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젠성 취안저우 중심의 서북쪽에는 난안(南安)시가 있고 난안시 외곽에는 안시현(安溪)현이 있다. 안시와 난안의 지형은 북서고, 동남저의 형태로 전체적으로 산악지대다. 난안의 전체 면적 중 경지는 20%에 못 미치며 안시의 경우는 더욱 심해 경지 면적이 10% 남짓에 불과하다. 안시의 서북부지역 평균 해발고도는 700m, 동남부의 평균 해발고도는 500m 이상이며 1000m 이상의 높은 산봉우리가 수백 개에 이른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흙탕색의 시시(西溪)가 안시의 중심을 관통해 난안으로 흐르고, 이 강은 난안시 중심을 통과해 동시(东溪)와 합류해서 더 큰 진장(晋江)이 된다. 양 지역 모두 강은 있으나 경지가 좁아 농업지대로는 적당하지 않다. 대신 안시는 차 재배에 적합한 토양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우롱차 철관음(铁观音)은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이다.
난안과 안시의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동남아로 이주해 민난 화교(闽南华侨)의 중심이 됐다. 농업에 적당하지 않은 지형, 해양활동의 중심지인 취안저우와 멀지 않다는 점이 이들의 해외이주를 촉진했을 것이다. 취안저우의 화교역사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986~98년 기준 난안 출신 화교는 128만 6000명, 안시현 출신 화교는 68만 명이다. 201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난안시 인구는 141만 명이었고, 안시현 인구는 108만 명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구가 새 삶을 개척하기 위해 미지의 땅으로 갔는지 알 수 있다. 박물관의 자료는 재미있는 사실도 알려준다. 안시현 대건(大墘) 임씨 집안의 경우 1880년 이후 20여 년 동안 해외로 가장 많이 이주했는데, 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얀마에 각각 25% 이상이 진출했다고 한다.
난안 출신들은 이미 1836년 싱가포르의 탄종 파가(Tanjong Pagar) 지역에 푸젠성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10세기 인물 광택존왕(广泽尊王)을 모신 사원을 건설했다. 훗날 이 지역이 식민정부에 수용되자 그때 받은 보상금으로 1910년경 자리를 옮겨 현재 자리에 펑산사(凤山寺)를 건립한다. 그들이 떠나온 중국 난안에 광택 존왕을 모신 펑산사가 있기 때문에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싱가포르에 동일한 사원을 건설한 것이다. 역사적 유적이 적은 싱가포르에서 지금 펑산사는 중요한 문화재가 되어, 난안인뿐 아니라 전체 푸젠인의 복을 비는 장소로 바뀌었다. 난안인들은 1926년 펑산사 옆에 싱가포르난안회관(南安会馆)을 건설했다. 난안회관 설립의 주역 중에는 임씨가 많았는데, 아마 대건 임씨들도 있었을 것이다. 난안인들이 1894년 말레이시아 페낭에 건립한 난안회관은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안시인들도 1923년 싱가포르에서 안시인협회를 조직하고 1959년 차이나타운 입구에 4층의 안시회관을 완공했는데, 이는 중국 향우회관 가운데 여전히 중요한 건물로 남아 있다.
동남아 경제를 수놓은 난안인과 안시인은 수없이 많다. 난안 출신으로는 난안시 매산진(梅山镇) 출신의 리콩치안(李光前, Lee Kong Chian, 1893~1967)과 그 아들들이 유명하다. 리콩치안은 10세에 싱가포르로 이주해 교육을 받았고 1909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역시 교육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면서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1915년에 탄카키의 회사에 입사했고, 1920년에는 탄카키의 딸 탄 아이레(Tan Ai Leh)와 결혼했다. 리콩치안은 1927년에 말레이시아 조호의 무아르에서 고무가공 사업을 시작해 대성공을 거둔 후 동남아 전역으로 사업장을 확대해 동남아 최대의 고무가공업체를 만들었다. 1932년에는 OCBC 은행(华侨银行)을 설립했다. 그는 장인 탄카키를 따라 중국의 독립과정에 크게 기여했고, 말레이반도의 화교사회 발전에도 공헌했다. 1952년에는 이씨기금(李氏基金, Lee foundation)을 설립해 체계적으로 싱가포르·말레이시아·중국의 교육사업에 자금을 댔다. 싱가 포르국립대학이나 말라야 대학은 이씨기금의 수혜를 받은 대학들이다.
리콩치안 사후 그의 2세들이 이씨기금을 계속 이어갔다. 2015년까지 이씨기금이 사회에 출연한 자금은 10억 싱가포르 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리콩치안은 비록 정치에 나서지는 않았 으나 경제계의 리콴유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모두 존중받는 인물이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최고의 영예인 ‘탄스리(Tan Sri)’칭호를 받았다. 리콩치안은 고향 매산진에 학교를 건설했고, 이를 기반으로 미술관·도서관·병원 등을 건설해 현재의 광전학촌(光前学村)이라는 대규모 단지를 세웠다.
2세들도 모두 부친과 외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고향의 발전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장남 리청이(李成义)는 외할아버지 탄카키가 설립한 샤먼의 여러 대학이나 부친이 설립한 광전학촌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취안저우 화교박물관 건설에도 자금을 출연했다. 둘째 아들 리청즈(李成智)는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 외에도 세계의 유수 대학에 프로젝트 자금을 제공했고 1990년대 중반 매산진에 이성지공중도서관(李成智公众图书馆)을 설립했다. 3남 리청웨이(李成伟)는 OCBC 은행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50여 년간 OCBC 은행의 이사·행장·회장으로 재직하면서, OCBC 은행을 동남아 최대 은행으로 키워냈다. 리철웨이는 2015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안시가 낳은 대표적 화교기업인으로는 말레이시아의 겐팅하일랜드를 만든 림고통(林梧桐, 1918~2007)을 들 수 있다. 림고통은 안시현 봉래진에서 7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한 해 19세였던 그는 말레이시아로 이주했으며, 26세에 결혼을 하고 40대가 되어 겐팅하일랜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말레이시아의 카지노 산업을 지배하면서 부를 축적해 갔다. 겐팅그룹은 오랫동안 말레이시아의 최대·최고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겐팅그룹이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지은 리조트 월드. 겐팅그룹은 안시 출신 화교 림고통이 만든 대표적 화교 기업이다.
싱가포르가 21세기 들어 성장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논란을 무릅쓰고 카지노를 개설하면서 선택한 기업이 바로 겐팅그룹이다. 겐팅그룹은 센토사 섬에 거의 50억 달러를 투자해 리조트 월드 센토사를 열었다.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대부분이 이 리조트를 방문하고 있다. 겐팅은 또한 현재 제주도에 리조트 월드 제주(제주신화 공원)를 건설, 운영중이다. 림고통은 세상을 떠났지 만 그의 고향 안시현 봉래진은 제주도와 이렇게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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