조원도 서복을 추모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약초를 캐러 간 선생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고국 산천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어수선하네. 오늘 선생께 멀리서 향피워 올리는 것은 노승도 진을 피해 이 곳에 왔기 때문이네.' 조원은 자신이 일본에 간 것을 서복이 진시황을 피해 달아난 것에 비유했다. 일본 신구시 서복의 묘비에도 이렇게 적혀있다. '무릇 서복의 무리는 진시황의 학정을 피해...'
한편 일부 학자들은 '해외 개척'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지녔던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에 관한 이야기를 곧이들었을 리 만무하다고 본 이들은 서복을 바다로 내보낸 일을 해외 개척과 연관시켜 생각했다. '여씨춘추, 위욕' 편에서는 진나라 통치자의 이상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대하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북호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삼위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부목에 이른다.' 여기서 '부목'은 부상으로 일본을 의미한다. 진시황이 서복 등을 수차 바다로 내보내 삼신산을 찾게 한 것은 단순히 신약을 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쪽의 영토를 일본까지 확장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12년간 통일 천하를 다스리면서 네차례나 동쪽 연해를 순시했다. 이 것은 동쪽의 여러 섬에 진시황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는 ' 사황이 동쪽을 순시한 근본적인 목적은 동으로 부목에 도달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복이 바다로 나가 동쪽으로 향한 것도 진시황의 이상과 대망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진시황은 낭야의 비석에 이렇게 새겨넣었다.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황제의 뜻에 따랐으며, 그 외에도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시켰다.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었고, 어둡고 편벽하여 수레와 배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모두 천수를 다했으며 바라는 일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서쪽으로는 사막을 넘고, 남쪽으로는 북호에 다다르고 동쪽으로는 동해, 북쪽으로는 대하에 다다랐다. 만천하에 황제의 덕이 미치니 자진하여 신하라 청하며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내용도 새겼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이 일찍부터 일본을 병탄할 뜻이 있었다는 점이다. 서복이 동쪽으로 건너간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세번 째 의심스러운 점은 서복의 선단이 어디서 출항했느냐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주요 견해는 하북성 진황도와 황화 근처라는 설, 절강성 자계와 주산이라는 설, 산동성 등주만과 교주만 낭야 성산두라는 설이다. 