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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떻게 시황제의 나라가 되었나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11일 개헌안을 결국 통과시켰다. 이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자신의 이름을 딴 사상을 헌법에 올린 채 임기 제한 없는 주석직에 오르게 됐다.


2012년 첫 주석직 취임때만 해도 ‘역대 최약체’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듣던 시 주석이었다. 하지만 이제 마오쩌둥 버금가는 권력을 거머쥔 그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중국이 반(反)부패 작업을 통해 경쟁자들을 옥죄고 인터넷 등 여론에 재갈을 물리는 감시사회로 거듭날 것이라 보고 있다. 이미 시 주석은 반부패 작업을 맡아온 중앙기율검사위원회를 국가감찰위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인터넷 검열을 강화하며 비판세력을 옥죄고 있다.

‘호랑이(부패권력층)이든 파리(지방 비리공무원)든 다 때려잡겠다’
시 주석의 권력을 강화한 일등 공신은 반부패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기반엔 역설적이게도 그의 정적이었던 보시라이가 있다. 보시라이는 혁명원로 보이보의 아들로 시 주석도 속해있던 태자당 그룹의 맏형이었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그였지만 2011년 핵심 측근이 미국 망명 시도를 한 데 이어 아내가 살인사건을 일으키자 몰락했다. 이어 2012년엔 후진타오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 당 중앙 통일전선부장의 아들이 만취 상태로 페라리를 몰다가 숨졌는데 이 자리엔 나체의 여대생 두 명이 있었다. 중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공산당은 썩었다’, ‘공산당의 부패는 고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분노가 매일같이 터져나왔다.

주석직에 갓 올라선 시 주석은 호랑이든 파리든, 그 누구든 부패했다면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고 선언했다. 시 주석의 단호함에 중국은 환호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악용되기 시작했다. 시 주석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정치적 경쟁세력이었다. 자신의 측근인 왕치산을 사정작업 총 책임자로 앉힌 후, 정치적 숙적을 하나하나 쳐냈다.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였던 저우융캉, 중국 군부 내 장쩌민 인맥의 대부 궈보슝·쉬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이 숙청됐다. 부패란 이유로 제거하는데 장쩌민과 후진타오도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시 주석을 견제할만한 세력들은 기반을 잃었다.

시 주석이 이번 개헌에 국가감찰위를 신설하겠다고 넣은 것 역시 사정을 통한 정적 숙청 작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국가감찰위를 기반으로 시 주석은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인물에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측근들이 딴 마음을 품지못하도록 감시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시 주석의 주변엔 그를 견제할만한 인물도 없다. 이번 전인대를 통해 시 주석의 오른팔이자 사정 작업의 기틀을 닦은 왕치산이 정계로 돌아왔다. ‘2인자’ 리커창 총리가 맡던 경제 분야는 시 주석의 50년 지기 친구이자 시코노믹스를 고안한 류허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에게로 돌아가게 됐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상무위원 중 왕양과 한정이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과 상하이방 출신이라 하지만 계파색이 엷은데다 젊은 시절부터 시 주석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다. 일각에선 10년 안에 공청단과 상하이방 등 중국 공산당 내 계파가 모두 사라진 채 시 주석의 측근들만 남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감시국가는 지도부에게만 한정된 것이아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아지고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나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웨이신’이 활성화되자 시 주석은 이에 대해서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중국 당국은 임기 제한 폐지가 개헌안으로 상정됐다는 소식이 번지자 인터넷 SNS 및 메신저에서 ‘연임’, ‘임기 제한’, ‘시쩌둥’ 등의 검색을 차단했다. 시 주석과 닮은 이미지로 인기를 끌던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가 꿀단지(권력)를 안고 있는 그림 파일도 차단했다. 지식인들의 비판이 중국 대학생이나 젊은 층의 입소문을 타고 일반 민중에게 번지지 않도록 입을 막은 것이다.

그는 인터넷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리옌훙 바이두 회장, 류창둥 징둥 회장 등 유명 IT 업체 최고경영자(CEO)에게 정협(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요직을 제공하고 지원을 확대하는 동시에 콘텐츠 관리에 허술한 업체들에 벌금을 가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중국 당국은 텐센트, 바이두, 알리바바 등에 가짜뉴스와 음란물 등을 유통한 혐의를 근거로 벌금을 부과하고 반정부 인사들의 위챗 계정을 폐쇄토록 한 바 있다. 장기집권 체제로 돌입하며 중국 곳곳에선 시 주석을 찬양하기 바쁘다. 이미 마오쩌둥에게만 붙이던 ‘인민의 영수’ 역시 시 주석을 가리키는 말로 불리고 있다. 중국 칭하이성의 왕궈성 당 서기는 “칭하이성의 티베트족 주민은 시 주석을 신(神)으로 여긴다”며 “목축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주민은 ‘오직 시 주석만이 살아 있는 보살’이라고 말한다”고 언급했다. 견제받지 않고 비판도 듣지 않은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할 수 있는 시 황제의 중국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시 황제’로 만든 최고 공신은 역대 최약체 총리 리커창(李克强)을 꼽을 수 있다. 이전의 중국의 주석과 총리, 장쩌민-주룽지, 후진타오-원자바오 등은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상호 협의 아래 중국을 통치했다.

“텐안먼 광장, 한 소녀가 머리를 온통 그을린 채 '엄마, 엄마'를 울부짖고 그옆의 한 남자는 가솔린을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뒤 가부좌를 틀고 있다.”

2001년 1월 30일, 중국 국영중앙(CC)TV 오후 8시 메인뉴스는 끔찍한 화면 세례를 퍼부었다. 그 어떤 엽기 드라마보다 참혹한 실제 상황에 시청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중국의 중원 허난(河南)성에서 올라온 파룬궁(法輪功) 수련자 5명이 텐안문 광장에서 집단으로 분신자살을 하는 장면이다.

이때 허난성 성장은 리커창 현 총리. 그가 1998~2004년 7년간 수장으로 있던 허난성은 조직폭력, 에이즈와 파룬궁 창궐 지역으로 차별대우받는 이른바 ‘중국의 고담’이었다.

세계 4대 문명발상지 황허(黃河)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이름 붙여진 허난성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 까마득히 펼쳐져 있다. 그러나 창강(長江) 남쪽의 장쑤성과 저장성에 비하면 땅이 메말라 풍작과 흉작의 격차가 심했다. 예로부터 허난성 주민들은 유약하고 온화한 강남인과 반대로 거친,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이르는 곳마다 무법지대가 있고, 도박꾼과 무뢰배는 물론 마적에서 무덤 도굴꾼에 이르는 어둠의 무리가 들끓고 있었다.

1998년 6월 리커창은 44세 나이로 허난성 성장 대리 겸 부서기로 임명돼 최연소 성장 및 첫 박사학위 보유 성장을 기록했다.

리커창은 허난성 성장과 당서기로 재직하며 ‘중원굴기(中原崛起) 슬로건을 내세웠다. 동부 연해안의 자본·인재를 끌어들여 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990년대 초 31개 성 중 28위에서 중위권인 8위로 상승시켰다. 그리고 한때 허난 주민의 ‘4분의 1이 에이즈 감염자, 40분의 1이 파룬궁 신도’라는 악명높던 허난성 형편을 어느 정도 호전시켰다. 하지만 그의 실적은 '평균작'이었다. 리더십과 탄탄한 경제이론 지식을 갖춘 리커창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것이었지만 당중앙이 당초 기대했던 바에 비한다면 그의 성적표는 낙제를 겨우 면한 수준이었다.

리커창은 그의 강력한 후견인 후진타오가 집권한 이듬해인 2004년 12월 노후 공업지대인 동북지방 진흥의 임무를 받고 동북3성의 맏형격인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옮겼다.

유사 이래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주류민족인 한족(漢族)의 가슴속 영토에는 만주(滿洲)가 없었다. 만주가 중국인의 영토의식의 판도밖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해 줄 수 있는 자료들은 반만년 중국사의 벌판에 수북하게 널려 있다.