하북성 염산현이 출항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서복이 진짜 바다에 나갔으며, 무체구에서 바다에 인접한 곳이 바로 출항지였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고진대의 옛터를 그 증거로 들었다. 기원전 219년 동쪽으로 순행하던 진시황이 낭야에 이르렀을 때 서복은 처음으로 바다에 나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출항지가 부적합해 도중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서복은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다시 낭야를 찾앗을 때 서복은 재차 바다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번에는 진시황의 뜻에 따라 출항지를 바꿔서 제나라의 옛땅인 요안에서 무체구를 거쳐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동쪽을 향해 일본에 도착한 서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낭야 출항설이다. 서복이 신선을 찾아 바다를 건넌 일이 낭야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때문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순행하면서 세 번 낭야에 들른 적이 잇는데, 바로 이 때 두차례 서복을 만나 보았던 것이다. 서복이 시황제에게 글을 올린 곳이 낭야였기 때문에 출항을 준비했던 곳도 출항지도 자연스레 낭야가 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사기의 기록이다. '진시황이 강남을 순행하고 돌아올 때 시황은 오지방을 거쳐 강승에서 강을 건너 해안을 따라 북항하여 낭야에 이르렀다. 방사 서불 등이 선약을 구하러 바다에 나간 지 여러 해가 지났거만 선약은 구하지도 못한 채 막대한 비용만 들이고 있었다. 질책이 두려웠던 그들은 거짓말을 둘러댔다. '봉래산의 선약을 구할 수는 있사오나 늘 커다란 상어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 없었나이다. 청컨대 활 솜씨가 뛰어난 궁수를 딸려 보내 주시면 그 것을 보는 즉시 쇠뇌로 쏘겠습니다" 시황은 바다를 다스리는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꾸었는데, 그 해신의 모습이 사람과 같았다. 꿈을 해몽하는 박사에게 물어보니, '해산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어나 교룡이 나타나면 그 것이 바로 해신이 나타날 징조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제사를 빈틈없이 지내셨으니 지금 이 악신은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선신이 찾아오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시황은 선약을 구하러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어를 잡는 큰 어구를 주도록 명하고는 시황 자신도 직접 쇠뇌를 들고 대어가 나타나면 쏘려고 기다렸다. 낭야에서 북쪽으로 영성산에 이르도록 대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부에 이르러 대어가 나타나자 한 마리를 쏴 죽였다. 그리고 나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시황은 평원진에 이르러 병을 얻었다.' 사마천은 진시황과 서복이 낭야에서 출항하여 북상해 성산을 우회하여 지부에 이르러 거대한 물고기를 화살로 쏴죽였다고 명확히 언급했다. 진시황은 돌아가는 길에 평원진에서 병이 나 세상을 떠났고 서복은 멀리 이역을 항해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서복의 선단은 낭야항에서 출항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서복과 관련된 여러가지 수수께끼 가운데 결론이 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망망대해를 헤치고 서복이 동쪽으로 건너간 수수께끼는 결국 가장 오래된 현안이 되고 말았다.
徐福东渡之谜
徐福东渡一事,最早出现于司马迁的《史记》。据《史记?秦始皇本纪》记载:秦始皇二十八年(公元前219年),“齐人徐福等上书,言海中有三神山,名曰蓬莱、方丈、瀛洲,仙人居之。请得斋戒,与童男女求之,于是遣徐福发童男女数千人,入海求仙人。”秦始皇三十七年(公元前210年),徐福再次求见秦始皇。因为九年前第一次入海求仙药,花费了巨额钱财未果,这时徐福谎称由于大鱼阻拦所以未能成功,于是请求配备强弩射手再次出海。秦始皇便相信了徐福的谎言,第二次派徐福出海。徐福于是率“童男童女三千人”和“百工”,携带“五谷子种”,乘船泛海东渡,成为迄今有史记载的东渡第一人。对于徐福东渡,《史记?淮南衡山列传》也有记载:“(秦始皇)遣振男女三千人,资之五谷种种百工而行。徐福得平原广泽,止王不来。”
徐福东渡把秦代文明传入日本,促进了日本社会质的飞跃。徐福因此在日本被尊为农耕神、蚕桑神和医药神,日本纪念徐福的祭祀活动历千年而不衰。但是,自从司马迁在《史记》中第一次记载徐福东渡活动以来,也把与徐福有关的疑谜留给了后人。
疑团之一,徐福东渡是否到达日本?关于徐福的目的地的问题,学术界大多数学者认为,徐福东渡确实到了日本,甚至有人提出,徐福到日本后建立了日本王朝,徐福就是神武天皇;也有学者对此一说法提出质疑。认为到了海南岛或者是朝鲜,还有人提出到了美洲。
据《史记?淮南衡山列传》中的记载:“徐福得平原广泽,止王不来。” 可以推测徐福登陆地是一平原。日本是一个由三千多个小岛组成的岛国。本州、九州、四国与北海道是其中四个大岛,总面积达到37.67万平方公里。全国有24%的面积为平原。较大的平原有关东平原、浓尾平原、畿内平原等。除日本列岛外,其他岛屿没有“平原广泽”的地理特征。
另外,徐福东渡日本,在后世的史书资料中也有记载。在《三国志?吴书?吴主传》中也有记载:“长老传言秦始皇遣方士徐福将童男女数千人入海,求蓬莱神山及仙药,止此洲不还。”《后汉书》中,把徐福入海求仙事件附在倭国之后。五代时期义楚和尚所写《义楚六贴》中提到:“日本亦名倭国,在东海中,秦时,徐福将五百童男,五百童女止此国。” 在日本学术界,也有不少史料记述徐福到日本的情况,有《神皇正统记》、《林罗山文集》、《异称日本传》、《同文通考》等文献。林下见林在《异称日本传》中说:“夷洲、澶州皆日本。相传纪伊国熊野之山下有徐福墓。熊野新宫东南有蓬莱山,山前有徐福祠。”新井君美在《同文通考》中说,“今熊野附近有地曰秦住,土人相传为徐福居住之旧地。由此七八里有徐福祠。其间古坟参差,相传为其家臣之冢。如斯旧迹今犹相传,且又有秦姓诸氏,则秦人之来往乃必然之事”。和歌山新宫町《秦徐福碑文》这样描述:“今东海可当蓬莱者,无可舍皇国他求,则谓日本国,得其实也必矣。”
在日本民间,徐福被尊称为农神、蚕桑神、医药神。还一些日本人认为自己是徐福的后裔,他们的根据是:在日语中,秦与羽田的发音相同。日本前首相羽田孜就称自己是徐福的后裔。他说:“我是秦人的后裔,我的姓在很早以前写作‘秦’,我当首相时,考古学家和历史学家对我的家族进行了调查,并在祖墓碑上发现了‘秦’字。”
然而,有些学者认为,徐福东渡日本只是传说。日本古文献中载有徐福传说者以《神皇正统记》(1339年)为最早,其他大约是十七八世纪的记载,因此他们推断是受了宋元以来中国文献的影响。在隋唐时期,日本与中国交往极为频繁,但在文献之中却罕见“徐福”二字。又有学者认为,徐福东渡是历史事实,但不是去了日本,而是美洲,因为徐福东渡的时间与美洲玛雅文明的兴起相吻合。台湾前上海暨南大学教授、南京古物保存所所长卫聚贤在《中国人发现美洲》考证,美洲特产四十多种动植物矿产为先秦人民所知。如《春秋》记载“六□退飞过宋都”,“□”即美洲特有的“蜂鸟”。是殷朝被灭国后,部分殷人逃到北美后,回国观光带回六只蜂鸟,齐桓公为纪念此次远征,特在旗上绘制“蜂鸟图”。聚贤认为哥伦布在发现美洲之前,已有多位中国人到过美洲,故徐福后来东渡美洲很有可能。吴人《外国图》指出“亶洲去琅琊万里”,根据距离分析根本不是日本,而是美洲。最早记述倭国的《后汉书》是把亶洲与日本区别开来的。“亶”字有大岛的涵义,美洲大陆像“亶”字。故以字形命名。现在檀香山还遗有带有中国篆书刻字的方形岩石,旧金山附近也有刻存中国篆文的古箭等文物出土,所有这些都是徐福东渡美洲的明证。