세세대대로 한족에게 만주지역은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鷄肋)'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의 입장에서 만주는 조상대대로 국경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본토를 위협하거나 지배해 온 이른바 오랑캐들, 부여·고구려·발해·말갈·거란·여진·몽골·만주족의 본거지였으니.

특히 랴오닝성은 1895년 청·일 전쟁의 패전으로 랴오둥(遼東)반도를 일본에 할양했던 치욕의 역사와 만주국(1931~1945년)시절 일제식민지배 14년간의 회유책과 친일의식화교육, 랴오닝에 집중투자한 일본 자본의 영향 등으로 중국 전역에서 반일감정이 비교적 약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랴오닝성 당서기로 부임한 리커창은 국유기업 개혁과 대량해고 난제를 해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모든 사람은 집이 있어야 한다(人人有房住)’는 슬로건을 내걸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주택 120만호 공급을 통해 주택난을 일시에 해결, 랴오닝 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랴오닝성에서도 허난성과 마찬가지로 리커창은 주목할만한 업적을 쌓지는 못했다. 반면 시진핑은 저장성 성장과 서기 재임 7년간(2001~2007) 성 1인당 GDP를 광둥성을 제치고 전국 최고로 도약시키는 눈부신 업적을 거두었다.

리커창이 랴오닝 당서기 재임 당시 대다수 일본 언론은 그가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 국가부주석을 맡아 2012년 후주석에 이어 당 총서기로 오르게 될 것으로 앞을 다투어 보도했었다.

리커창은 일본과는 오래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1985년 3월 중·일 청년우호교류 협회의 중국측 청년대표단의 간사로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일본 정계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지속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전 일본 민주당 대표는 2005년 랴오닝성을 방문, 리커창을 예방한 후 “그가 장차 중국의 최고 영도자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공언했었다.

특히 랴오닝이 중국 31개 성·시 중 일본과 경제·문화 교류가 가장 활발하다는 점도 일본 정계가 리커창의 국가주석 등극을 고대했고, 또 ‘재패니즈 프랜드리 리 주석’ 시대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목이다.

그러나 리커창은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9인 중 서열 7위로 입성, 시진핑(서열 6위)에 한발 밀렸다. 이듬해 2008년 3월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 자리인 국가부주석에 임명되고 리커창은 원자바오 총리의 후계자 자리인 상무부총리를 맡았다.

앞서 있던 리커창이 시진핑에 역전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리커창 실적이 시진핑보다 미흡했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이후 공직자 인사고과에는 실적이 절대적 비중을 하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들 대다수는 성급 이상의 지방수장을 10년 이상 맡게 한 후 그 중 실적이 탁월한 자로 충원돼 왔다.

둘째, 권력 핵심중의 핵심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 비서이자 현역 중령급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십수년간 지역군구 총지휘관을 겸직한 시진핑에 비해 리커창의 군부내 인맥과 지지가 비교할 바 없이 취약했다.

끝으로 중국의 주적인 일본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었던 리커창이 중국 내지에 비해 반일정서가 비교적 약한 지역인 랴오닝성 당서기 재직 중 일본 언관학계가 차기 영도자로 그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띄워주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2013년 3월 시진핑과 리커창이 각각 중국의 ‘오너’와 ‘CEO’인 국가주석과 국무원 총리에 취임하자 ‘시-리 체제’가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했었다. 경제학 박사 리커창은 역대 최고의 경제 총리로 기대되며 그의 성을 딴 '리코노믹스(리커창+이코노믹스)'라는 말을 낳았다.

그러나 2015년 증시 폭락사태에 이어 리 총리가 역점을 뒀던 국유기업 개혁, 자유무역지대 건설 등은 점차 ‘변방의 북소리’가 되어갔다. 더구나 2016년말 개최된 중국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전회) 때 시 주석에 '핵심' 칭호가 부여됐다. 직후 리 총리를 시 주석과 병렬로 두는 '시-리 체제'라는 표현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2018년 3월 현재, 시 주석은 리 총리가 묵묵히 '시진핑 핵심'을 추종하는 태도로 보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지는 않을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리커창을 시진핑 제2기 정부의 총리에 유임시킨 것으로 보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