疑团之二,徐福东渡为何东渡?关于徐福东渡的原因,据《史记》所言,秦始皇不惜以巨资支持徐福东渡,是为了寻神山仙药,求长生不死药。《十洲记》也这样记载:“秦始皇时,大宛中多枉死者横道,数有鸟衔草,覆死人面皆登时活,有司奏闻始皇。始皇使使者赍此草,以问鬼谷先生,云是东海中祖洲上不死之草,生琼田中,一名养神芝。其叶似菰,生不丛,一株可活千人。始皇于是谓可索得,因遣徐福及童男童女各三千人,乘楼船入海,寻祖洲不返。”
并非所有的言论都支持这种说法,还有不少史书提出了避祸说,《汉书》及《后汉书》中都有相应的记载。《汉书?郊祀志下》这样说:“徐福、韩终之属多赍童男女入海,求神采药,因逃不还,天下怨恨。”《后汉书?东夷传》说:“又有夷洲及澶洲,传言秦始皇遣方士徐福将童男女数千人入海,求蓬莱神仙不得,徐福畏诛不敢还,遂止此洲”。唐代诗人汪遵在《东海》诗也写道:“漾舟雪浪映花颜,徐福携将竟不还。同舟危时避秦客,此行何似武陵滩。”作者把徐福入海不归比作陶渊明《桃花源记》所写的武陵郡渔人避秦乱而移居桃花源之事。南宋祖元和尚为了逃避元代的统治,也东渡到了日本。他有一首祭徐福的诗:“先生采药未曾回,故国山河几度埃。今日一香聊远寄,老僧亦为避秦来。”祖元把自己去日比作徐福避秦。日本新宫市徐福墓碑文也写道:“盖徐生之避秦……”
还有一些人持“海外开发”的观点。他们认为,以秦始皇的雄才大略,绝不会轻信长生仙药之说,他派徐福出海,可能跟海外开发有关。《吕氏春秋?为欲篇》指出了秦国统治者的理想:“北至大夏,南至北户,西至三危,东至扶木,不敢乱矣。”“扶木”就是“扶桑”,即后来所说的日本。秦始皇一再派徐福等入海寻找三神山,决不是单纯为了采神药,而是为了把东方疆土开拓至日本。
秦始皇统一天下只有十二年的时间,但是四次到东方沿海巡视,这说明他对东方诸岛的极大关注。有的学者说:“始皇东巡的根本目的在于实现东至扶木的理想,而徐福探海东渡正是实现始皇理想宏愿的具体行动。”秦始皇曾琅琊刻石中说:“普天之下,抟心揖志。器械一量,同书文字。日月所照,舟舆所载。皆终其命,莫不得意。”又说:“西涉流沙,南尽北户。东有东海,北过大夏,人迹所至,无不臣者。”从中可以看出,秦始皇早有吞并日本之意,徐福东渡,或许正与此有关。
疑团之三,徐福的船队从哪里启航?关于这一点的主要说法有:河北省的秦皇岛和黄骅附近说,浙江省慈溪和舟山说,江苏省海州一带(现在的连云港赣榆县)说,山东省登州湾(龙口市黄县)及胶州湾徐山(青岛)琅琊、成山头说。
对于河北盐山县出海说的说法,持这一观点的人认为徐福入海确有其事,无棣沟入海处即徐福入海处,至今犹存的古秦台旧址就是见证。公元前219年(秦始皇二十八年),秦始皇东巡至琅琊,徐福第一次请求入海。因入海地点选择不当,中途受阻而归。公元前210年(秦始皇三十七年),秦始皇再次来到琅琊,徐福请求再次入海。他根据秦始皇的旨意,更换了出海地点,在原齐国旧地饶安(今盐山县旧县镇),经无棣沟入海。这次东渡到达日本一直未归。
然而,最有可能的一种是琅琊出海说。徐福的渡海求仙,与琅琊的关系最为密切。秦始皇巡视天下曾三临琅琊,其间两次召见徐福。由于他上书地点在琅琊,其出海准备工作和入海地点自然就是琅琊。《史记》这样记载,“(秦始皇巡幸江南),还过吴,从江乘渡,并海上,北至琅琊。方士徐福等入海求神药,数岁不得,费多,恐谴,乃诈曰:‘蓬莱药可得,然常为大鲛鱼所苦,故不得至,愿请善射与俱,见则以连弩射之’。始皇梦与海神战,如人状。问占梦,博士曰:‘水神不可见,以大鱼蛟龙为候。今上祷祠备谨,而有此恶神,当除去,而善神可致’。乃令入海者赍捕巨鱼具,而自以连弩候大鱼出射之。自琅琊北至荣成山,弗见,至之罘,见巨鱼,射杀一鱼,遂并海西。至平原津而病。”司马迁明确的指出,秦始皇与徐福自琅琊启航北上,绕成山至之罘,射杀一巨鱼后,秦始皇返回至平原津而病,不日逝世。而徐福则自之罘射巨鱼后即远航异域,从中可以看到,徐福船队的启航港应是琅琊港。
迄今为止,仍有众多有关徐福的疑谜无法作出肯定或否定的结论。大海茫茫,徐福东渡之迷,遂成千古悬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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